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이야기
사람은 무엇인가를 이루면 붙잡고 싶어 집니다. 사랑해도 소유하고 싶고 도와주어도 인정받고 싶어 집니다. 그러나 노자는 정반대의 길을 말합니다.
“낳되 소유하지 말고 이루되 의지하지 말며 크되 다스리지 말라.”
그는 이것을 현덕(玄德)이라 불렀습니다. 깊고도 드러나지 않는 덕입니다. 현덕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도와주고도 앞에 서지 않고 이루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습니다. 마치 땅속의 뿌리가 아무 말 없이 나무를 밀어 올리듯 현덕은 세상을 조용히 떠받칩니다.
노자는 여섯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 몸과 마음을 하나로 품을 수 있겠는가?
- 강해지되 부드러울 수 있겠는가?
- 마음을 닦되 완벽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람을 사랑하되 억지로 이끌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낮아지되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알고 있으되 모르는 듯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들은 삶의 긴장을 드러냅니다. 힘과 부드러움, 앎과 침묵, 행함과 비움 사이에서 어디에 설 것인가를 묻습니다.
노자는 ‘갓난아이’를 예로 듭니다. 아이는 연약해 보이지만 가장 강한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아직 계산하지 않고 아직 소유하지 않으며 그저 존재함으로 살아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생명이 가진 가장 깊은 힘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듯 사는 것, 이것이 지혜의 절정이라고. 진리를 소유하지 않고 권력으로 만들지 않는 태도, 그것이 현덕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낳고 기르되 소유하지 않고 행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크되 다스리지 않는 것, 이것을 현덕이라 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 정신의 마지막 단계를 ‘어린아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싸움을 지나 다시 순수함으로 돌아오는 존재, 창조하며 붙잡지 않는 존재. 노자가 말한 ‘갓난아이의 부드러움’은 이 성숙의 끝과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 현덕을 한 사람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섬기셨지만 소유하지 않으셨고 사랑하셨지만 지배하지 않으셨으며 이루셨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길은 성공의 정점이 아니라 낮아짐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기다리시고 초대하시며 자유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바뀌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이루려는 신앙’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을 지켜보는 신앙’으로.
사역이든 관계이든 이루고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 사랑은 비로소 오래갑니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습니다. 빛은 머무르지 않고 생명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낳고 기르되 다스리지 않을 때 그 사랑은 비로소 영원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