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같은 중,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2년간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일화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에는 공부 좀 잘하는 친구네? 정도였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당시 직할시였던 우리 도시 내에서 이과 TOP1을 계속 찍었던 친구다.
타 고등학교의 선생님들이나 공부 좀 한다는 애들 사이에서도 그 친구 이름은 다 알 정도였으니까. (나와는 중학교 때부터 나름 친한 편이었는데, 이 친구 중학교 때에는 무협지에 빠져서 공부를 많이 안 한 것이었다.)
고3 때 같은 반으로 다시 만났는데, 여름 어느 날 수돗가에서 씻으면서 이 친구랑 진학할 전공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야.. 너 과는 정했냐? 무슨 과 갈 거냐?"
"글쎄... 물리학과에 갈까 생각 중이야. 넌 무슨과 갈 건데?"
"난, 중학교 때부터 기계공학과로 정했어. 근데 너, 물리학과보다는 **공학 같은데가 낫지 않아?"
(사실 당시 S대 물리학과가 대한민국 탑 중 하나던 시절이긴 했다)
"공학도 관심이 있긴 있는데... 아무래도 사물의 이치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다음에 공학을 해도 되지 않나 싶다."
당시 난 이 친구의 답변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고3이면, 기껏해야 십 대 후반인데, 사물의 이치를 알고 싶다고 말한 것이 내겐 너무 놀랍게 들렸다.
그리고, 그 해 그 친구는 어찌 보면 당연히도 S대 물리학과에 진학을 했다.
각자 대학 진학 이후로는 건너건너로만 소식을 듣다가 연락이 끊겼는데, 아무튼 이 친구의 당시 답변이 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말 중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공부 좀 한다 하는 중, 고등학생들의 희망 1순위가 대부분 의대라고 한다.
2020년대에 무엇이 공부 잘하는 대부분의 학생들 꿈이 의사가 되게 만들었을까?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면 꼰대 같은 느낌이지만, 내 또래의 어릴 적은 로봇만화를 많이 보고 자랐기에 과학자가 꽤 높은 순위의 희망직업이었었다. 물론 의사도 있었는데, 그때에는 돈을 잘 버는 직업 이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일이 좋아서, 의미 있어서 또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는 생각에서 선택했었던 것 같다. 실제로야 뭐 성적에 맞춰서 전공이 정해지긴 했었지만 말이다.
그래, 의사도 의미 있고 좋은 직업이니까 섣불리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들 알다시피 의대 중에서도 흉부외과와 같은 힘들면서 돈 안 되는 전공은 기피대상이다.
그것을 갖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하나같이 다들 의사가 희망직업이며, 그중에서도 전공지원이 성형외과라던가 피부과로 몰리는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22년 자료로는 전공지원 경쟁률 높은 곳이 재활의학과, 피부과, 성형외과 순이네요.
사회적으로도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이제 AI와 싸워야 하는 마당이 되어버려서 선택지가 더욱 줄어들었기에, 이제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이치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니?"
라고 말한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기 십상인 세상이라 아이들에게 어떤 진로가 좋겠다는 말을 건네기도, 또 그걸 책임감 있게 말하기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속닥속닥 대며,
"사실은 말이야... 의사가 되면, 가족들만 좋다더라."
하면서,"엔지니어가 되어봐."라고 하기엔 엔지니어가 홀대받는 세상임을 이미 몸소 겪었다 보니, "흠... 알아서 네 살길 살아라!"라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30여 년 전, 수돗가에서 친구가 이야기했던, "사물의 이치를 알고 싶다."는 어떻게 보면 구시대의 낭만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