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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교 Oct 08. 2021

이어령과 이민아

이민아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다. 어쩌면, 본인 이름보다는 ‘이어령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더 돋보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아이였다. 학창시절 그녀는 아버지 명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부담감은 바위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텅 비어 껍데기만 있는 달팽이’ 같았던 시절이었다.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그녀에게는 이드(id)와 에고(ego) 없이, 오직 슈퍼에고(superego)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도 유전자를 속일 수는 없었다. 하기 싫은 공부였지만, 아버지를 닮아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나타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늘 우등생 역할을 했고, 1978년에 풍문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3년 만에 조기 졸업한다.


그런데 그토록 장래가 촉망되던 그녀에게, 돌연 사랑이 찾아온다. 어릴 적, 바쁘다는 이유로 늘 자신을 밀쳐냈던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운명처럼 나타난 한 남자에게서 느꼈다. 사랑은 없던 용기도 샘솟게 만드는 법이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곧장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예상한 대로,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늘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 없었던 ‘착한 딸’이었던 그녀가, 일생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역한다. 눈물을 글썽이며 결혼하겠다고 떼를 썼다. 첫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후회하는 것보다,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첫사랑을 완성시켜 한을 남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너는 아직 어리고 삶이라는 걸 아직 모른다는 부모의 말에, 그녀는 사랑은 맡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찾아서 쓰는 은행의 예금통장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사랑의 현재형, 그게 나의 첫사랑이고 결혼이라며,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는 그녀를, 부모는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물두 살 나이에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실행한 일이었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남편은, 당시 무명의 청년 작가였던 김한길이었다. 맞다. 전 문화부 장관이자 제1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지금은 배우 최명길의 남편이 된 ‘백발의 정객’ 김한길이다. 사실 이민도 자발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김한길이 쓴 <병정일기>가 군 기밀을 누설하고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혐의를 받자 도피하듯 떠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에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이 여자가 상상하는 남자와 남자가 상상하는 여자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기에 통상적인 시시비비를 넘어선 치열함과 고단함이 없을 리 없다. 그녀와 그녀의 가정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말도 안 통하는 타지에서 공부와 육아와 경제활동을 모두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도 자존심에 이를 악물었을 테다. 그러면서 부부는 서로에게 지쳐 갔다.


결국 그녀는 결혼할 때보다도 더 힘들었을 결단을 한다. 아들 하나를 남기고 5년 만에 이혼을 한 것이다.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으니 회한이 밀려왔다. 억지로 맞춰 사는 것은 위선이라 생각해 한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허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부모에게 돌아온 그녀는, 아버지 이어령 교수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이상하게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던진 말은,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였을 뿐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바로 그때가 그녀가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회복하는 시작점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렸다. 이미 결혼생활로 마음이 단련될 대로 단련된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은 특유의 책임감도 되살려냈을 것이다. 생채기 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악착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재되어 있던 천재성이 어김없이 다시 빛을 발한다.


그녀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스팅스(Hastings)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돌연 전공을 바꿔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리고 학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변호사 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였을 정도로 놀라운 실력자였던 만큼, 처음에는 남부럽지 않은 법률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돌연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을 버리고 박봉의 지방 검사가 된다. 그동안 고통의 시간을 지나며 마음에 새겨진 확고한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사이 좋은 미국인 남편을 만나 재혼도 했다.


드디어 삶에 안정과 행복이 시작되나 싶었건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직면했다. 갑자기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마음고생이야 의지력으로 돌파해 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던 몸에는 차곡차곡 과로가 누적된 결과였으리라. 결국 그녀는 암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 몸으로,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둘째를 낳았다. 그리고 거의 곧바로 셋째를 임신했다. 이어령 교수는 이때, 아이를 낳는 것을 강하게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민아는, 한 생명이 나에게로 온 상황에서, 이 아이를 끌어안는 것 외에 더 중요하게 가치 있는 일이 있겠냐며 단호히 거절하고, 기필코 그 아이를 낳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넷째까지 낳았다.


정리하자면 10년 조금 넘게 이어졌던 지방 검사 시절, 그녀는 거의 초인이었다. 아이 셋을 낳은 것도 모자라, 암이 두 차례나 재발해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으니 말이다. 생명을 걸고 암과 싸우던 그 시기를, 또 다른 생명들을 탄생시키며 보낸 것이다.


