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말한 것처럼 나는 가정의학과로 개원했지만 우리 병원은 소아환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아이 보호자들이 소아과로 알고 왔다가 가정의학과임을 알고
"여기 소아과가 아니네" 하며 그냥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로 아이들 환자가 많아지면서 성인이 진료 보러 왔다가 버글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오히려 "여기는 소아과인가 보네. 어른들 진료 보는 병원으로 가자" 하기도 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아이들을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참 예뻤고 무엇보다 어른과는 달리 몸 자체의 질병 치유력이 높아
병이 호전되는 과정을 확연하게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 진료는 보람이 배가되었다.
독감에 걸려 39도 넘는 고열로 얼굴이 빨개지고 축 늘어져서 왔다가도 치료제 먹고
며칠 후 다시 내원했을 때는 대기실에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진료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유명 캐릭터들을
아이들과 같이 섭렵하는 재미도 있었다.
캐치티니핑에 나오는 이름들. 하츄핑 조아핑 나나핑....
타요버스 앞에 붙은 번호들과 온갖 종류의 공룡이름... 그때는 다 꿰차고 있었다.
공룡을 좋아하던 6살 아이는 올 때마다 공룡 멸망설 6가지를 읊어서 나도 공룡이 지구상에서
왜 멸망했는지 외울 정도였다.
특히 아이들은 진료 후에 손등에 캐릭터 도장을 찍어주는 걸 좋아했다.
간혹 아토피 피부이거나 아이 손에 도장 찍는 것을 싫어하는 보호자인 경우에는
작은 메모지에라도 찍어 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진료실을 나가지 않으려 했다.
자기 전에 세수하고 나서 도장이 씻겨졌다는 이유로 울고 불고 해서 다음날 도장을
다시 받으러 오는 아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참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대부분인 병원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60대 중반 나이 또래의 환자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와서 하는 말들은 비슷했다.
"OO와 같은 헬스장 다니는데 그 양반이 여기 원장이 명의라고 이 병원 꼭 가보라고 해서 왔어요"
"얼굴만 보고도 병을 알아 맞춘다고 신통하대요"라고들 했다.
음....갑자기 내가 점쟁이가 된건가....
전말은 이랬다.
한달전쯤 우리 병원에 처음 오신 분이 있었다.
그 환자분은 혈압이 높아 근처 내과 병원을 10년 정도 다니신 분이셨다.
혈압의 변동폭이 커서 혈압약 용량을 조절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진료하며 얼굴을 보니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비해서 얼굴 골격이 비대하고 손마디가 두툼하고 컸다.
진료를 하며 환자에게 물었다.
"혹시 젊었을 때 보다 얼굴 모양이 좀 변하지 않았나요?"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한테서 얼굴이 변했다는 소리 들으신 적 없으세요?"
"내가 젊었을 때는 얼굴이 좀 괜찮은 편이었는데 늙으니 이상해졌다고들 하대요"
좀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진료의뢰서를 써주고 상급병원 신경과 진료를 보시도록 설명했다.
의심했던 병은 말단비대증(acromegaly)이었다. 말 그대로 몸의 말단 부위가 점차 커지는 병이다.
어릴 때 나오는 성장호르몬은 키와 전신적인 성장을 일어나게 하지만 성장이 멈춘 성인에게서는
성장호르몬이 나오면 키가 크는 게 아니라 몸의 말단인 얼굴 손 발이 커지게 된다.
고혈압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성장이 멈춘 성인에서 다시 성장호르몬이 나오는 이유는
뇌하수체라는 뇌의 부분에서 성장호르몬을 분비하는 종양이 생겨서이다.
악성종양은 아니지만 외모를 변하게 하고 크기가 커지면
두통 및 시야장애가 생길 수 있다.
그분은 상급병원에서 진료받고 종양제거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머리를 여는 수술이 아닌 코를 통해 뇌로 접근가능한 위치여서 코를 통해 수술을 받았다.
수술받고 나서 병원에 다시 들러서 수술받은 이야기 하면서
자기가 헬스장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했단다.
OO 원장은 얼굴만 보고도 머릿속에 혹 있는 걸 신통하게 알아맞추는 명의라고..
그런데 그 병은 사실 얼굴만 보고 맞추는 병이다.
그래서 이 병은 얼굴만 보고 맞추는 병이라서 명의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환자가 "아니 내가 앞의 내과를 10년 다녔는데 한 번도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내가 얼굴 보자마자 알려주셨으니 명의 맞단다.
원래 얼굴 바뀌는 건 오랜만에 봐야 아는 거지 10년간 계속 보아온 사람들은
익숙해져서 모를 수 있다고 말씀드렸다
해피하게도 수술 이후로 혈압도 안정적으로 조절되었다.
여전히 그 환자분과 같은 또래의 핼스장 멤버들이 장난처럼 말씀하신다.
명의가 지어준 약을 먹어야 빨리 나아서 또 왔다고
사실 어느 의사나 얼굴만 보면 진단할 수 있는 병을,
얼굴만 보고 진단해서 한동안 나는
졸지에 얼굴만 보고도 뇌의 종양이 있다는 걸 알아맞힌 명의가 되었었다.
이후로, 명의처럼 최고의 진료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항상 최선의 진료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계기가 되었다.
얼굴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면 신경과 진료를 보시도록 하자.
음....의술의 힘을 빌려 달라진 것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