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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Oct 15. 2018

비움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묻혀 캘리한조각

시월 초의 멋진 가을 연휴가 끝났습니다.

황금 연휴에 어울리게 날씨도 하늘도 바람도 햇빛도 참 좋았지요.

뜨거운 여름날의 발랄함을 넘기고, 추석 명절에 이어서 짧지만 멋진 가을을 만끽 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었지요.


그러더니 이제 제법 아침 기온이 서늘해 집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던 앞마당의 풀들도 언제부턴가 성장을 멈추고 지난번에 잘라 놓은 상태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올해는 이젠 더 자라지는 않을 듯 싶어 잔디 깎던 예초기도 잘 닦아 넣어봅니다


도토리는 부지런히 뒷뜰로 뛰어내려 후두둑 또르르르 굴러다닙니다

새끼고양이들 뛰어노는 것 같은 저 도토리 구르는 소리가 멈추면 이젠 겨울이 올 것 같네요.


커피 한잔을 들고 마당에 내려서 봅니다

바람도 좋고, 빛도 좋습니다

그리 뜨겁게 길게 비추이던 여름날의 태양도 이젠 발끝에서 머뭇거립니다.

오히려 내 발끝이 그 빛을 따라 꿈틀거리지요.


그렇게 계절은 어김없이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넘어가나 봅니다.

떨어지는 도토리를 보며, 물들고 지는 단풍잎들을 보며 그렇게 계절의 비움을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계절은 그렇게 자기 몸을 비워냅니다

불꽃놀이의 마지막 순간이 가장 화려한 빛무리를 만들 듯이,

짙던 초록빛들도 절정의 단풍으로 그 존재감을 뽐내고는 나뭇잎들을 비워냅니다

마당 가득 기세 등등하던 잡초들도 어느새 몸을 낮추고, 줄기를 말아서 공간을 비워냅니다

부쩍 높아진 하늘도 그렇게 바람길을 만들어줍니다.


계절이 그렇듯 삶에도 그렇게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관심과 애정과 희망이던 것들은,

세월이 흘러 집착과 애증과 지루한 일상으로 마음 한구석에 먼지처럼 쌓이고

그리 쌓인 삶의 찌꺼기들은 어느새 마음의 방을 그득히 채워갑니다

거기에 더해지는 끈적한 미련은 그 삶의 찌꺼기를 털어내지 못하게 꽁꽁 싸매고 말이지요

그렇게 채워져 깊게 무거워진 마음의 방은 그저 어깨를 짓누릅니다.

비워내지 못한 마음엔 우울과 무기력과 실망의 그림자들이 드리웁니다.


때가 되면 나무들도 과일과 잎들을 털어내고 비워내듯,

우리 마음도 그렇게 때때로 비워내야 합니다.

이유모를 우울과, 이유 없는 짜증과, 이유 없는 무기력이 내 손을 맞잡고있는 그 때가,

바로 내 마음을 비워야 할 때입니다

비워내지 못한 마음엔 새로운 관심도 생길 수 없고,

비워지지 않은 마음엔 사랑이 들어올 자리도 없습니다

꽉 막힌 창문으론 내다 볼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차분히 때를 기다리는 계절.

떨어지는 도토리에서, 내려앉는 나뭇잎에서

그렇게 마음의 비움을 배웁니다

얼마나 비워내야 할지, 어찌 털어내야 할지,

꽁꽁 싸맨 미련의 매듭들을 하나씩 잘라내 보면서,

가난한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아픈 희망을 생각해봅니다.


부디 이 가을엔,

몸도 마음도, 제 두툼해 진 뱃살도 털어 내어지는 그런 가을이길 바랍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가벼운 어깨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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