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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사노라면의 붓 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by 사노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안도현 - 우리가 눈발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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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입춘이어서 오늘은 입춘의 시를 그려볼까 붓을 들었습니다.

오전인데도 어둑해서 내다본 하늘이 꾸물거립니다.

절기는 입춘이 지났는데 아직 겨울이라 날씨도 헷갈렸나요.

흐리던 하늘에선 비로 내리지도 않고 눈으로 내리지도 않고, 눈인 듯 비인 듯 이도 저도 아닌 진눈깨비로 내립니다.

진눈깨비를 보니 안도현 님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런 김에 입춘은 내일 쓰고 오늘은 이 시를 붓 위에 적셔봅니다.


살아온 내 시간들을 돌아보면 함박눈 같은 시간보다 쭈빗쭈빗 진눈깨비 같은 시절이 더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매캐한 연기 속에 민주를 외치던 시절,

정의와 신념을 내세우던 시절,

짐짓 합리적 중용이라는 팻말을 들고 이기와 보신의 줄 위에서 어정쩡, 함박눈인 양 쭈뼛거리며 진눈깨비로 시절을 흘려오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허공에 흔들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라는 시인의 외침이 귓가에 오래 남는지 더 모르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야 돌아보니 정답은 없는듯합니다

꼭 함박눈만이 진정한 눈도 아니고,

꼭 소나기만이 진정한 비는 아니었을지도요.

어쩌면 쭈뼛거린 진눈깨비의 흔적이 더 오래 땅을 적시고 있었던 건 아닐지요.


흐릿한 하늘을 보며, 내 인생과 비슷했을지도 모를 진눈깨비의 편에 한번 서서 세상 모든 진눈깨비 같은 삶들의 처진 어깨를 도닥여보는 오늘입니다.


세상 모든 이들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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