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출퇴근길에는 항상 신비로움과 어수선함이 공존한다. 특히 5호선과 9호선이 교차하는 여의도역의 풍광은 좋은 사회학 논문감이다. 출퇴근 시간에 5번 출구에서 이뤄지는 무언의 사회계약을 보고 있노라면 몹시 경이롭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질서를 만들어 줄을 서고, 별 이상 없이 들어가고 빠져나간다. 아무런 말과 표정이 없지만, 삶이라는 과제를 수행한다는 점은 모두를 동지로 만드나 보다.
정말로 신기한 일은 그 인파를 헤치고 지하철을 탄 다음에 생긴다. 그 아수라장에 있는 수많은 인파 중 누구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는 경우가 없다. 지옥철 안에서도 어떻게든 팔을 빼내어 휴대폰 액정을 보는 집념은 장엄하면서 애처롭다. 사람들은 그렇게 조금이나마 필사적으로 자신의 삶을 챙기는 것이리라. 요즘 생필품으로 자리 잡은 이어폰도,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자유를 조금이나마 건져 내려는 시도가 아닐까. 이 자리를 빌어 노이즈 캔슬링 기술을 개발한 누군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아무튼 어느 날이었다. 이별의 아픔과 끝나버린 사랑의 허탈함으로, 명치끝을 제대로 얻어맞은 듯 그로기 상태에 빠져버린 날이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그렇게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세상 가장 밑바닥에 있는 생각들만 집어들고 머리를 때리다 마지못해 나선 출근길에서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험을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치면서 시작된 부끄러운 흑역사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여의도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는데, 문득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은, 나와 달리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했다. 곧장, 내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무슨 슈퍼 히어로라도 된 듯, 그런 몽상에 가까운 생각을 하자 순간 아득하게 서러워졌다. 그리고 손써 볼 도리도 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울고도 또 운 것이다. 맙소사,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망신인가.
사람이나 조직이나 다면체인 법이라, 내가 평소에는 찌질한 면이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날의 나는 거의 찌질함의 이데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매년 그 날짜가 오면 달력만 봐도 부끄럽다. 1주년 그날에는 조기라도 게양할까 하다가 말았다. 날짜를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아무튼 기분이 너무 좋아 흥분을 주체할 수 없을 때 한 번씩 떠올려주면 진정제로서 아주 좋은 효과가 있는 기억이니, 백해일익 정도는 된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격한 감정의 파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때, 나는 찬찬히 그 때의 생각을 곱씹어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행복하다는, 순간적으로 나를 무너뜨렸던 그 생각 말이다. 그때야 사랑 때문에 울었다지만 단순히 그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러한 격한 피해의식이 끼치는 폐해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키우면 키울수록 내면에 똬리를 틀고 사람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세상에 자기 삶이 불쌍하고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힘들 때는 내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메스꺼워 보인다. 경계의식의 고삐를 한 번 놓게 되면, 자기 객관화는 요원해진다. 세상에 대한 해석 기능이 심각한 오작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 결과,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서 자신을 순백의 피해자로 설정한 후, 이렇게 불쌍한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르든 이해받을 수 있고, 이해받아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 과정이 계속될수록 타인의 고통 따위는 의식에서 사라진다.
이때는 주위의 도움도 효력이 없다. 격려든 충고든 호통이든 그 어떤 소리를 들어도, 마음속에서 ‘네가 내 상황 되어 봐라’ 같은 생각만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상처의 총량이 정당한 대가로 획득한 탄소배출권이라도 되는 듯, 마음껏 주위에 매연을 뿜어내게 된다. 내가 받은 상처를 빌미로 타인의 삶에 마음껏 고통을 안기면서, 최소한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장 불행하므로, 이렇게 불쌍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구제의 수단으로 택하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믿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지하철역 오열 사건을 넘어, 내 삶의 전반에도 알게 모르게 그런 피해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 그리고 후회로 변해버린 나의 선택들 등. 그때마다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도피처는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매번 내가 불쌍했다. 가장 힘들 때마다 마음속 역할극에서, 스스로를 완전무결한 선의의 피해자로 설정했다. 나만큼 힘든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내 사연만은 항상 뭔가 특별해 보였다. 이런 애처로운 삶을 사는 나에게 세상은 늘 환대를 베풀어야 마땅한데, 왜 이렇게 매정하단 말인가. 사실 그 대가가 지하철역 대망신 사건 정도로 돌아온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런 생각이 커지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이 반복된다면 사람은 누구나 괴물이 되어 가기 때문이다.
남들의 삶은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고, 나의 삶은 생각보다 불행하지 않다. 단지, 자신의 짐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과 버거워 신음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객관화시켜야 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선언이 교만이라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은 그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교만이다.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보다, 지구가 나만 빼고 돈다는 생각이 훨씬 더 어처구니없고 해롭다.
각자의 고통은 그리 특별하지 않고, 내 사연이 내 책임을 대신 져 주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이 별다른 권리를 베풀어 줄 리도 없다. 그것을 빌미로 남을 파괴하는 것은 정말 꼴사나운 일이다.
오늘도 나는 지하철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피해의식을 경계하며 나를 객관화하려 노력한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삶의 드라마 속에서 순간순간 비극의 주인공이 될 때도 있지만, 나를 둘러싼 사건과 인물들 속에서 나를 분리해 내고, 사태를 최대한 제3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려 발버둥친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나만의 렌즈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상처 속에서 인간다움을 온전히 건져낼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사람은 못 되어도,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