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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교 Oct 08. 2021

아이들의 버릇, 어른들의 반성

늘 보고 싶고,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존재가 있다. 나에게는 연년생 조카들이 그렇다. 하나뿐인 친누나의 딸들이다. 어느새 훌쩍 커서 초등학교 2학년, 1학년이 되었지만,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 자체로 우리 가족의 기쁨이자 희망이었다.


항상 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조카들이 태어난 후 내 삶도 꽤 많이 달라졌다. 쇼핑을 할 때면 원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이들의 옷이나 장난감 등에 눈길이 가고, 길거리를 지나는 아이들을 보면 지금 조카들은 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휴대폰 속 조카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흐뭇한 웃음을 짓게 되고, 때로는 만나고 싶어 눈가가 촉촉해진다.


가끔 조카들에게 용돈이나 선물을 줄 때면, 내 인생 가장 의미 있는 소비를 한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절대 못 쓰는 돈도 조카들에게는 아낌없이 쓰게 된다. 물론 현금보다는 현물이 좋다. 용돈을 주면, 아직 어린 아이들이 “엄마에게 맡겨”라는 누나의 신종 보이스피싱에 매번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뭘 받았다고 삼촌에게 뽀뽀도 해 주고, 고맙다고 온갖 애교를 떠는 모습이 귀여워 미칠 것 같다. 확실히,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랑도 있다. 조카들의 사랑.


그런 아이들이, 작년부터 유치원에도 학교에도 마음껏 가지 못했다. 놀이터에서 또래들과 마음껏 뛰어 놀지도 못했다. 어른들이 파괴한 세상이 만들어낸,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다.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아이들은 그 나이에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발생된 실질적인, 또는 정신적인 피해는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하지만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은 바로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왜 그들의 희생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오늘은 더운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놀면서도 마스크는 절대로 벗지 않는 조카들을 보며, 조금 서러웠다. 바이러스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까지 가려 놓은 그 현실 속에서, 전 세대의 잘못까지 자신의 몫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숙명이 보여서다. 어른들은 마스크를 몰래 벗어놓고 운동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은데,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저 어른들이 당부한 대로 묵묵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좋은 유산뿐 아니라 좋지 않은 유산도 받아들이고 그저 순응하고 짊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우리 어린이들’ 같은 말을 들을 때 약간 마음이 불편하다. 최소한 그 앞날을 무겁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나라의 앞날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그저 나라의 오늘이나 잘 짊어지면 된다. 어차피 모든 세대에게는 그 세대만의 십자가가 있다. 기존의 세대도, 새로운 세대도 각자의 역할을 해 내면 될 뿐이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다음 세대가 그것을 감당할 만한 힘을 길러 주는 일이다. 또한, 비록 실낱같을지라도 가끔은 다른 길을 꿈꿔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물려주는 일이다. 모든 세대 간 이러한 선순환이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어린이 세대’만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세대의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들 요즘 아이들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자. 세상이 바뀌었는데 아이들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아날로그의 수직적 소통이 기본이던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디지털의 수평적 소통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같을 수는 없다. 기관이 가진 정보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자란 아이들과, 애초에 모든 정보가 각 개개인들에게 분산될 수 있는 시대에서 자란 아이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언제나 기존 세대는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고대 벽화에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동시대 아이들의 행동을 질타하고 지적하는 그 전통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닌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요즘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의 눈에 버릇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버릇없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또 다시 ‘요즘 아이들’의 문제를 지적해 왔다. 유사 이래 끊임없이 되풀이된 반복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아이들의 버릇’이 없어서 망한 집단이 있었나. 있다면 누가 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공동체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대개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대부분의 사회는 ‘아이들의 버릇’이 아니라 ‘어른들의 반성’이 없기 때문에 쇠락한다. 


하지만 왠지 인류는 그 멍청한 남 탓의 반복을 계속할 것 같다. 도대체 왜 우리는 반성하지 못할까. 왜 아이들의 버릇을 지적하는 에너지의 반만이라도 자신을 반성하는 데 쓰지 못할까. 반성하는 어른들이 있는 곳에 버릇없는 아이들이 생겨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나도 어느 정도 공범이라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노래했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은 살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지금의 조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해 본다. 내가 하는 이 말과 행동이, 나중에 조카들이 커서 반복해도 좋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다.


오늘따라 내 품 안에 쏙 안긴 조카들이 귀엽다. 그리고 조금 슬프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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