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베르 카뮈- 이방인 > 을 읽고
“ 나의 인생에서 나는 얼마큼의 부분을 차지하는가.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무관한가. “
뫼르소는 얼핏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 혹은 사이코패스로 보일 정도로 삶과 감정, 그리고 타인 심지어 스스로에게 까지 무심한 인물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1인칭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라는 말은, 굉장히 섬찟하면서도 뫼르소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갈피를 잡아가는 첫 화두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다만 홀로서기가 불가능하기에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동물로서 상호작용을 원만히 해나가면서 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 아니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옳을 것이다. 밥 먹는 것부터 잠자리에 드는 것까지, 젓가락 집는 것부터, 볼일을 보는 것까지 우리의 몸에 밴 모든 행동들과 비롯된 무의식은 우리의 부모님의 필두로, 살면서 만나는 많은 타인들에 의해 교정되고 습득되며 ‘ 나 ‘라는 사회적 존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러한 갈대들에서 우리는 ‘ 선 ‘ 과 ‘ 악 ‘. ‘ 옳음 ‘ 과 ‘ 그름 ‘ ‘ 도덕적인 것과 ‘ ‘ 비도덕적인 것 ‘ 등, 수많은 이분법적인 난제에 놓이고 대부분은 어떠한 편협된 방식이나. 정답이 존재할 수 없지만 정답이라고 믿게 되면서 사고의 흐름과 판단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자라게 된 개개인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그 틈에 섞여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온 우리들이기에, 뫼르소가 뱉어내는 말들과 그의 행동이 우리들의 눈에, 그리고 소설들의 인물들에겐 ‘ 비정상 ‘ 으로 작용하는 첫 원인이자 시작이다.
소설 속에는 풍자스럽기도 하고, 익살스럽게 묘사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2부의 재판에서의 내용이다. 이들은 ‘ 살인 ‘이라는 죄목에 대해서 재판을 한다기보단, 마치 뫼르소라는 ‘ 인간’의 사회적인 구성원 속 됨됨이와 일반적인 규범 속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와 같은 통상적인 도덕의 규율에 그를 재단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이 뫼르소를 ‘ 사형 ‘ 까지 이르게 한 주요 재목은 ‘ 엄마의 죽음 이후 ‘ 뫼르소의 행보이다. 그는 엄마의 죽음에 무심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무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던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던가, 이후에 여성과 함께 정사를 나눈다던가 하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가 비인간적이고, 도덕적으로 감정이 결여되거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게 만들었다. 어쩌면 ‘ 살인 ‘ 을 했다는 사실보다, 당신이 엄마의 죽음에 무심하고 도덕적인 능력의 결여되어 있으며, 타인들과 원만한 상호작용을 하지 못 하는 것이 더욱 큰 죄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소설에서는 “ 도대체 피고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했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라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뫼르소는 정말로 엄마의 죽음에 조차 슬퍼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얽혀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을 조금 더 뒷받침하기 위해 레비나스의 철학을 인용하자면, 그는 ‘ 나 ‘ 는 나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 타자 ‘ 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규정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타인은 우리에게 ‘ 나 ‘ 의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존재인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역설적으로 나의 삶에서 ‘ 나 ‘라는 주체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도 그렇듯 우리는 처음부터 주체가 부재하고 타인에 의해 살아지는 존재로 시작했으니깐. 다만 여기서 짚고 가야 할 부분은 역시나 뫼르소는 앞서 이야기한 타인과의 이상적인 상호작용해 실패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 홍상수 ‘ 의 영화 속에서 타인과의 교류에 실패한 인물들은 상징적인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뫼르소 역시 죽음을 확정 지은 채 소설이 끝이 난다. 뫼로스는 타인에게 무관했다. 혹은 타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인물로 보인다. “ 법정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밀려들었다는 사실을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평소에 사람들은 나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그 모든 법석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재판장에서 조차, 배심원들과 그 외의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재판장을 ‘사회’, 그리고 배심원가 그 외 인물들을 ‘타인’이라고 상정했을 때 자신이 소통해야 하고, 공존해야 할 타인에 대해 무심한 뫼르소의 성격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렇게 그는 타인에게 무심했기에, 그들이 규정하는 ‘ 나 ‘ 스스로에게도 무관했던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었고, 세 번의 죽음 ( 각각 어머니의 죽음,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의 죽음 )을 통해, ‘ 나 ‘라는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또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것에 대한 죄책감 혹은 일련의 감정들을 소설에서 묘사하는 부분 역시 흥미롭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스스로 느낀 감정에 비롯하여 서술했다기보다 외부의 세게를 빌려 ~해야 하지 않나?라는 압박 혹은 기준 속에서 뫼르소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고 타자를 통해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 정상 “ 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잇따르는 뫼르소의 죄책감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감정들 역시 뫼르소의 내부에서 발현되어 직접적인 고백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제삼자적 시점에 의하여 은유의 형태로 발화된다. 이 역시, 그 원인이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파고 들어간 원인이기에 그것의 표현 역시 외연적인 방식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에서조차 사회는 그 아들에게 감정을 강요하고, 법정에서 재판하며 그들의 사회적 역할 안에서 한 개인을 둘러싸고 타인 ( 뫼르소 )를 심판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장 개인적이고도 솔직할 수도 있는 ‘ 감정 ‘ 역시 타인에 의해 강요당하고 만다. 뫼르소가 법정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사회의 부조리이며, 우리 사회의 축소판에 가깝다. 프란츠 카프카 역시 이런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해 고발하면서도 사회의 부품인 우리 존재의 무력함을 피력했다. 고작 사회의 일부인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을 거라고.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그 속에서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그저 끼워진 채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설정은 이방인 속 세상과도 무척이나 닮아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뫼르소는 무척이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며 타인에게 너무나도 무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간 계기가 되었지만 사회의 부품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방인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부품에 속해있으니깐. 하지만 그가 이방인에 속한다고 한들 사회는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는 죽음으로 몰아붙여졌는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뫼르소는 타자와 그리고 자신에게 조차 무척이나 무관한 인간이었으니깐.
이런 뫼르소가 변곡점을 맞게 되는 부분은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 그가 나가고 나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버리기라고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 이 구절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며 처음으로 뫼르소가 어머니에 대해 느낀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권태롭고, 세상에 대해서 무심했던 그가, 너무나도 권태롭던 뫼르소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삶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한다. 그는 정말로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삶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나. 우리는 타인에게 궁극적으로 무관할 수 없다. 그들 속에 섞여 살아가야 하고 사회의 부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하지만 사회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우리를 내버려 두면 나 자신을 잃고야 만다. 뫼르소가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소설의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그는 죽음에 몰리지 않았을 테고, 풀려나서 다시 권태로운 , 무심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방인이었고, 어긋난 부품이었기에 죽음으로 몰렸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뫼르소가 끝내 느끼게 된 그 기적을 소설에서 묘사하는 구절을 읽으면서 묘한 해방감과, 말로 이루지 못할 기쁨을 느꼈다. 어쩌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부조리한 세상과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버리는 것은 무책임이다. 다만 우리의 최선은, 타인이 나를 멋대로 재단하는 것을 거부한 채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뫼르소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은 그 기적을. 나의 인생에서 정말이지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없고,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무관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이 나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렇기에 너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라고. 권태로운 여름날 시원한 우수에 젖으며 나는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