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흔히 말하는 ‘모태 신앙’이다. 물론 내가 ‘응애’라는 울음소리 대신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성경과 코란과 불경을 두고 돌잡이를 하여 성경을 잡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물론 ‘모태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내가 속한 교단이자 유아세례 거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침례교의 관점에서 보면 절대 성립될 수 없는 용어지만, 지금 그런 류의 신학적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기독교라는 운명이자 숙명을 거부하거나 싫어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 입장에서야 엄청난 다행이었을 것이다. 가족 간의 종교분쟁이 얼마나 무서운가. 아무튼 어릴 때는 교회 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다녔고,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코로나 팬데믹 사태 전까지는 일요일에 교회 가는 일을 빼먹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성경도 꽤나 많이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세계와 인간의 시작, 이스라엘의 다이내믹한 역사 이야기가 담긴 <구약성경>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후에는 <신약성경>에 빠졌다. 특히 날카로운 사색과 치밀한 논증이 담긴 사도 바울의 서신 13권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따라서 한 때는 신학대학원에 가서 바울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아무튼 그런 환경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말이 있다. <구약성경> 중 솔로몬 왕이 쓴 <전도서>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다.
“인생은 정말 허무하고 허무하다. 세상 만사가 너무 허무하다! 사람이 해 아래서 일하는 모든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 세상 만사 말로 다 할 수 없이 피곤하니, 눈은 보고 또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듣고 또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이미 있던 것들이 다시 생기고, 사람들은 전에 했던 일들을 다시 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전도서 1장 중)
한 마디로, 인생 뭐 없다는 거다.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고대시대의 왕 치고는 정말 허망한 말이다. 혹자는 모든 것을 가져 보고 누려 본 사람의 말이니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말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정 종교의 사상으로 한정할 것도 아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외칠 정도로 강한 반(反) 기독교적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세웠다. 인생은 어차피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것이다. 솔로몬 대왕의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말과 정확히 상응한다.
실제로 인생은 정말 짧고 덧없다. 전개는 다를지언정 결론이 같기 때문이다. 모두를 기다리는 끝은 바로 ‘죽음’이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무서운 일이자 아득하게 공평한 일이다. 인간의 삶은 각종 갈등구조가 얽혀 어지럽게 나열되다가 결국 해소되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는 소설과 같다. 그 누가 주인공이라도, 독자들이 읽었으면 엄청나게 화를 낼만한 전개다.
이토록 각자의 삶은 다양한 색조로 채색되지만, 죽음이라는 끝은 단색으로 덮인다. 사실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고, 우리에게 펼쳐지는 하루의 삶은 정확히 하루만큼의 죽음에 불과하다. 다소 심한 비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형 집행 방법과 집행일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 나를 포함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사형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추상적 사유’에 머물 뿐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것을 ‘존재적 자각’으로 발전시키는 사람은 적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요즘은 훨씬 더 그렇다. 그야말로 죽음이 죽음을 맞은 시대인 것이다.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바로 그렇게 자신의 유한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에 문명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니, 누군가는 ‘할 만한 착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결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우리는 잘 사는 것을 생각하는 이상으로, 잘 죽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소설이든 인생이든,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앞의 스토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지금의 시점을 시작점으로 삼기보다는 죽음을 출발선으로 삼아 사고를 역주행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삶의 모든 장면은 죽음이라는 결론과 대비할 때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보다 죽음의 의미부터 다시 살려내야 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겪은 교통사고로, 죽음에 대해 비교적 일찍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그 때까지 나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온 죽음은 할아버지의 죽음뿐이었다. 그마저도 많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제대로 된 고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밀어 넣었던 그 사고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인생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 시작했고, 그 생각은 꽤 오랜 시간 의식의 지하로 파묻혔다가 표면으로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결론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며 시간이 갈수록 선명히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내가 삶의 유한성을 깊게 인식할수록, 나에게 지금의 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죽음을 예민하게 인식하며 살 때였고, 내가 가장 불행했던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살던 때였다. 삶이 너무나 짧은 여행이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며 살게 되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의식적으로 보람과 황홀감, 기쁨과 환희를 붙잡게 된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나 오지 않은 일에 대한 염려로 낭비하는 우를 범치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크게 좌절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과하게 자만하지도 않는다.
혹자는 죽음에 대한 집착이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적 사고로 흐르지는 않을까 염려할 수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조금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 이것 아니면 죽는다는 태도로 매 순간을 불안하게 아등바등 사는 삶이 훨씬 더 그럴 위험이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원래 인생의 대부분은 고통이며, 세상 도처에 불행이 있다.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마음의 소용돌이는, 그런 잿빛의 삶 자체에 매몰될 때 찾아올 확률이 훨씬 크다.
물론 그런 태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나 또한 날카로운 세상의 횡포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지만, 내가 끝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을 쫓아가느라 시간을 탕진하게 않게 만들어 주었다.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문제에 직면해도, 내 생각과 달리 그것이 인생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만일 번뇌에 빠져 사는 하루살이를 본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자연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금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는 나도, 바로 고뇌하는 하루살이 꼴이었다.
앞서 인용한, <전도서>의 서두에서 인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신랄하게 지적한 솔로몬 왕도, 결론까지 그렇게 내지는 않는다. 일단 허무한 인생의 본질을 통찰한 후, 그는 그 허망하고 짧은 인생을 어떻게 지혜롭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즉, ‘뭐 없는’ 세상 속에서 ‘뭐 있게’ 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 줌이라도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생생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기에, 책을 시작하며 독자들을 차가운 물로 세수시켜 경각심을 일깨운 것이라 생각한다.
함께 인용한 프리드리히 니체도, ‘영원회귀’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진단하며 완벽하게 똑같은 인생들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설명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모르파티(운명애)’를 언급한다. 즉,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반복되는 인생 속에서 허무함의 공포가 밀려올지라도, 그 공포를 이겨내고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삶의 모든 자락에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그런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고,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사랑하며 긍정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아모르파티의 경지에 이르려면 먼저 영원회귀부터 통과해야 한다.
굳이 성경의 하나인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과 반(反) 기독교적 철학자 니체를 함께 언급한 것은,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명제를 특정 종교의 사상으로 국한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나는 죽음과 삶을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지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인생이라는 항해를 지탱해줄 닻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죽음을 고민해야 한다. 황홀한 세상에 앞서 허무한 세상부터 만나야 한다. 그래야 황홀한 세상도 황홀하게 느낄 수 있다.
젊은 나이에는, 시간이 곧 고갈될 ‘희소한 자원’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살이라도 어릴수록, 죽음에 대한 고민은 그만큼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삼십 대 초반인 나는, 특별한 일을 겪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죽음을 자각하며, 늘 그것을 준비하며 살 생각이다. 내 삶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기에, 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대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후회 없이 몰두할 것이다. 앞으로 죽는 날까지 삶의 순간순간을, 최대한 그렇게 충만하게 살아내고 싶다.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마음만은 매일 새롭게 먹으며, 미움과 원망이 아닌 기쁨과 환희로 내면을 채우고 살다가 여생을 마치고 싶은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런 단단한 삶을 통해서 무언가를 증명해내고 싶다.
그래서 난 오늘도 죽음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