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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노라면 Oct 03. 2019

이런 시 - 이상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묻혀 캘리한조각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 가더라.

그날 밤에 한 소내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나가 보니까 변괴로 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이상 - 이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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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입니다.
하늘빛 사이로 내려와
세상을 열고 인간을 이롭게 하고자 시작된
하늘 열린 날 개천절입니다.

열어주신 그 하늘을
내려주신 그 하늘빛을
수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떻게 빛내고 있는지,
그 빛에 뽀얀 먼지를 씌우고 있지는 않는지,
그 하늘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지는 않는지,
개천절을 맞이해서 돌아봅니다.

개천절의 아침에 이상의 '이런 시'를 한 구절 적어봅니다.
역시 이상다운, 이상 스러운, 이상의 시입니다.
학자들은 굳이 이 시에서 모더니즘이니, 낭만주의의 소멸이니 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어려운 얘기는 학교 졸업하면서 잊어버리고,
지금은 그저 가슴 말랑한,
손길 가는, 마음 가는 구절만 생각하렵니다

이 가을에,
이 맑은 하늘아래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평생 그대를 못보고
내 차례에 오지 못해도
그대여 항상 어여쁘시라합니다.
어렵고 복잡한 이상의 시 속에서도
저 말랑말랑한 구절이 배어있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하늘 열린 오늘,
오늘은 이 시를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대들이여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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