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이 순간을 인지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현재의 시간은 곧 지나가고, 과거는 기억 속에, 미래는 생각 속에 존재할 뿐이다. 강, 산, 바다 같은 자연도, 하늘의 별, 태양, 달, 우주도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다. 지나간 모습이나 다가올 모습은 모두 우리의 생각 속에 있을 뿐이다.
천지(天地) 창조에 대해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요한 복음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기록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道)에 따른 천지의 시작을 무(無)로, 만물의 기원을 유(有)로 이름한다. 주역은 천지의 변화 속에 태극(太極)이 있고, 태극은 음(陰)과 양(陽)을 낳는다고 기록한다.
비록 깊은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광활한 우주 속에 덩그러니 떠 있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땅, 즉 천지(天地), 그리고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유무(有無), 도(道)의 태극을 그리는 음과 양, 즉 음양(陰陽). 이러한 이분법적인 일원론(一元論) 사상은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원리를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우리의 삶을 실상과 허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이 순간과 순간을 연결하며 살아가는 삶이 실상이라 할 수 있고, 지나간 삶의 기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생각은 허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실상의 모습을 마음, 감정, 생각, 정신 등 내면에 비추어지는 허상을 통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심신을 수양하여 보다 바람직한 실상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울에 비치는 실체의 모습을 허상이라하고, 우리의 눈에 직접 들어오는 실체의 모습을 실상이라 한다. 혹자는 꿈 또는 현실과는 동 떨어진 공상이나 망상을 허상이라하고, 실제 일어나는 현실의 모습을 실상으로 본다.
국어 사전에 따르면, 실상은 실체의 외형을 떨쳐 버린 진실한 원형의 모습, 허상은 실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이는 실상과 허상의 모습이 실체의 모습과 다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즉, 실상은 실체의 내면적인 모습, 허상은 실체 외형의 투사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실상과 허상에 대한 이해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을 포함한다.
자연과학에서는 실상과 허상을 빛의 진행 경로에 따라 분류한다. 실상은 빛의 경로에 있는 상, 허상은 빛이 거울이나 렌즈에 반사, 굴절할 때 맺히는 상으로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사진은 허상의 좋은 예이다. 한편, 거울에 비친 허상의 모습은 실상과 대립적이다. 오른쪽 손을 움직이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왼쪽 손을 움직이듯이 보인다. 또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의 허상은 실상을 보완한다. 우리의 실제의 모습은 있지만 우리의 눈을 통해서 직접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허상은 실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나에게 당신 '이마에 뭐가 묻었다'라고 하면, 거울에 비친 허상의 도움을 받아야 깨끗이 닦아낼 수 있다.
실상과 허상의 조화
우리의 전통문화 관점에서 볼 때,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불교 용어로 우주(宇宙) 안에 있는 온갖 사물(事物)과 현상(現象)을 지칭한다.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삼라만상은 도(道)의 원리이며 자연의 법칙인 무위(無爲)의 모습이며, 이러한 무위(無爲)의 자연을 따르는 인간의 덕(德)을 제시한다. 선도(仙道)의 음양설(陰陽說)에서는 우주만물이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의 생성과 소멸이 음과 양의 원리와 조화에 따른다고 제시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우주 삼라만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갈래로 나누어 본다면, 물질세계는 실상의 계(系), 정신세계는 허상의 계(系)로 투사될 수 있다. 이 때 음과 양의 조화에 따르는 실상과 허상의 관계는 마치 양극을 지닌 자석의 성질과 같이, 삼라만상의 최대 단위에서 최소 단위까지 온갖 사물과 현상에 부족함이 없이 골 고루 작용한다. 갈라진 실상의 계(系)안에 또 다른 실상과 허상이 있고, 허상의 계(系)안에도 또 다른 실상과 허상이 있으며, 이러한 양극 구성은 삼라만상의 최소 단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한 예는 우리의 주변에 많이 있으며, '작품'을 일 예로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의 소중한 작품을 만들 때 손의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작품에 부여하는 정신이다. 정신계에 속하는 생각이나 마음과 감정이 물질계에 속하는 '작품'에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물질계에 속하는 작품을 주의 깊게 볼 때 우리는 작품 속에 숨어있는 예술가의 정성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질계에 속하는 작품 속에는 정신계의 흐름이 숨어있으며, 정신계의 경험, 느낌 등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따라서 진정한 작품의 이해는 물질계나 정신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전체적 차원이어야 한다.
