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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essed To Bless Oct 30. 2022

배심원 이야기 2

소수의 비애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나는 무척 저조한 성적의 영문학도로 졸업했다. 대부분의 전공수업들은 의무적으로 토의 참여 시간을 포함했고 성적의 일부분을 반영했다. 토의시간마다 듣는 것은 그래도 낫다. 나에게는 말하기가 늘 어렵기만 했다. 토론의 내용들이 분분할 때는 그나마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기회를 보고 내가 말할 수 있는 타이밍도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발표해야 할 논지를 머릿속에서 영어로 정리해 문법을 확인하고 시뮬레이션을 거쳐 마무리한 후 그제야 말해보려고 할 때면 허무하게도 종종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입 한번 제대로 떼어보지 못했던 "과묵한 학생"으로 낙인이 찍혀 나쁜 토의 성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배심원들과의 토의가 시작되면서 수년 전... 그 기억해 내기 싫은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심지어 그 방도 교실과 흡사했으니 내가 느껴야 했던 공포(?!)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보스턴의 특성상 대부분은 고학력자들에다 또 전문분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전체적으로 지식인층이 많은 지역이다. 게다가 그날 배심원 구성원이 여성은 4명 나머지 10명은 남성이었고 동양인은 유일하게 나 혼자였다. '피부색이라도 비슷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심리적으로 좀 안정이 됐을 수도 있으련만...'이라며 그 씨알도 안 먹힐 바람을 속으로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토론의 시작에 앞서 인도해야 하는 배심장(foreperson) 이 먼저 돌아가며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하자고 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시작하는데 다들 얼마나 화려한 경력들과 타이틀을 언급하는지, 게다가 나는 끝에서 두 번째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풀타임 엄마이고 아이는 넷이지만 남편은 한 명 있습니다.." 

(그것도 유머랍시고... 그렇게 말하지 말걸.. 하는 때늦은 후회가...ㅠㅜ)


간단한 나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배심원들은 죄다 나를 쳐다보았고 그들의 눈은 흡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다야? 이거 실화냐?"


물론 열등감에 젖어있는 나에게만 들린 마음의 소리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조금 초라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었다.  


곧이어 토의가 시작되었다. 


배심장은 다시 한번 우리가 토의해야 할 내용을 정리해 읽어주었고. 배심원들 대부분이 진지한 자세로 판사가 요구한 사항들을 준수하며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려고 했다. 배심원의 의무가 나에게는 처음이라 다른 case의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지켜본 바로는 이번에 구성된 배심원들 대부분이 성실하게 임했다는 점은 칭찬해 주어야 할 듯싶다. 


여러 번이나 법정으로 달려가서 판사에게 공개적으로 제출한 질문들의 답을 듣는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고 10시부터 1시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토론에 토론에 토론만을 했으니 말이다. 나중엔 점심으로 배달된 샌드위치 먹을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먹성 하나는 뒤지지 않는 내가 말이다. 아... 정말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던 시간이었다.


배심원들은 세 시간의 토의에서  “고의로"(intentionally) 란 단어를 계속 물고 늘어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40여 년이 넘는 교육계의 경력을 가진 교장으로서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판단이었고 졸업식에 참석할 4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안전과 보호를 책임져야 할 그로서는 그러한 공식적인 결정을 단행했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이었다. 이미 한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Joe는 그것을 무시했고, 큰소리를 지르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그 같은 환자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의미 있고 신성한 졸업식장에 들어오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게 그들의 논지였다. 그러므로 그런 가능성을 대비해야 했던 교장의 그런 판단은 다수의 안전을 위해 옳았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 자신의 의견을 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배심원의 의견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듣고 있었고 내 논지의 내용도 나름 요약하는 중이긴 했지만 워낙 과묵했던 학생 때의 상처 때문에(?!) 쉽사리 입이 떼지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배심장이 갑자기 나를 지목했다. 그가 "조용한" 당신도 한마디 하는 걸 듣고 싶다고 말하자 13명의 배심원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나의 머리는 하얘졌다. 정신없이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떠듬떠듬 겨우 입을 열었다.


"시작할 때 저를 소개했던 것처럼 저는 네 아이가 있습니다. 큰아이와 막내는 12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고요. 저는 엄마니까 아이들에게 늘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고 애씁니다. 가령 단것을 많이 먹으면 이가 썩을 수 있다던가, 좋은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무엇을 하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하기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글쓰기에도 유익이 된다는 것 등을 말이죠." 


배심원들의 표정이 지루해하고 있다.


"우습게도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 큰 딸과 막내에게 똑 같이 냉장고에 사과와 아이스크림을 넣어두고 간식으로 사과를 먹어야 한다는 지침을 준다고 해봅시다. 제가 예상해 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믿음직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정직한, 무엇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우리 큰아이는 사과를 선택해서 먹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막 두 살이 된 막내가 제 말을 어기고 큰 아이처럼 참지 못하고 그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다고 가정했을 때 제가 엄마로서 똑같은 벌을 내려야 할까요? "


배심원들의 표정이 황당해하고 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교장 쪽에서 주장한 Mr. Joe의 우발적인 행동에 대한 가능성은 저 역시 염려가 되고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맞지만 저는 여러 면에서 그가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권리 또한 그것 못지않게 사전에 충분히 고려돼야 할 사항이라고 보입니다. 학교가 그로 인해 졸업식장에 참석하게 될 사람들의 안전을 우려해야 할 만큼 Mr. Joe가 위험한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가 저로서는 힘듭니다."


배심원들의 표정이 언짢해 지고 있다.


