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하였다. 사람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뜻한 인간 관계는 행복한 삶의 길이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의 양면성이 늘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관계 역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칫 갈등의 씨앗으로 변질될 수 있다.
인간관계는 마치 꽃과 같다. 꽃을 가꾸는 마음이 좋은 인간관계의 열매를 맺게 하듯, 관계를 지속적으로 돌보고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꽃에 물을 주듯이,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명상이나 묵상 또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을 가꾸고 덕(德)을 쌓는 수양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이나 스트레스는 꽃나무들이 겪어 나가는 메마른 가뭄에 비할 수 있다. 심한 가뭄을 이기기 란 쉽지 않지만, 가뭄을 이긴 꽃나무들은 강해진다.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이기기는 쉽지 않지만,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잘 다루면 인간관계가 쉬워지며,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다. 그 중 자녀들 과의 관계는 더욱 어려운 과제이다. 자녀들 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관계에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마음의 수양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간 순간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마음의 다스림은 덕을 기르는 내면의 다스림 이기도 한다. 마음의 수양은 긍정적인 인간관계는 물론, 바람직한 자녀들 과의 관계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한편, 부정적인 인간관계는 상호 간에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서로의 감정을 해치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점점 커져 분노로 까지 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가지의 노력이 상담, 정신의학, 명상, 요가 등 많은 분야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일반화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로 본다면, 그 중에 중요한 방법이 순간의 다스림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화내는 순간, 감정을 폭발하는 순간, 본래 의도와는 달리 생각치도 않았던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마음 아픈 순간 등은 가족관계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심한 경우에는 가족관계나 인간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정도의 상태로 까지도 가게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쳐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근래에 들어, 마음의 치유방법으로 불교(佛敎) 등 동양의 종교나 요가의 수련 방식을 이용하는 다양한 명상법이 미국 등지에서 소개되고 있다. 서양에서 재 조명된 이러한 수련 방식이 다시 동양으로 소개될 때, 동서양 문화 공유에 따른 풍요로움이 있는 반면,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생기는 이해의 차이는 동양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닌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정신(精神)과 마음(心)이라는 두 다른 개체가 영어로 또는 영어에서 한글로 번역되는 경우 변역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정신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mind, spirit, soul 로, 마음은 mind, spirit, heart, soul 로 번역된다. 따라서 정신과 마음이 동일한 영어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영어의 mind나 heart가 동일하게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별 생각없이 정신과 마음을 혼용해서 사용하다 보면, 적지 않은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함께 정신과 마음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힘든 마음은 여러가지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면서 몸과 마음을 괴롭히게 된다. 지나친 생각이 병을 준다면, 지혜를 구하는 적절한 생각은 약을 준다. 마음을 닦으며 깨달음을 구하는 지혜의 약은 쓴 맛을 지니지만, 인간관계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한다. 음식이든 운동이든 일이든 인간관계이든 기도이든 명상이든, 그 맛을 들이고 그 맛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일의 달인이 될 수 있다. 달인의 길이 쉬운 길 만은 아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 정진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러한 노력의 길은 여러 사람과 함께 갈 때 쉬워진다.
또한 무난한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한 첫 시작은 지금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이 있을 때 병을 고치는 방법이 첫째 이겠지만, 고치기 어려운 병은 나빠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사는 것도 한 방법이듯이, 어려움이 많은 관계인 경우에는 개선하려다 더 나빠지는 경우의 방법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 바람직하며, 이러한 경우 시간이 가면서 점차 좋은 관계로 개선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이 속담이 너무도 적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할 때, 그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그럴 때면 머리가 빙빙 돌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에서는 불이 나는 것 같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말문은 막히고, 마음은 혼란스러워서 감정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는 천 길 깊은 물속까지도 모두 탐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사람 마음속은 여전히 미궁이다. 오히려 사람의 속마음을 샅샅이 알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쌓인 풀리지 않은 한과 미움의 찌꺼기들이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때로는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것이 서로에게 더 평온할 수도 있다.
