부산에서 한 달 살기 11월 2일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안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두둑하게 점심까지 먹은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오늘 이렇게 많이 걸을 줄 몰랐지만, 이 도보 여행은 밤에 서문시장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3. 동성로와 섬유산업
오늘날 대구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핫한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은 동성로라고 한다. 동성로 일대는 대구의 중심상권에 있는 패션과 젊음의 거리이며, 대구의 명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각종 쇼핑과 먹거리와 유흥시설이 풍부해서 대구의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예전에 대구를 방문했던 친구 Y는 동성로에 오는 젊은이들의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곳의 젊은이들이 입은 옷 가운데 일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패션이 뛰어난 곳, 즉 서울 강남에서도 찾을 수 없는 멋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허튼소리가 아니라, 대구가 섬유산업의 성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나온 말이다. 또한, 그만큼 대구 동성로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패션을 선도하고, 예쁜 옷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대구 시내에는 섬유산업의 상징 조각물이 여러 곳에 있다. 내가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에도 실타래를 본뜬 조형물을 두 개나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동성로 거리를 걸어가면서 내가 특별히 느낄 수 있는 패션 특징은 없었다. 그것은 하필 내가 갔던 시간이 목요일 점심 무렵이었다거나 패션을 보는 내 눈이 형편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간 내 눈에 동성로 거리를 걷는 젊은 남녀의 패션 감각이 강남이나 홍대 앞에 비해 더 뛰어나거나 세련됐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촌스럽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패션에 관해 관심이 많지도 않고 아는 바도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거리를 걷다가 나는 동성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로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혹시 서성로와 북성로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 도로명의 기원이 궁금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거기에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대구에는 원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읍성이 있었다.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2년 전인 1590년 길이 2700미터 높이 5미터 성곽을 축성한 것이다. 읍성의 동서남북에는 네 개의 대문이 있었고 동서에 따로 백성들이 주로 드나드는 작은 문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대구읍성은 여러 차례 증수되었다.
그런데 1906년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였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불법 철거했다고 한다. 이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상업 활동을 위해 주로 읍성 외곽에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읍성이 상업활동을 방해한다고 불평을 거듭했다. 친일파로서 일본인들로부터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리기도 했던 박중양은 일본인들의 이런 불평을 무마하고 상업활동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조정에다 읍성 철거를 건의했다. 그런데 그는 조정에서 ‘불허’ 결정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성읍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박중양의 비리에 대한 조정의 조사 노력이 있었으나, 당시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설득으로 박중양은 징계를 면했다. 그는 오히려 평남관찰사로 영전됐다가 다시 경북관찰사로 돌아오게 됐으며, 대구성읍 성벽 철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성벽 자리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했다. 그 결과, 오늘날 대구에서 읍성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며, 대구의 중심지에서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은 크게 활성화되었다.
성읍 성곽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새 도로가 바로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문시장은 조선시대에는 현재 위치보다 더 동쪽에 있었다. 읍성 서문 바깥에 있기 때문에 서문시장이라고 부르지만, 과거에는 대구읍내장이었다. 이 시장은 대구읍성 북문 바깥에서 크게 형성되었으며, 과거에는 강경시장, 평양시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렸다.
아무튼 현재 동성로는 주중에도 긴 도로에 차 없는 쇼핑과 패션 및 복합문화 거리로 변했으며, 내가 갔던 대낮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패션 감각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동성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고 활발해 보이고 주로 젊은이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아마 주말 밤이면 서울의 강남이나 홍대 앞, 또는 부산의 광복동패션거리처럼 젊은이들이 바글바글 모여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다.
1876년 조선이 일본에게 개항한 이후 일본은 조선과 급속히 경제 교류를 늘리면서 재정적 침탈을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차관 공여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대한제국 은행들은 일본 은행에 종속되었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차관 공여가 네 차례에 이르면서 대한제국은 채무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될 무렵 조선의 대일 채무는 1300만 원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07년 민간인들로부터 대일 채무를 갚기 위한 국민적 모금운동이 시작됐는데 그것이 국채보상운동이다. 일본에 대한 채무를 갚으면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서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출판사인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가장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대한매일신보사의 양기탁과 베델은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운동은 국채보상을 위한 자금 마련책으로 특이하게도 흡연을 끊는 ‘단연’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에 고종도 단연 선언으로 참여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으며, 부녀자와 노동자 등도 금연하고 일당을 헌금하는 등 범국민적 참여 운동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가운데 벌어진 국민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높지만 그 한계는 뚜렷했다. 1907년과 1908년에는 일제와 친일파에 의해 양기탁과 베델 등에게 공금횡령 의혹이 뒤집어씌워졌고, 국채보상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집요한 공세가 이어졌다. 경술국치 이후 모금된 자금의 일부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모금된 자금의 대부분은 결국 일본에 귀속됐다.