"반면에 40여 년을 교계에 몸담아왔던 교육자로서 건강하고 문제가 없는 모범생뿐 아니라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사정으로 자질도 부족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에 처해있는 학생을 선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문제점을 가진 학생들을 생각하고 면밀히 살펴야 하는 태도를 교육자로서 더욱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믿기 때문에 교장의 그런 선택에 앞서 선도적 차원에서의 Joe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Mr. Joe 보다는 훨씬 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교장선생님의 결정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


배심원들의 표정이... 잘 모르겠다...


물론 글로 쓴 것처럼 생각하기에 따라서 꽤 괜찮은(?!) 이 주장을  영화에서처럼 또박또박 멋진 발음으로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었던 나로 기억하고 싶지만.... 상상은 읽는 이들의 각자의 몫으로..ㅋㅋ 


다시 말해 나의 요지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교장인 그가 사전에 Mr. Joe와 충분히 의논하고 대화해서 평생 한 번밖에 없을 아들의 의미 있는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는데 먼저 노력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론의 내용에서 알 수 있었듯이 Mr. Joe는 감정의 통제가 어렵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장이나 대부분의 우리들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자신의 변호사가 진술하는 중에도 소 한 마리쯤 맨손으로 때려잡을 만큼 덩치가 큰 Mr.Joe 는 내내 불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자폐의 행동이 역력했다.  또 변호사와 아내를 마치 아이처럼 의지하는 모습이 유독 내 눈에 띄었었다.  반면에 시종일관 침착하고 단정하게 앉아있던 지적인 모습의 교장선생님은 이 모든 상황에 적잖이 짜증이 난 듯 보이는 침통한 모습으로 간간히 Mr.Joe 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Mr.Joe 는 그런 교장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었다. 과연 Mr. Joe는 그렇게 위험요소가 많은 사람이었을까? 


무엇보다 Mr. Joe에게는 범죄로 이어졌던 과거의 어떠한 기록도 없었을 뿐 아니라 깊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고 또 개선할 여지를 주었었더라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그와 그의 가족이 함께 졸업식만이라도 참석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더라면, 그들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빼앗겨 버린 아픔을 법을 통해 호소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바꿀 수 있는 더 힘 있는 쪽이 그렇지 못한 연약한 쪽을 먼저 살피고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게 교육이라고 믿기에 나는 그렇게 마음이 기울어졌다.


내가 진땀을 흘리며 버벅거리고 그렇게 말하자 대다수의 배심원들은 무슨 말인 줄은 알겠는데 뭐 그런 비유를 써서 뭘 또 그렇게까지 감정 몰이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논박으로 나에게 반대했다. 그중에서도 꽤 똑똑해 보이는 유대인 교수의 날카롭고 아픈 지적질에 몇 마디 대응을 해보긴 했지만 이미 나의 목소리는 그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투표의 결과는 12:2. 물론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다수가 되지 못했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나마 한 명이라도 생각이 같은 동지가 있었던 걸로 위로를 삼기로 했다.


원래는 목요일에 오기로 돼 있었던 증인이 불참하는 바람에 더 연기되지 않고 판결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비록 배심원단의 평결(verdict)을 제출한 후 판사의 판결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게 다행인 줄도 모르겠다) 내게는 짧은 3일 동안의 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또 깨닫게 되는 시간들이었다. 


지난 삼일 내내 한 번도 웃음기 있는 얼굴을 하지 않은 채 무척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배심원들을 대했었던 담당 판사는 배심원들이 있는 회의실을 직접 찾아와 국민으로서 책임 있게 의무를 이행해 준 지난 삼 일간의 시간과 수고를 진심으로 치하한다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유난히 피부색이 검은 흑인이었던 그 판사는 날마다 어려운 판결을 해야 하는 판사의 자리보다 성탄절 구세군 모금 바구니 앞에서 산타 복장을 하고 예쁜 종소리를 내시는 편이 왠지 더 어울려 보였다. 적어도 그가 웃을 때만큼은 말이다. 어쨌든 담당 판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두들 뒤도 안 돌아보고 회의실을 떠나갔다. 


나도 먹지 못한 샌드위치를 가져가는 걸 잊지 말라는 경찰관의 말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겨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흠씬 두둘겨맞은것처럼 아팠고 원래 두통이 없는 편인데 특히 지난 며칠 동안 무거운 머리 때문에 뭔가를 집중해서 하기가 힘들기도 했었다. 나름 잘 분별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공의로운 판단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게 나에게는 스트레스였을까? 


법정에 있었을 때 종종 남편을 자제시키고 어깨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해 주었던 지쳐 보이는 Mr. Joe 아내의 얼굴과 여전히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얼굴이 떠올려지면서 순간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의 투표의 결과가 Mr. Joe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렇게 이기지도 못할걸, 투표해 봤자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걸...'


나의 한 표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돼주지 못한 것 같아 자책이 되었다. 그저 법에 근거해 공의가 뒷받침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기를, 그의 다친 마음이 회복되고 위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아이들이 내일부터는 엄마가 법원에 가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좋아하는 라자냐를 준비했다. 금세 바닥이 드러났다. 벌써 자기 몫을 다 먹어치우고는 조금 더 먹고 싶어 하는 막내를 위해 큰아이가 흔쾌히 자신의 것을 덜어서 연희의 접시에 담아 준다.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그리고 속으로 혼자 말했다.


"꼭 그렇게 살아가렴. 너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네가 먹고 싶은 걸 나눌 줄 알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양보해 주며, 기꺼이 너를 내어주는 삶을 사는 거야. 비록 그 선택이 당시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선하고 바람직한 것을 반드시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야."


양보 잘하고 사랑이 많은 큰 딸 규희에게 나의 접시에 있던 아직 먹지 않은 라자냐를 나눠주며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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