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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교 Oct 08. 2021

만약에

만약에, 라는 말만큼 속절없이 슬픈 말이 있을까. 그리 길지 않았던 인생이지만 가장 괴로웠던 순간에는 늘 그렇게 읊조렸다. 만약에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만약에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만약에 내가 그런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조금 더 운이 좋았다면. 그 모든 넋두리는 ‘그랬다면 지금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라는 비참한 마음으로 귀결되었다.


모든 지나간 일이란 항상 우리를 괴롭힌다. 상처로 변해 버린 나쁜 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좋은 기억들도 공범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은 주변의 악당들이 아니라 과거의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다. 인생의 어느 국면을 지나고 있든지 현재의 불행은 모두 그의 탓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의 이 비극적 사태를 초래한 ‘어제의 나’를 만난다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리라 다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슬프게도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펼치는 역사적 대련은 실현 가능성이 전무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흘러가 버린 나도 다시 소환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에, 는 서글픈 것이다. 지나간 데 매여 있는 모든 생명들이 내는 신음을 들어보라.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가.


물론 지나간 일은 깨끗이 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손에 쥐는 것이 백 번 천 번 현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것만큼 지극히 당연한 말도 없고, 그것만큼 겸허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도 없다. 그런 종류의 쌀로 밥 짓는 이야기가 쉽사리 수용될 수 있다면, 지금 인류가 겪는 고통의 총량에서 반 이상은 증발될 것이고, 종종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는 다채로운 시간 여행 이야기도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긴 시간 동안, 나도 머릿속에 ‘만약에’라는 괴물을 키우며 살아왔다. 아무리 골방으로 쫓아내도 수시로 내면의 안채에 침입해 깡패 짓을 일삼는 존재였다. 그가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본격적으로 시달린 것은 20대 초반부터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의 나, 특히 수능을 불과 몇 달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후회의 폐쇄회로에서 끊임없이 각종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사실 유달리 특별한 시련을 겪은 것은 아니다. 수능을 앞둔 중요한 그때에, 갑자기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대상포진이 왔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인지 밥만 먹으면 체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을 못 자니 하루 종일 몽롱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몸에 생긴 문제가 내면의 초조함, 절박함과 만나서 폭발하는 나날들이었다. 날마다 내 몸과 마음을 힘겹게 뒤치다꺼리하기 바빴으니 책이 눈에 들어왔겠는가. 결국 나는, 그 해 수능에서 그동안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수능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이 정도 성적밖에 못 받은 것은, 내 탓이라기보다는 불시에 나를 습격한 불행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런 모든 변수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실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수능이 끝난 날이었다. 주변에는 애써 감췄지만, 지난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가는데, 화장실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수능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는 않은데 왜 그랬을까 싶다. 물론 인생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지만, 실패했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릴 필요는 없는 정도의 일인데 말이다. 누구나 끝도 없이 망하는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수능 하나 망한 사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사실 수능 성적을 위해 모든 것들을 저당 잡힌 채 살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의 세계는 그만큼 좁았다.


결국 그 성적표가 정해 준 학교로 진학한 후, 나는 끊임없이 과거의 나와 싸우기 시작했다. 나름 인생의 방향이 명확했었는데, 꿈꾸던 곳과는 너무나 다른 세계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후회가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자책으로 점철된 생각의 개미지옥은 발버둥 칠수록 더욱 나를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그 때의 사정이 씨줄과 날줄처럼 겹친 탓에 결국 대입에 다시 도전하지도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그것 역시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사실,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교 3학년을 마치기까지도 순간순간 대입에 다시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만큼 큰 후회였다. 내가 원하던 학교에만 진학했어도 지금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만약에, 라는 가정은 언제나 무의미하고 공허할 뿐 아니라, 현재의 인생을 좀먹는다. 악마가 사람을 망가뜨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 만약에, 라는 가정법 뒤에 수많은 화려한 시나리오를 붙이고,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서 우리 앞에 던져 놓으면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자, 라는 이성의 소리는 누구에게나 들려오지만,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의 나와 싸우러 나가고, 그 때마다 치명상을 입고 돌아온다.


하지만 간혹, 과거의 나와 싸우기보다는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누군가는 정말 사력을 다해 그것을 해낸다. 그리고 묵묵히 과거의 나도 엄연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성과들을 하나씩 쌓아올린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해서 삶을 망치기보다, 지금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묵묵히 바꿔나가는 것이다. 그 경지에 오르면 자신이 오해받았다는 사실조차 크게 어필하지 않게 된다. 어차피 세상은 나의 변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선택의 총합일 뿐이다.


나도 ‘만약에’의 수렁에서 기어 올라와 그 대열에 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만큼 앞으로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단단한 결심을 했다. 내가 과거에 매여 있느라 당장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놓치고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그 때 만난 좋은 어른들의 조언도 길잡이가 되었다. 대부분 도서관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이미 죽은 어른들의 조언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 후에도 때때로 몇 년 전의 나, 몇 달 전의 나, 며칠 전의 나, 심지어 몇 시간 전의 내가 떼거지로 찾아와 시비를 걸기 일쑤였지만, 나는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지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 싸움은 과거의 나와 하는 싸움과 다르게 충분히 할 만 했다. 실체가 있고, 눈에 보이는 상대였기에 이기든 지든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매달리는 습관이 삶을 망쳤다면, 그러한 소소한 성장의 경험치는 추진력이 되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점차 옛날의 나와 화해할 수 있었다. 그 때의 한 외로운 학생을 질타하는 대신, 그가 남긴 것들을 묵묵히 떠안았다. 후회 대신 현실의 조각을 하나라도 더 감내하며 책임져 나가는 태도를 그때 배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만약에’라는 말과 마음의 태도를 경계한다. 행복을 가정법의 틀 속에 넣어 불행의 씨앗으로 삼지 않으려 늘 조심한다. 그것이 나와 주변 사람들을 얼마다 비참한 수렁으로 던져 넣는지 알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들에 마음이 묶여 속절없이 머리를 때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멱살을 잡는 대신 그냥 그를 조용히 안아주라 말해주고 싶다. 무슨 일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충분히 바꿔내어 무언가를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라고 말이다. 특히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는 어린 학생들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상은 교과서 속 함수처럼 명쾌히 짜여 있지 않기에, 어떠한 X값을 투입할 때 무슨 Y값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즉, 후회하는 그 일이 바람대로 되었다고 해도 꼭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당장 실패한 듯 여겨져도 상관없다. 단지, ‘만약에’라는 덫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 말은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을 확률마저 지워 버리기 때문이다.


어제의 내가 형편없이 어그러져 있는 모습일지라도, 그것 역시 나였다면 어떤 모양이든 껴안고 공생하며 버티는 것. 이것이 내가 찾은 생존 방정식이다. 우리 모두 만약에, 라는 이름의 덫을 치우고 다시 한 번 살아가자.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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