한에 맺힌 미움의 찌꺼기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최고의 약은 바로 '용서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돈이 들지 않는 무료의 명약이지만, 그만큼 쓰기 때문에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더 쉬운, 입맛에 맞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만, 진정 몸과 마음에 좋은 약은 쓰다는 속담처럼, '용서하는 마음'을 찾고 받아들이는 노력이 진정한 치유로 이어질 수 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가족 간의 불화로 인해 서로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생활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문제는 가족뿐 아니라 직장이나 공동체 등 모임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 불화 없는 역사는 없었기에, 우리가 혼자 살지 않는 한 불화는 우리와 함께한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불화가 계속해서 불화로 남아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나 불화가 화해로 이어져 화합을 이루면, 그 가족이나 직장, 공동체는 쉽게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모임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우리가 실수를 범했을 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실수를 교훈 삼아 조심한다면, 우리의 삶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마치 예수님의 사도들이 빈곤과 갈등이 있는 곳을 찾아 그리스도 정신을 전하며 이를 극복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진정한 문제는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화해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이룰 수 없으며, 자신을 비우는 과정은 가시밭길과도 같다. 말이나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마음을 갈고 닦는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비워진 고요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의 불화와 고난을 슬기롭게 이길 수 있다.
물은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우리 생활에서 필수적인 수돗물이나 하수물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거나 배수에 문제가 생기면 물이 역류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관에는 체크 밸브를 설치한다. 체크 밸브는 물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설계된 장치로, 역류 현상을 막아준다.
우리의 삶에는 세월이 있고 세월의 흐름은 시간과 함께한다. 물과 같이 위쪽 아래쪽과 같은 방향성은 없지만, 시간은 분명 저 세상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으며,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편의상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다. 그런데 때때로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배수관으로 생생하게 역류되는 경우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류가 심해지는 경우, 우리는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마음의 병까지 유발하게 된다. 이외 같은 시간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현재를 보호하고, 현재 안에서 지낼 수 있는 마음의 체크 밸브가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다. 가정도 만남에서 시작되고, 이웃 및 다른 사람 들과의 인연도 만남에서 시작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만남에 우연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남에도 마음에 맞는 사람 또는 마음에 드는 사람과 같은 선호도는 있다. 어느 목적지에 갈 때,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같이 가게 되면 즐거운 여행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볼 때 만남의 시작은 언제나 '0'(零) 이다. 다른 사람과 좋은 시간 어려운 시간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의 관계가 깊어진다. 친구나 반려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나와의 처음 시작은 '0'(零) 이다. 두 다른 개체가 서로 돕고 이해하며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킬 때 삶의 행복이 이루어진다.
또한 숫자
'0'에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숫자 '0'은 영(零, zero) 또는 공(空)으로 표시한다. 이 '0'의 숫자는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10진법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곱셈이나 나눗셈에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다. 예를 들어 아무리 큰 숫자라 하더라도 그 숫자에 '0'을 곱하면 공(空)이 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많은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가진 돈에 '0'을 곱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은 '0'은 나눗셈에서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작은 숫자라 하더라도 그 숫자를 '0'으로 나누면 '무한대'가 된다. 한편 덧셈이나 뺄셈에서 '0'은 무(無)의 힘을 가진다. 아무리 크거나 작은 숫자에 '0'을 더하거나 빼도 본래의 숫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空)은 근심도 잡념도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빈마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空)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념에 '0'을 곱하여 이루어지는 빈 마음의 상태이며,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를 마치 '0'으로 나누어 이루어지는 무한한 사랑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비어진 마음 속에서 느끼는 무한함이 더함도 덜함도 없는 본래의 마음이다.
같은 이치로 볼 때, 숫자 '0'은 그 숫자 모양의 테두리를 계속 작게 줄여간다면 아주 작은 한 점이 되며, 그 작은 한점을 더 줄여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와 반대로 그 테두리를 계속 크게 늘려간다면 끝없이 큰 우주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큰 공간이 되며, 그 큰 공간을 더 늘려 가면 '무한대'가 된다. 이와 같이 '0'은 한없이 작은 한 점 또는 '없음'과 끝없이 큰 우주 또는 '무한대'의 속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를 점수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이 세상에 백 퍼센트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 인간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마치 자신이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A와 B는 서로를 각각 백 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A가 B를 생각해보니 인상도 좋고, 말도 잘하며, 예의도 바르고, 신뢰할 만하며, 착한 것 같아 백 점을 주고, B도 A가 마음에 들어서 백 점을 줄 수 있다.
