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노라면 Jan 20. 2021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잉여의 시간  - 나희덕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나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 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
나희덕 님의 잉여의 시간입니다.
 
만남은 한 사람의 인생이 내게로 오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반대로 헤어짐이라 함은
내게 있던 한 사람의 인생이 나가는 것일지도요.

내 삶에서 차지하고 있던
그의 공간이 떠나가면서
내게는 큰 잉여의 시간이 생깁니다.
그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하던 크기만큼
내게 남은 잉여의 시간은 더 커질 겁니다.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을
담담하게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겐 어떤 잉여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요.
아직도 나의 시간엔
당신이 있을까요
당신의 시간에
나는 있을까요.

세상 모든 이들의 행복한 시간들을 응원합니다
-사노라면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길 - 안도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