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일할 때

평일의 공원

by 감자부침


일주일에 2~3번 꼭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운동을 한다. 해를 보며 걷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오후 3시 정도에 집에서 출발해 1시간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공원 여기저기를 누비며 운동한다. 동네 소공원 정도의 크기가 아니어서, 한 바퀴를 도는 데만 해도 15분 정도가 걸린다. 처음에는 코스를 정해서 몇 바퀴를 걷다가 300m 정도를 조깅하는 루틴을 짰다. 그러던 어느 날 챙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장착하고 공원 운동기구를 개성 있게 이용하시는 어르신들을 발견했다. 이상적인 노후생활을 형상화하면 그런 모습이려나 싶을 정도로 활기차지만 평온한 모습이었다. '지방세도 내는데, 공공시설물을 적극 활용하는 게 맞지' 하는 생각으로 나도 그분들 옆에 살며시 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하는 운동 루틴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물론 나는 헤드셋을 끼고 팟캐스트나 음악을 들으며 운동하기 때문에 그분들과 말을 섞지는 않지만, 우리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서로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켜준다. 우선, 운동기구 종류당 2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되도록이면 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한다. 왜냐하면 운동기구끼리 너무 붙어있어서 진동이 느껴지고, 그럼 동작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고 있는 사람 역시 배려가 필요하다. 사용시간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식당에도 로테이션이 중요하듯, 운동기구도 마찬가지다. 배려로 돌아가는 우리 동네다.


지난해까지 우리 집의 관심사 중 하나는 실내용 자전거였다. 특히 내가 다리근력 운동과 유산소를 위해 자전거를 강력히 원했다. 하지만, 가격도 비싸고 크기도 커서 시간이 지날수록 애물단지가 될 것 같다는 어머니의 판단이 있었다. 접이식 기구도 있었지만 그건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단념하고 있었는데, 공원을 돌다 보니 바로 그 운동용 자전거가 떡하니 있는 걸 발견했다. 어떤 어르신께서 사용하고 계셔서 잠시 기다렸다가, 내리시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가 페달을 밟았다. 그다음부터는 원래 하던 대로다. 규칙을 지키면서 고요하게 내 운동에 집중하는 것.




기구를 활용한 운동이 끝나면 공원을 1~2바퀴 걸으며 들뜬 심장을 진정시킨다. 하루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걷는데, '남들 다 일하는 평일 낮에 나는 여유롭게 산책하네. 좋으면서 불편하다. 뒤쳐지는 느낌도 들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겨.'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엄마의 말씀이 떠올랐다. 엄마는 3년째 수어를 공부하고 계시는데, 온라인 수업을 할 때 재택근무하는 분들이 유동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해서 수업을 듣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시곤 한다. 엄마 역시 프리랜서시기 때문에 수어공부를 열심히 병행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리곤 "너도 능력 있으니 분명 그렇게 살 거야. 넌 지금 조용히 널 성장시키고 있잖아, 너의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사는 게 진짜 능력이야. 그렇게 될 거야." 하셨다.

그래. 나 역시도 현대사회의 스테레오타입에 휩싸인 불쌍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12시에 점심을 먹고 8시간 근무를 마친 뒤, 때때로 찾아오는 야근에 짜증을 내는 삶. 우리 아빠도, 할아버지도 살아온 그 삶을 나 역시 가스라이팅처럼 정상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왔던 것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직업이 있고, 소득이라는 것은 정해진 규격에 맞춰야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나 역시 정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걸 깨닫고 다시 주위를 둘어보았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30대 청년, 피크닉을 나온 부부, 30분 전까지 나와 같은 공간에서 운동하시던 어르신. 그 누가 이들에게 왜 치열하게 살지 않느냐고, 왜 GDP에 이바지하지 않느냐고 경솔히 질타할 수 있겠는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면 공원에서 햇볕을 쬐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었나. 책상 앞이 아니면, 사무실이 아니면 생산성 있는 삶이 아닌 것인가.


일명 노동선진국을 따라 대한민국도 근로시간을 줄이고 효율성과 개인의 여가생활 보장 모두를 잡자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다. 15년 전만 해도 '놀토'가 격주로 있던 시대였다. 많이 일하고 자주 일해야 성과를 내는 줄 알던 그때를 지나왔다. 단순히 따라쟁이라서 우리 정부가 저런 정책을 검토하는 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입에 풀칠할 걱정을 하는 나라가 아니게 되었기에,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것이다. 나라를 움직이는 엔진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국민을 갈아가며 나라를 일으켰다면, 이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결과다.



아무튼 이제는, 평일 오후 공원에서 보내는 나의 시간에 무용한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image.png 봄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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