A와 B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 관계이다. 따라서 A와 B가 서로에게 주는 점수는 각각 반쪽에 해당한다. A 쪽의 반쪽 점수와 B 쪽의 반쪽 점수가 합쳐질 때 A와 B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점수가 된다. 그러나 A와 B 관계의 완전한 점수를 A나 B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인이 상대방에게 주는 점수도 완전하지 않은데, 상대방이 본인에게 주는 점수는 더욱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A와 B가 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최고 점수는 각각 50점씩이다. 50점은 상대방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지만 완전하다고 믿고 줄 수 있는 최고 점수이다. 사실 본인이 본인과 본인 간의 관계에 점수를 준다 하더라도 50점을 주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세상 만사가 백 점이 만점이라지만, 인간관계는 양쪽을 합쳐서 백 점이다. 즉, 본인과 상대방 각각에게는 최고 점수가 50점이다. 즉, 내가 상대방을 믿고 줄 수 있는 최고 점수는 50점이며, 나머지 50점은 상대방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 점수이다. 이것이 정확한 인간관계의 현실이다. 물론 부모 자식의 관계는 다를 수 있다. 한 지붕 아래서 사랑을 받고 자라는 자식이 부모와의 관계를 점수화해 본다면, 본인이 부모에게 주는 점수 50점에 부모가 본인에게 주는 점수 50점을 더하여 백 점이 될 수 있다.
부딪쳤던 지나간 순간의 일이 너무 억울하거나 가슴 아팠다면, 그 기억은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기억은 '영원한 과거'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 현대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암을 예로 들면, 암이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상처의 기억이 더이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과거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마음의 치유를 통해 영원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소통하며 살아간다. 복잡한 생활 구조 속에서 소통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소통을 하다 보면 소통하기 힘든 사람도 만나게 된다. 취미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할 말도 별로 없고…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과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소통을 위한 소통은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러한 어려운 소통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도 있다.
세계 인구는 약 80억 명이라고 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얼굴 모습이나 성격이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각자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만의 유일한 모습과 성격, 생각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서로의 다름이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본 원형인 듯하다.
우리의 삶에는 쉬운 길도 있고, 어렵고 험한 길도 있다. 쉬운 길만 따르는 소통은 뿌리가 약한 나무처럼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기 쉽다. 반면,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간 소통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세찬 바람에도 견디며,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다.
생각이 같은 사람과의 소통은 즐겁고 부담이 없다. 반면,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하지만, 소통의 깊이를 더해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때 소통의 벽이 사라지고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삶의 터전에서 오는 스트레스 물론 인간관계 속에서 나오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을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여행도 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가며 마음을 달래고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스트레스를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스트레스는 외래어이다. 이에 상당하는 단어로 압박, 긴장 등을 들을 수 있겠지만, 충분한 번역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러하다면 스트레스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 전해지기 이전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스트레스가 없이 살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스트레스 인줄을 모르고 살아왔을까? 사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우리 마음에 쌓이는 문제를 대변해 주는 단어일 뿐, 그 단어가 없다고 해서 마음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문제는 수학의 문제와 달라서 하나의 해답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수학의 문제를 풀듯이 풀어 볼 수는 없을까? 복잡한 수학의 문제 풀이는 문제의 단순화가 관건이라고 한다. 복잡한 수학의 문제를 눈깔 사탕의 문제로 단순화하게 되면 복잡한 수학의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이치로 마음의 문제를 얽힌 실에 비추어 보자. 얽힌 실을 풀려면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실이라 하더라도 일단 실마리를 잡으면 얽혀 있는 실을 술술 풀 수 있다. 마음의 문제 역시 얽힌 실과 같아서 억지로 풀려고 하면 더 꼬이게 된다. 그러면 마음에 얽혀 있는 문제의 상처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마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얽힘을 풀려고 하지 말아야한다
. 마음에 남아 있는 문제의 상처를 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영원하고,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생각이 더 나게 되고, 급기야는 그 상처가 더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해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의 기억을 잊으려 하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으며,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이를 마음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로 볼 수 있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을 끊어버리도록, 생각이 날때마다 화두를 반복하며 지금의 순간을 이어가는 불가의 지혜가 새삼스러워진다.
어떤 이들이 성인일까? 교과서에서는 성인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는 거리가 먼 훌륭한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인에 대한 의미를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통해 설명한다. 성인의 한자는 聖人이다. 첫 번째 글자인 성(聖)의 한자는 귀(耳)와 입(口), 그리고 다스림(王)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성인은 귀(耳)와 입(口)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동양의 성인 공자님도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귀가 순해졌다고 전해진다. 공자님은 『논어』의 위정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 30세에 뜻이 서고, 40세에 흔들림이 없으며, 50세에 하늘의 뜻을 깨닫고, 60세에 귀가 순해지며, 70세에는 마음먹은 대로 행하여도 거리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