삼라만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실상과 허상의 양극 구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실상이 허상을 누를 때도 있고, 허상이 실상을 누를 때도 있고, 실상인지 허상인지 모를 때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이끄는 실상과 허상의 조화는 삼라만상 우주 원리에 해당한다. 지나치게 실상이 강조되거나 허상이 강조될 때, 실상과 허상의 조화가 깨어지고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상과 허상의 조화는 전체적 차원이다. 삶의 여러 문제들을 전체적 또는 작품적 차원의 묵상을 통하여 문제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면을 발견할 때 우리의 삶은 우주 원리에 따르는 실상과 허상의 조화를 이룬다.
실상과 허상의 조화는 음양의 조화와 같아서 삼라만상 어디에나 작용하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도를 의미한다. 실상과 허상의 조화는 삼라만상 하나를 이루기에, 실상 없는 허상이 없고, 허상 없는 실상이 없다. 실상과 허상을 나누려 하지 않고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며, 실상과 허상의 조화를 지향함이 도의 길이다. 우주만물의 오묘함은 말로 다할 수 없지만, 이러한 오묘함을 직접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보물이 숨겨 있는 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건의 실체적 요소를 표면적인 실상으로 볼 때
,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마음의 거울을 통하여 받아들이게 되며, 이를 내면적인 허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표면적인 실상과 내면적인 허상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간다. 실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가장 기본적한 요소중의 하나는 인간관계이다.
삶의 실상과 허상
삶의 길은 관계속에서 얻은 경험과 체험의 묵상이다. 삶이 보여주는 실상에는 허상이 숨어있고, 삶 속에서 작용하는 허상에는 실상이 숨어있다. 실상과 허상의 조화는 물질계의 실상이 허(虛)할 때는 정신계의 허상을 보(補)하고, 허상이 허(虛)할 때는 실상을 보(補)하여 이룰 수 있다. 현대생활에서 오는 각종 스트레스로 몸이 허(虛)할 때는 마음을 달래고, 마음이 허(虛)할 때는 몸에 활기를 주는 운동이나 호흡 등을 생각 할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이 허(虛)할 때는 심신수련을 생각 할 수 있다.
삶의 실상과 허상의 조화에 대한 관심의 화두는 '관계'이며, 자녀관계, 인간관계, 초월자와의 관계 등을 생각 할 수 있다. 자녀관계나 인간관계의 경우, 누구나 좋은 관계를 원하지만 복잡한 현대 생활의 사회 구조, 놀랍게 발전하는 기술 과학 문명에 편승하여 급격히 변화하는 가치관 등은 이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요람인 정신 문화에 부정적인 요소를 자극하여 많은 경우에 관계를 악화시킴은 물론 정신과 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는 우리가 지녀왔던 전통, 그리고 도덕관은 물론 기존의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대사회 속에서의 생활은 우리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윤리적 행위의 선(善)과 악(惡), 또는 좋고 나쁨, 맞고 틀림, 있고 없는 유무(有無) 등의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의 사고(思考)로부터 벗어나 문화와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공존하는 전체론적이며 합리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기본 사고 방식의 변화 속에서 여러가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은 물론 가족내에서 세대 갈등 까지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은 간단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생활 환경 및 문화 여건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만족스러운 해답은 없다고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가는 줄기는 하나이며 그 열쇠는 마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전통 문화속에는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불가의 이심전심, 마음을 닦는 도가의 유유자적, 마음의 덕을 쌓는 유가의 덕목, 마음을 비우는 기독교의 사랑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