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오른다. 매 회차 브라운관에 들어갈 듯 몰입하며, 주인공인 신입사원 장그래와 같이 울고 웃었다. 다 큰 사람이 방에서 혼자 드라마를 틀어 놓고 꺼이꺼이 통곡하던 모습을 떠올리자니 약간 부끄럽지만, 내 인생 처음 경험해 보는 강렬한 감정이입이자 소중한 추억이었다. 그 때부터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우는 사람들을 구박하던 버릇도 멈췄다. 감히 나 따위가 누구를 구박했단 말인가.
사실 내가 그렇게까지 감정의 파고에 시달린 데는 이유가 있다. 그때는 나도 장그래처럼 직장에서 ‘신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볼수록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저녁에 드라마에서 본 난감한 상황은 그 다음날 사무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모든 시련을 이겨낸 주인공의 모습과, 감동적인 BGM이 울려퍼지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엔딩까지 재현되는 일은 좀체 없었다는 데 있다. 난 그때마다 이게 아닌데,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드라마 과몰입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많은 시청자들이 동일하게 느꼈겠지만, <미생>의 판타지가 집약된 캐릭터는 장그래가 아니다. 바로 김부련 부장과 오상식 차장이다. 그 두 사람은, 펄펄 끓는 이해관계의 용광로 속에서도 다음 세대에게 양보할 줄 아는 ‘좋은 어른’들의 세계를 대변했다. 단지 그 양상과 결이 다를 뿐이었다. 둘 다 기존의 질서 안에 있었지만, 김부련이 적당히 속물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면, 오상식은 거의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 오상식 차장이 미래의 당위라면 김부련 부장은 현재의 최선이었던 것이다.
사실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나가 밥벌이를 한다면,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나 삶의 현장에서 좋은 어른, 나아가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생>의 김부련과 오상식 같은 어른들이 세상에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못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삶을 꾸려가는 데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보다, 인간관계의 현실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중학교 시절 사마천의 <사기>에서 한나라의 명장 한신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의 비정함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적이 있다. 한신은 한고조를 도와 초한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결국 역모를 꾸몄다는 모함을 받고 비참하게 죽는 인물이다. 그의 비극적 이야기는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한신은 전쟁의 천재라는 이유로 명성을 얻었으나, 정치의 둔재라는 이유로 본인을 비롯한 삼족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대장군으로 만들어 주었던 한나라 승상 소하였다.
위대한 인문고전 속에서 그 스토리를 접하며, 어린 마음에 2000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날카로운 야수성과 무자비한 잔인함에 들끓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나 지금의 사람들이나 크게 다를 것이 있겠는가 싶다. 인간이 출현한 이래, 그들의 마음에는 전혀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들끓는 질투, 시기, 권력욕과 공격성, 잔인함은 그대로 살아 있다. 단지 의식과 문화, 제도가 진화하여 그것이 노골적으로 발현되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옛날 사람들이 특별히 냉혹하고 무서웠던 것이 아니었던 거다.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을 둘러싼 전쟁은 ‘정치’라는 틀로 문명화되었고, 이권을 두고 벌이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 경쟁으로 대체되었다. 만약 지금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한나라 시대로 던져놓는다면, 그들 중에서도 틀림없이 소하와 한신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신과 소하를 현재로 데려와 대한민국의 정계나 경제계에 갖다 놓는다면, 권모술수로 상대를 요직에서 밀어낼지언정 결코 그와 그의 삼족을 멸하지는 못할 것이다.
<미생>에서 시작해 굳이 <사기> 이야기까지 소환하는 이유는, 문명이 지배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야수성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틀만 바뀌었을 뿐이고 본질은 그대로다. 특히 권력을 둘러싼 암투나 돈 벌이의 치열함이 있는 곳은 어디나,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 현장은, 옛날로 말하면 바로 쇠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하는 잔인한 전쟁터였다. 남을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는 그 치열한 현장 속에 살면서, 비정함과 비인간성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러니 생각해 보자. 주위에 좋은 어른이 없는가. 당신은 운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이 저 멀리 달나라에 있지 않고, 지구의 보편적인 질서 안에 있다는 증거다. 냉혹한 비즈니스의 현장, 전쟁터와 같은 그 현장에 가족과 같은 관계는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회사생활로 렌즈를 좁혀 봐도 마찬가지다. 동심 가득한 당신은 좋은 어른을 만나려 출근했는지 몰라도, 당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은 이기심으로 출근했다. 욕망의 원형질이 부딪히는 곳에서는 성숙한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절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 최소 이 정도를 마음의 디폴트 값으로 설정해야만 한다는 거다. 그것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김부련이나 오상식 같은 ‘좋은 어른’을 보편적인 타인의 상으로 가정해버리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온갖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이 밀려와 깡패 짓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빌런들이 많느냐는 원망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수도 있다.
물론 김부련이나 오상식 같은 좋은 어른들을 만날 수도 있다. 직장생활을 꽤 오래 한 나도 정말 운이 좋아서, 그분들처럼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 흔들려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났든 적게 만났든, 그것이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감사한 마음도 가질 수 있다. 그분들이 물려주는 유산이 내 삶을 꾸려가는 추동력과 아이디어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바라는 세상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먼저 쳐다봐야 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주변에 좋은 어른들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요지는 이것이다. 모든 종류의 사회생활에서 존경할 만한 어른이란, 못 만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만나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젊은 세대일수록 이렇게 생각해야 자신을 오래 지킬 수 있다. 나를 철저하게 배신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까닭 없이 음해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뼛속까지 오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늪에 빠져버린 자신이 애틋할수록, 냉혹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보며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좋은 어른을 만날 수 있다.
김부련과 오상식을 만난 운 좋은 장그래의 이면에는, 자신을 시기하고 괴롭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던 평범한 장그래가 있었다. 사실, 세상은 대개 김부련과 오상식이 아니라 그러한 빌런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