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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ngwon LEE Feb 17. 2024

마지막 주문

생산 라인 철거

NOTICE!!

"세 달 뒤에 라인을 철거할 계획입니다. 마지막 생산 수량을 확정하여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생산 라인 철거

산업군에 따라 프로젝트 계약 기간은 많이 상이합니다. 자동차는 그중 계약 기간이 긴 산업군에 속합니다. 통상 3~6년 기준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프로젝트 수명이 연장되거나 신규 프로젝트에 현재와 동일한 파트가 적용되면 연장 계약을 체결합니다. 협력사에서는 체결된 계약 기간 동안 파트를 공급할 의무가 있습니다. AS (After Sales) 파트는 양산이 종료되더라도 보통 10년간은 더 공급할 것으로 계약을 맺고요. 그런데 프로젝트가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협력사에서 생산 라인을 철거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먼저 외적 요소로 인한 불가피한 철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산으로 인해 더 이상 생산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화재나 지진과 같이 자연재해로 인해 라인이 사라질 수도 있고요. 이러한 재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종종 일어난답니다. 일본에 Renesas라는 회사가 있는데요, 칩셋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곳입니다. 한 번은 지진으로 인해 공장 일부가 무너져 칩셋 생산을 적시에 하지 못한다는 통보를 해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여러 나라의 공장 생산 스케줄을 조정해 가며 최대한 라인이 멈추지 않도록 협의하고 조정하였습니다.


씁쓸한 라인 철거

이러한 경우가 불가피한 재해라면, 좀 씁쓸한 라인 철거도 있습니다. 바로 계약 수량 대비 실제 생산되는 수량이 너무 적어서 협력사에서 라인을 유지할 수 없음을 통보하는 경우입니다. 차량의 많은 파트가 여러 차종에 공용으로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파트가 여섯 개의 차종에 적용이 되는데 그중에 세 차종이 러시아에서 생산된다고 한다면, 지금과 같이 러시아와 우크라나이 간에 전쟁으로 인한 상황 속에선 그 세 차종은 생산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계약된 수량 대비 현저히 발주 수량이 떨어질 것입니다. 협력사에서는 라인을 운영하고 회사에 수익을 내야 하는데, 수익성이 없는 라인을 몇 년 동안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협력사에서는 보상을 요구하거나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생산 라인을 철거합니다.


신규 프로젝트가 폭망 하여 발주 수량이 급격히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장 씁쓸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요,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면 협력사에서는 Last time Buy Order 즉, 마지막 발주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단종 시점까지의 수량을 계산하여 알려주면 한 번에 파트를 생산하고 라인을 철거하겠다는 것입니다.


단종까지의 생산 수량 예측

완성차 회사의 입장에선 이 마지막 발주 수량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프로젝트 수명이 2년이 남았다고 한다면, 그 2년 동안 생산하고 판매할 수량을 '지금' 정해야 하는 것인데, 차량이 얼마나 팔릴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적게 주문하면 이 한 파트로 인해 차량 생산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발주를 넣어 차량이 단종된 후에 불용재고가 쌓이면 그만큼 비용 손실이 발생하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실제 제가 담당하는 파트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파트 단가가 30만 원이 넘었는데, 몇 개 수량을 고려하냐에 따라 발주 금액이 천차만별로 달라졌습니다. 5천 개를 더 주문하면 15억 원이 추가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적정한 수량을 정하는 데 있어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쳤습니다.


판매 계획을 수립하는 프로그램 및 마케팅 팀과 더불어 예상 판매 수량을 정하고, 발주를 넣는 담당자와는 재고 수량을 파악하여 단종까지 필요한 수량을 보다 정교하게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량이 예상보다 많이 팔려서 부품이 부족해질 경우가 생긴다면 다른 파트로 대체 가능할지도 파악하였습니다.


AS 수량을 계산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10년간의 수량을 예측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행동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예상 수량을 산출해야 하기에... 과거의 실적을 갖고서 최종 수량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협력사에 통보하고 마지막 생산을 시작하였습니다.


생산 후에 어떻게 그 파트를 보관할 것인가도 중요한 사항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양산 수량은 한 번에 가져와서 여기서 보관하기로 하고, AS 수량은 협력사에서 보관하면서 발주 수량에 맞추어 그때그때 납품을 하기로 협의를 마쳤습니다. 씁쓸한 이슈를 그래도 나름 깔끔히 정리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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