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출구를 찾기보다는

'좋은 때'라는 미로를 마주하는 법

by 감자부침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내내 과외로 용돈을 벌었다. 대학생과외는 학습코칭보다, 최근에 입시를 치른 경험자로서 조언을 하는 역할이 크다. 나도 그랬다. 입시로 불안에 떠는 학생을 안심시키고, 어떻게 점수를 올렸는지 조언해 주는 일을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은 ‘귀여운 고민이다’였다. 그래서 ‘아휴~ 별거 아니야. 이렇게 이렇게 하면 돼~ 부담 가지지 마’라고 말하곤 했다. 왜 어른들이 학창 시절이 가장 걱정 없고 행복한 ‘좋은 때’라고 말하는지 십분 공감하면서.


내가 지나온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때의 일이 미화되거나 굉장히 가벼워진다. 추억의 속도는 빠르고 현실의 시간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30대의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20대의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그때의 나도, 지나온 길을 걷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귀엽게 보일까.


부모님을 비롯해, 교수님, 선생님, 주위 어른들 모두 20대의 창창한 청춘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눈앞에 앉아있는 내가 아니라, 아마도 그들이 놓쳤거나 혹은 꽉 붙잡고 있었던 젊음 그 자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수에 찬 눈을 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수능을 못 본 고등학교 3학년에게 ‘대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대학 좀 늦게 가도 아무 지장 없어.’라는 말은 무감하듯이, 정말 뭐든 해볼 수 있지만, 그만큼 두려움도 많은 0의 20대에게 ‘내가 20대면 뭐든지 해보겠어’라는 말은 버겁다. 어쩌면 ‘뭐든 해보겠어’라는 말의 뜻은, 정체성이 가장 단순할 때 할 수 있는 결정을 마음껏 하겠다는 뜻일지 모르겠다. 나이 든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자식, 책임질 아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 한 회사의 직원, 누군가의 사위 혹은 며느리가 아니라 그냥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이때가 얼마나 천금 같은지를 모르는 풋내기에게 할 수 있는 간절한 외침일지도.




제주도에 가서 미로탐방체험을 한 기억이 있다. 어린 나는 아빠의 손가락을 잡고 그냥 따라가면서 빠져나왔던 것 같다. 상업용 미로는 출구를 찾기가 비교적 쉽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으면 종을 치면 된다. 미로를 빠져나오거나, 아니면 중도포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미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 어찌할까. 포기한다고 종을 치면 나를 구해 줄 직원은 없는데 말이다.


갈림길 앞에서 나는 두 갈래의 길 각각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써봤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적고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사실 알던 길을 재도전하는 것에는 큰 고민과 새롭게 알아볼 것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행짐을 처음부터 리스트업 하듯이 공을 들여야 한다.

스케치를 하기 위해 chat gpt와 협업을 하기 시작했다. 2026년에 쌓을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함께 설계했다. 개중에는 “루트여행”이 있었는데, 예산과 테마부터, 어떻게 기록을 남길지까지 나만의 비서가 잘 짜주었다. 물론 내가 취사선택을 해야 했고, 과유불급이 되지 않기 위해 혼신을 쏟다 보니 그냥 알던 길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유약함에 빠지기도 했다. 도움이 될 자격증들도 알아보다가 블루라이트에 얼굴이 익는 것 같아서 창을 닫았다.

한편, 팀플을 할 때 고학번 선배들이 사용하던 '노션(workspace)'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꽤나 기능이 많은 탓에 하나하나 배우고, 머리를 쥐어뜯은 결과 구색을 갖췄다. 전공수업을 듣고, 학회활동을 하며 마음 한편에 피어났던 '칼럼니스트, 글 쓰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칭하고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이 플랫폼(브런치스토리)을 알게 되었고, 바로 작가신청을 했다. 그동안 블로그에 은밀하게 써두었던 글들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이렇게 브런치북까지 만들고 있다. 어휴. 강의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거친 돌멩이가 된 기분이다.

찬물을 끼얹자면, 나의 모든 선택이 다 돈이라는 사실이다. 백수생활이 가장 사치스러운 기간일 줄이야. 그래서 정부에서 지원하는 청년 지원금을 전부 알아보았고, 지원대상이 되는 것들을 추리면서 ‘복지국가 대한민국’에 감사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행정학을 전공하면서 청년복지정책을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홀로서기를 하다 보니 나라가 뒷동산이 되어주는 것이 이렇게 눈물 날 일인지 새삼 느낀다.




글로 풀어쓰니 굉장히 산뜻하고 알찬 시간으로만 포장이 되는데, 실은 미로에 여러 번 갇히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비겁하다고 느낀 적도 참으로 많았다. 보호막을 벗어던지고 광야로 나가는 기분이 들어서 힘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미로의 입구로 돌아갔다. 이 미로가 정말 내가 풀어야 하는 과제가 맞는지부터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들어갈 때는 조금은 다른 마음이기 위해,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즉시 벗어나기로 마음을 먹기 위해 입구로 돌아간 것이다.

포기하는 것에도, 기꺼이 감수하는 그 모든 아쉬움들에도 반드시 출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올해 초 제주에 갔을 때 찍은 바다인데, 오리가 수영하는 모습이 참 귀여워서 줌인할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