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이제 매너를 생각할 때(13)
<삶을 삐딱하게 살아라
누군가가 말하는 진리도 그대로 믿지 말고
다른 시각에서 다르게 생각하라
같은 생각, 같은 행동
이것이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 자신!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라
인생에 진리는 없다
다만 진리라고 믿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 (이하 생략)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일찍이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강연을 했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삐딱하게 보기(Look-ing Awry)》(김소연 옮김, 시각과 언어, 1995)라는 책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삐딱한 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왜?’ ‘어떻게?’ 등 문제의식과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과 사물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의 권고대로 정당하고 옳고 가치 있는 삐딱함이라면 누가 뭐래겠는가. 회사의 잘못된 방침을 지적하고 시정을 건의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변화를 추구하여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은 반발이 아니다. 상사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바르게 말하는 것은 삐딱한 게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질만한 것이 있어서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하는 것은 정당하다. 창의력을 발휘하려면 세상을 삐딱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당연히 건설적 비판, 긍정적 부정, 창의적 삐딱함은 소중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창조적 선의의 삐딱함과 저질의 버르장머리 없는 삐딱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고, 사물의 뒷면만을 강조하며, 비판이 아닌 비난과 원망과 질시로 세상을 대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건 매너 이전의 문제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하다보면 기질적, 습관적으로 삐딱한 사람을 발견하는 수가 적지 않다. 말도 안 되는 삐딱한 댓글을 발견할 때는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의 인상이 선명히 상상되곤 한다. 음침한 낯빛에 반항적인 눈매, 삐딱한 자세가 오버랩 된다. 그리고는 그의 인간관계, 더 나아가 앞날이 어떨 것인지 예감하게 된다. 아마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삐딱한 사람은 얼굴에서, 인상에서, 자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강의를 해보면 그 많은 청중 중에서 삐딱한 사람을 어김없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이는 질문을 해도 삐딱하다. 말의 내용도 그럴 뿐 아니라 말투나 자세, 표정까지 반항적이고 냉랭하다.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삐딱한 사람은 그의 인생 자체가 삐딱하게 꼬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증거냐 있냐고? 관상학에 그렇게 돼있냐고? 거창하게 그런 걸 들이댈 필요가 없다. 여러분의 경험이 과학이상으로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주위 사람 중에 삐딱한 인물을 떠올려 보자. 사사건건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가 어떻던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던가? 문제의식이 있고 개혁적이고 창의적이던가? 아닐 것이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변방의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결코 삐딱한 사람이 되지 마시라. 삐딱한 것도 일종의 습관이요 버릇이다. 때로는 기질적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성격 자체가 독특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사사건건 부정하고 저항하고 삐딱하다면 그 사람의 장래는 결코 밝지 않다. 직장 내에서 설자리를 찾기 어렵다. 늘 아웃사이더로 있다가 퇴직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삐딱하게 빗나갈 확률이 커진다.
정치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이념적 삐딱함’은 논외로 하고 직장인이라면 정말 삐딱하지 말기를 권한다. 특히 젊은 청춘들이 ‘혈기’나 ‘젊음’의 이름으로 삐딱하지 말기를 강조한다. 순리의 사고방식, 긍정의 시각을 갖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다. 부정적인 성향과 긍정적인 성향을 다 함께 갖고 있다. 문제는 정도(程度)와 균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딱함이 인상이나 태도, 말투에 배어날 정도라면 중증이다. 한번쯤 냉정한 자기성찰을 통하여 ‘균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권한다. 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