오늘날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대구시는 중앙도서관을 개축하면서, 2023년 그 공원에 국채보상운동 도서관 겸 기록전시관도 건설했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는 자부심이 큰 듯하다.
대구는 현재 대한민국 보수의 심장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구는 일제강점기에도 항일 투쟁 의식이 뛰어난 곳이었지만, 한국 현대사로만 국한해서 말한다 해도 진보적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깊다. 1960년 대구의 고등학생들은 4.19 혁명이 시작되기에 앞서 이승만정권 부패와 무능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소위 ‘2.28 학생민주의거’로 일컬어지는 대구 학생운동은 1960년 3.15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를 위한 시위였으며, 제1공화국 수립 이후 민주개혁을 요구한 최초의 항거였다. 4.19 혁명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1974년 비상계엄 시기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혁당 사건으로 인한 사형수 여덟 명 가운데 여정남, 도예종 등 다섯 명이 대구 출신이었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서 동성로를 거쳐 땀을 흘리면서 걸어온 나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으로 들어섰다. 새로 지은 지 수개월밖에 안 됐다는 ‘국채보상운동 도서관’이 먼저 보였다. 이 도서관은 원래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을 리모델링한 후 지난 8월에 새로 개장한 것이다. 오늘 여행 시간이 모자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원래 이 도서관 안까지 들어갈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도서관 건물 전면에 ‘나라사랑 태극기 전’이라고 적힌 거대한 홍보물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 전시회에 가면 초기 태극기도 보고 태극기의 역사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가서 살펴보니, 도서관에는 의외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자료가 많았다.
도서관에서 나온 후에 뒤로 가서 보니, 거기에 크기가 작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또 있었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도서관에 더 많이 있어서 기념관은 유사 기록물을 전시한 결과가 됐다. 그로 인해 역사적 기록물은 한 공원 안의 두 곳에서 중복되어 보이기도 하는데, 나처럼 처음 와보는 여행객에게 확실한 것은 국채보상운동도서관 뒤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의 위상이 작아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지어놓은 기념관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겠지만 국채보상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큰 도서관과 작은 기념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금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가 자랑할 만한 역사이기는 하다.
1997년 'IMF 위기'가 터졌을 때 한국에서는 나라 빚 갚기를 위해 금 모으기 등 국민적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그것은 마치 1907년에 벌어졌던 국채보상운동을 본뜬 것처럼 보인다. 국가 채무를 개인들의 모금활동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국민적 감동의 물결이었다. 국가채무 위기 자체로만 보자면 한국인들의 빚 갚기 운동은 90년 전에는 실패했지만 20세기가 끝날 때는 성공한 듯하다. 그런데 그것을 국민적 모금운동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저개발국가들은 경제 발전을 위해 막대한 자본 투자가 불가피하다. 선진국들은 저개발국들의 경제 빈곤 극복을 위해 종종 무상 또는 저금리 차관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투자수익을 위한 자본을 제공하거나 아예 저개발국의 천연자원을 헐값으로 매입하기도 한다. 저개발국은 많은 경우 타락하고 무능하고 비민주적인 정부와 관료, 선진국 정부와 투자회사들의 사악한 개입과 압력 등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곤 한다. 저개발국이 그러한 시련을 넘어서서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에서 탈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국가의 채무를 국민적 모금운동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모금운동을 실행하는 지도부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와 악랄한 제국들의 압력을 모두 극복하고 국가 채무를 없애면서 새로운 나라를 설계하거나 계획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 정도의 큰 그림까지는 그리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민주적 독립 의지가 있다면 아마 타락한 정부와 제국주의 세력이 이미 물리적으로 공격해서 그런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의롭고 선한 의도로 시작된 운동이 국민적 감동으로 물결치고 막대한 돈이 모이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사익을 추구하는 사악한 무리가 파리떼처럼 꼬이고 멀쩡했던 선인들과 의인들마저 각종 의혹과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막대한 모금 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처리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국민적 모금 운동은 종종 국민적 기만에 가까운 결과를 빚고 만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금가락지와 노동 일당을 선뜻 내놓은 착하고 애국적인 서민들은 소박하게나마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대의에 참여했다는 심리적 보상을 받지만, 결과적으로 기만당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국민적 모금 운동은 시작은 거창하나 그 끝은 희미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국민적 모금 운동이 그렇다. 국채보상운동도 비슷하다.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그 거룩한 운동의 시작에 관해서 배웠지 끝에 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이 성공한 운동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때 구세군이 하는 것과 같은 각종 자선단체들의 모금활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것은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와 전혀 다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