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5평 집에서 뭐 하고 지내?
훤의 집에는 시계가 없다. 간장이 없다. 냄비받침이 없다. 신발장이 없다. 행거가 없다. 커튼이 없다. 침대가 없다. 훤은 신림에 산다.
신림동에는 21,805명이 산다. 강원도 양양군에는 약 28,000명이 산다. 신림에는 정말이지 사람이 너무 많다. 서울에 연고 없는 사람이 처음 자리 잡는 곳이 왜 하필 신림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림은 비싸고, 시끄럽고, 대체로 과잉적인 곳이다. (지방으로 이어주는) 터미널 근처고, (서울의 압축점인) 강남과 가깝고, (사당에 비해) 싸서. 3박자를 두루 갖춘 곳이라는 건 나중에야 안 일이다.
훤과 나는 다이내믹 신림이라고 부른다. 준법정신이 제법 투철한 훤은 행인이 길가에 쓰러져 있으면 바로 경찰을 부른다. 대부분 분노와 슬픔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취객이지만, 훤은 ‘혹시나’하는 위급상황을 염두한다. 훤이 경찰에게 취객을 인도하는 것을 몇 번 봤다. 하지만 신림에서는 제외다. 신림은 너무 많은 취객이 아무렇게나 누워있다. 훤은 모른 척 지나간다.
신림역 4번 출구로 나와 순대타운과 즐비한 술집을 뒤로하고 도림천을 건너면 훤의 집이 있다. 도림천은 신림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유다. 반듯한 도림천을 훤은 매일 건너 다닌다.
훤의 집은 짙은 갈색 나무무늬 장판이 깔려 있고 벽지는 깨끗한 흰색이다. 훤의 집은 현관을 열면 왼쪽에 주방이 있고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다. 훤의 집은 오른쪽으로 긴 직사각형 5평 원룸이다. 훤의 집은 직사각형 긴 변에 해당하는 벽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다섯 사람이 꼭 들어간다. 그중 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에 무중력 의자가 놓여있다. 옥색은 하나도 없는데 어쩐지 옥색 느낌이 나는 집이다. 기운에서 느껴지나 보다. 옥색 맑은 기운이 보이세요.
훤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훤의 집에는 시계가 없다. 벽 두 쪽에 창문이 있어 채광이 끝내주는데 커튼이 없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엔간하게 흐리거나 겨울이 아니라면 눈을 뜰 수밖에 없다. 훤은 매일 7시 18분에 알람을 맞춘다. 7시 30분쯤 일어나 SBS 모닝와이드를 켠다. 모닝와이드는 훤의 시계다. 화면 구석에 시간을 알려준다. 주부들이 알려주는 생활 꿀팁을 보며 이불을 갠다.
훤의 집에는 침대가 없다. 이불을 반으로 접어 생긴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모닝와이드가 알려주는 시각을 보며 출근 준비를 한다. 최근 훤이 알게 된 생활 팁은 컵홀더 5개만 있으면 냄비받침이 필요 없다는 것. 회사에서 컵홀더를 주섬주섬 챙겨서 냄비받침대로 쓸 요령이다.
훤은 대부분의 신림 사람들이 그렇듯 강남으로 출근한다. 빨려간다.라고 대신 써도 잘 읽힐 것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옥철로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신도림에서, 신림에서, 사당에서 강남으로 헤쳐 모인 사람들은 다시 사당으로, 신림으로, 신도림로 흩어진다. 훤은 훤이 사는 집처럼 무심한 사람인데 가끔 웃긴 순간이 있다. 사무실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중고나라에서 찾아보세요”라고 한다거나, 퇴근길 2호선에서 짜부된 자기 얼굴을 광고제에 냈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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