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 만난 Mr. Joe
미국 시민권을 받고 난 후, 세금납부외에도 국민으로서 여러 가지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배심원의 의무 (Jury Duty)이다. 처음 소환장을 받았을 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러 가지 사정상 연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출두해야 할 화요일 아침, 법정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북적대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판사가 호명을 하자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면제를 받거나 연기 신청이 수락이 되어 돌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자리로 와서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다시 기다려야 했다.
원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법정신을 좋아하던 나였어서 실제로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여러 가지 질문 사항을 작성하고 제출한 후 성별, 나이, 인종 등등을 고려해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가려냈고 그중에서 최종적으로 필요한 14명의 배심원들이 선발됐다. 불행하게도(?!)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소송의 내용은 이랬다.
50대 중반의 성인 남성이었던 Mr. Joe가 자신의 둘째 아들이 다녔었던 가톨릭 고등학교 교장을 상대로 낸 소송이었고, 이 고소인은 자폐 스펙트럼 증상이 있는 조울증( bipolar disorder) 환자였다. 오랫동안의 약물치료와 카운슬링을 병행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직장이 없었고 그의 아내가 카페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사는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그런 Joe에게 스포츠는 마치 인생의 전부와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또 대학생 때까지 계속해서 그는 운동을 해왔고, 그것은 Joe의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무엇이었다. 학교 교장을 만나 1시간 30분이나 넘게 운동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대화도 나눌 만큼 교장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들의 풋볼 경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참관했고, 모든 경기 때 가서 그의 아들과 학교팀을 응원했다고 한다. 또 게임 후에는 종종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며 운동에 관한 팁과 다른 여러 가지 도움이 될 만한 사항들을 들려주는 것을 즐겨했다. 그로 인해 아들과도 남다른 부자지간임을 자랑했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학교와 자신의 아들이 다니던 학교와의 중요한 시합에서 참패한 후 그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욕을 퍼부었고 심지어 분을 이기지 못해 상대편 학교의 버스까지 뒤따라가 위협적인 행동까지 보였다. 즉시 상대 학교 코치로부터 그 일에 관해 알게 된 아들의 학교로부터 한 학기 동안 학교의 모든 운동 시합에 참관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공식적인 경고장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파킹장에서 혹은 쓰레기통 위에 서서 멀리 서라도 아들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시즌의 큰 경기가 있었을 때는(미국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시즌)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시합에 가려고 했다가 경기장에서 학교의 staff으로부터 제재를 당했고 화가 난 Joe는 또다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욕을 하며 화를 내고야 말았다. 학교 측은 즉시 경찰을 불러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조치를 취했다. 그 사건 후로 또다시 학교로부터 앞으로 일 년간의 모든 학교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Mr. Joe는 그것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졸업식을 포함한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고소의 요지는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교장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너무 가혹한 결정을 내렸고 의도적으로 고소인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intentionally inflict emotional distress upon the plaintiff") 가한 것에 관한 소송이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욱 힘들어졌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 스스로에 대해 더욱 큰 자괴감과 무기력감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호소했다. 이 외에도 소송의 시작에는 다른 몇 가지 사항이 더 있었지만 진행이 되면서 양측의 논의 하에 취하되었다.
양측 변호사의 최종 진술을 들을 때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그들의 논리적이고 유창한 변론에 매료되기도 했다. 잠시였지만 나도 엑스트라로 영화에 출연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변론을 듣고 난 우리 배심원들은 어떤 기준으로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아주 긴 조항의 리스트를 다 들은 후에야 판사 앞에서 진지하게 선서를 했다. 법의 공정함을 위해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치밀하게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내용들이었다. 또한 배심원으로서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가를 숙지할 수 있는 필요한 순서였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판사는 선발된 배심원들 중에서 배심장(Foreperson)이라고 해서 토의를 인도하고 질문을 전달하는 대표로서의 한 사람을 지목했다. 곧바로 우리 14명의 배심원들은 배심원 회의실(Jury Deliberation)로 보내졌고, 담당관의 허락 없이는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게 심지어 회의실 안에 구비된 화장실만을 사용하며 꼼짝없이 갇혀 세 시간이 넘는 열띤 토의를 해야 했다.
법정에서 선서한 대로 소송의 진행될 동안에는 사건에 관해서 어느 누구와도 의논해서도 안되었고, 관련 자료를 조사해 봐도 안되며, 오직 법정 안에서 제시된 사실만을 근거로 우리의 의견을 좁혀가야 했다.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회의실에서 했던 토의는 대학 때 했었던 것보다 더 열띠고 살벌한(?!) 논쟁의 과정이었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투표의 결과가....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