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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덕대게 Apr 08. 2024

우울증이라는 서사

<디 아워스> - 스티븐 달드리

우울증은 삶이라는 내러티브에 있어 하나의 에피소드, 내지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는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울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염세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부조리한 이지선다일 것이다. 우울을 동반한 삶을 살아가거나, 아니면 죽거나.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라는 영화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느슨하게 엮여있는 세 개의 서사를 보여준다. 이들은 각기 다른 공간에 살고 있지만, 어딘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그 자체로 완결된 플롯을 부여한다. 죽음. 혹은 삶. 영화 속 버지니아는 죽음을 택했고, 로라와 클라리사는 삶을 택했다. 영화는 두 선택 모두를 존중한다. 실존주의적 주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선택.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실존 여부일 것이다. 


고통의 서사는 타인과의 교류로 치유된다. 영화 속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를 엮는 것은 다름 아닌 서사 예술,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책이다. 이 느슨한 연결고리가 세 명의 캐릭터성을 한 곳에 모아두어 내면의 고통을 공유하게끔 만든다. 우울을 앓고 있는 이들은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택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다. 우리는 그들의 선택에 그 어떤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자격이 없다. 버지니아는 극심한 남성우월주의 사회 속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강가로 가라앉는 선택을 내렸다. 그것이 그녀가 내린 유일한 실존주의적 결단이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서사는 공유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우울을 앓고 있는 이들은 한 두 명이 아니다. 마치 영화 속에서 세 명의 여성이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가상의 존재에 이끌려 서로의 아픔을 공유했듯이, 현실 속 우리는 우울이라는 서사를 타인과 공유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1년 전, 정신과 병원을 예약하려고 전화를 걸었을 때 예약 대기가 많아 스케줄 조정에 애를 먹었을 때가 있다. 나는 그때 느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밝아 보이는 사람들도 내면의 고통이 있다. 그들은 영원토록 반복되는 죽음의 이지선다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우울의 약점은 개방성이다. 우울은 고독할 때 곪아간다. 타인에게 이 고름을 토해내지 않으면, 지독하게 부패하여 내면을 갉아먹는다. 우울은 적절한 시간에 배설되어야 한다. 


가까운 이들에게 우울을 고백할 때 일종의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혹여나 내 민낯을 보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이게 나라는 사람의 원형인 것을. 이런 내 모습이 싫으면 그들은 떠날 것이다. 그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된다. 당연한 인간관계의 순리이다. 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빠른 우울 치료의 수순이었던 것 같다. 고독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나는 누구보다 혼자 있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고독은 형용할 수 없는 구멍을 항시 남겨둔다. 기억하자. 세상에는 수많은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이 있다. 아직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을 만난다면, 우리의 병은 하나의 서사로 봉합되어 삶의 다음 시퀀스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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