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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교 Oct 08. 2021

상처를 상흔으로 바꾼다는 것

대학생 시절,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삶을 지배한 적이 있다. 나와 묘하게 엮이게 되어, 인생에 큰 폭탄을 투척하고 사라진 사람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떠오르는데, 그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차올랐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그 때 왜 나는 바보같이 당하기만 했는지, 지금 당장 그에게 복수할 수 없을지, 그런데 사적 복수를 금지하는 작금의 법과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마음이 풀릴 정도의 복수가 가능할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펼쳐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상처를 곱씹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으면, 간혹 이성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사람 때문에 괜히 한 번 더 고통 받지 말자고 다짐한다. 지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또 당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잠시 편해진다.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바람을 쐬고 온 뒤 다시 하고 있던 일에 열중한다. 그리고 얼마 뒤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그 사유의 과정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


일단 나에게 분노를 안긴 그 사람은, 정말 나중에 논문을 쓰고 싶을 정도의 꼴사나운 빌런이었다. 소시오패스라는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보다 그냥 그 사람을 하루 동안 관찰하고 있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아무리 엄격한 객관화의 과정을 거쳐도 용납될 수 없는 악행으로 온 존재를 무장하고 있었고, 배변활동의 산출물로 말을 빚었을 때나 가능한 악담들로 가는 곳마다 황량한 만주벌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는 나와 내 주변을 알뜰하게 발라내어 이용해 먹었고, 기만하고, 속이고, 배신했다. 그때는 그 사람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개인이든 사회든 지나온 길에는 잔해가 남는 법이다. 안 좋은 기억일수록 최대한 단순화시켜 다양한 미담들로 포장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장면 하나하나를 돌이켜 보면 그 고통의 잔해는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애써 외면할 뿐이다. 겉보기에는 유쾌해 보이는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가 슬픈 것도 그 때문이다.


여하튼,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그 사람이 파 놓은 구렁텅이에서 기어 올라와 모든 것을 회복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우회로를 찾아야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기를 다행이었다. 상황은 되돌아왔고, 그 사람을 다시 볼 일도 없어졌다.


하지만 내 내면의 문제까지 종료되지는 않았다. 그에게 당했던 일이 생각나면 일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가 걷고 있을 때라면 길바닥과 싸워야 했고, 씻고 있을 때라면 물과 싸워야 했으며, 자고 있을 때라면 침대와 싸워야 했다. 반경 100미터 안에만 들어와도 몸서리쳐지는 사람인데, 역설적이게도 물리적으로 떨어진 후에도 늘 곁에 두고 살게 된 셈이었다.


사실 인간의 다양한 감정 중 큰형님을 꼽으라면 단연 분노와 증오다. 어떠한 다른 감정도 그 앞에서는 무력하게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그렇게 미움이 나를 지배하게 됐을 때, 나는 처절한 인생의 밑바닥을 겪었다. 누구나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듯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힘은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 미움이라는 발전소를 돌리는 것이다. 스스로 설계한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죄수의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 인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기억을 곱씹으며 나를 파괴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와중에도, 정작 그 빌런은 밤마다 두 다리 뻗고 잘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악마가 한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리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별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다. 어렵게 이룬 그 사람의 성취들을 빼앗기보다는, 그냥 미움 하나만을 던지면 된다. 날카로운 이 세상에서, 마음의 연못에 작은 미움의 조약돌 하나라도 던져지면, 인간은 그 즉시 비극적으로 평등해진다. 그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이상 아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도 그렇게까지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체유심조’를 금과옥조로 삼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방기해서도 안 되지만, 또 마냥 마음의 문제를 외면할 수도 없다.


<구약성경>의 <시편>을 보면, 절대권력을 가진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대왕이자 그 책의 저자인 다윗조차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이 잘 드러난다. 그곳에는, 다윗이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들을 살벌하게 저주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물론 매번 자신의 분노를 힘겹게 꺾고, 신앙으로 상황을 극복해 내는 모습이 함께 그려지지만, 상대에 대한 저주 중에는 호러를 연상케 하는 구절도 존재할 정도다. 만약 그의 내면에서 벌어진 투쟁이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면, 다윗왕은 역사에 그 이름을 상당히 다른 이미지로 남겼을지도 모른다.


사실 사람들끼리 상처 주고 상처 받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처의 가해자가 되고, 또 수십 번씩 피해자가 된다. 본인이 일일이 인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드라마적 서사로서의 절대선과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자연법에 따라서 명쾌하게 선과 악이 나뉘는 경우도 그 중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한 순도 100퍼센트의 악이 자신을 덮쳐 올 때, 사람은 정신없이 헤매게 된다.


하지만 그 벼랑 끝에 설 때, 온 힘을 다해 끌어 모아야 할 것이 있다. 서울 아파트 매수를 위한 ‘영끌’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이다. 아무리 정신이 아득해져도, 이것만은 해낼 수 있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길 때, 사람은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 생각해 보자. 과거에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있다. 그 때는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웠다면 지금은 내 머릿속 폐쇄회로에서 도는 미움 때문에 괴롭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생각을 떨치지 않는 한 나는 과거의 그와 공범이 된다. 나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상처와 생채기는 아프다. 하지만 아픔은 아픔이고 삶은 삶이다. 왜 미움이라는 감정으로 지금의 삶을 망쳐야 하나. 오늘은 어제에 지배받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원수에게 당한 시간은 과거로 족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 미움의 수렁에서 정신을 차리고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되새기며, 나에게 남들을 괴롭힐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괴롭힐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붙잡고 과거와 투쟁했다. 그래서 지금은 일부러 돌이켜 봐도, 그렇게까지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그 사람의 인생 궤적과 선택들을, 지금 나의 행동과 비교하며 경계하게 된다. 그 빌런은,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훌륭한 반면교사 역할을 한 셈이다.


사람이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기에, 상처를 완전히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상처를 상흔으로 만들 수는 있다. 상흔은 상처와 다르게, 인생에 분명 순기능을 한다. 상처가 아픔일 뿐이라면 상흔은 동기가 된다. 그것은 오히려 자랑할 만한 것이다. 매끈한 마음의 피부를 지닌 사람보다, 상흔이 가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강하고 당당하게 풍성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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