그런데 시련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이 자폐증과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았다. 아들은 열두 살이 되도록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을 이해하거나 따를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났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녀의 일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직장과 큰 저택을 버리고 하와이로 이주하여 아이의 치료와 교육에 매달린다(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둘째의 증세는 호전되어 이제는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이민아는 고통을 이겨내며 하루씩, 또 하루씩 삶을 살아냈다. 하지만 건강이 이미 안 좋아질 대로 안 좋아진 그녀였다. 이번에는 점점 세상이 뿌옇게 보이더니, ‘망막박리’ 진단을 받았다. 거의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미 시련에 이골이 난 상태였지만,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민아와 이어령 교수 부부 모두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7개월 뒤, 그녀의 찢어졌던 망막은 기적적으로 다시 붙는다. 의학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하는 법이다. 연속적으로 찾아온 고난 중에 주어진 선물 같은 기적이었다. 이민아는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까지의 모든 고난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아들 유진이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연사한 것이다. 버클리 대학을 졸업했고, IQ가 159나 되었던 똑똑하고 멋진 아들이 어느 날 감기에 걸린 것 같다더니 그대로 쓰러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9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질기고 질겼던 그녀였지만, 이번 시련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내를 잃은 남편, 부모를 잃은 자식을 뜻하는 말은 있어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뜻하는 말은 없다. 왜 사람들은 그 단어를 만들지 않았을까. 너무 끔찍한 일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언어로 옮기는 것 자체가 참담한 일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장례식 이후 꼬박 3년을 울었다고 한다. 1년은 거의 매일 울었고, 3개월 동안은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이불 속에서 울었다. 왜, 나한테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연속적으로 닥친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글로 쓰기는 쉬워도, 이 중 한 문장만, 아니 단어 하나만 실현되어도 버티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여정이었다.


그렇게 매 순간을 울며, 신을 원망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빛이 한 줄기 찾아온다. 자신과 똑같이 아들을 잃은 전능자를 만나서 상실한 마음을 위로받은 것이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저미는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자신의 생명을 놓고 치열하게 씨름하고, 가장 소중했던 생명을 처절하게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돈도 명예도 죽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민아의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에 매진한다. 그녀는 상처받았던 자로서 세계의 상처받은 아이들을 안았고,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 삶을 찾는다. 자신의 아들을 잃고, 세상의 아이들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삶의 마지막 고비가 찾아온다. 이번에는 위암이었다. 정말 하나씩 떨쳐낼수록 지독히도 따라붙는 고난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이민아는 달라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고통이 한 사람의 일생에 몰려서 일어날 수 있는지를 한탄했지만, 정작 본인은 초연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생겼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할수록, 소외된 이웃들을 품었다. 예수가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 끝까지 사랑한 것처럼, 자신도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죽도록 사랑하며 헌신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세계의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2012년, 그녀는 모든 고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기구했지만 더없이 찬란했던, 이민아의 생애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우리나라에서 이어령 교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민아 목사를 비롯한 그의 가족 이야기도 제법 많이 알려져 있다. 김한길 전 의원이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문이 더 퍼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나도 이어령이라는 이름은 어렸을 적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글에 심취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평생을 합리적 이성에 입각한 사유와 방대한 지적 작업에 매달려왔고, 70대 노장이 되어 기독교인이 된 그의 목소리 하나하나는 늘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무렵, 그의 인생 후반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이민아 목사의 글과 간증, 일생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만나 본 적도 없고, 이어령 교수만큼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이었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같이 오열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어령 교수도, 현재 암 투병 중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담담하다. 그의 저서 제목대로, 먼저 천국으로 간 딸을 통해,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길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가 최근에 임한 한 인터뷰에서, 나는 지성의 거장이 어느새 영성의 거장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길, 그리고 딸과 손자가 먼저 간 죽음으로의 길을, 그는 회피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멋지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민아 목사와 같이, 죽음에 잠식되지 않는 단단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어령 교수와 이민아 목사. 삶 자체가 영화이자 드라마였던 이민아 목사의 생애와, 그 이민아 목사와 함께 호흡한 이어령 교수에 대해, 꼭 기록하고 싶었다. 이 글은, 불안했던 나의 청춘에 늘 지성과 영성의 목소리를 들려주신 두 분께 바치는 소소한 헌사다.


이어령 선생님, 건강하세요. 이민아 목사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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