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옷장 속의 양복들

일상과 사색

by 오영

무라카미 라디오를 읽던 중,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보니, 본사에서 일할 때에 주로 양복을 입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30대에 사업조직에 있다가, 처음 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즈음, 다른 것보다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점이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당시 양복이라고는 경조사에 입을 춘추복, 하복 두 벌이 전부였기에 새로운 양복들이 필요했던 터다. (그나마도 한벌은 결혼할 때 맞춘 양복이었다.)


마침 친구 중에서 양복을 입는 직업의 친구가 있어, 양복 구매에 대한 조언을 구했더니 브랜드나 스타일 그런 것보다는, 살 때 무조건 바지는 두벌을 사라고 알려주었다.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해지는 부분이 뒷주머니 부분인데, 이게 해지기 시작하면 자켓까지 못 입게 된다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같은 바지를 구하려 해도 구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유용한 조언이었고, 이후 양복을 살 때마다 그 조언을 잘 지켰다. 실제로도 뒷주머니 부분이 제일 잘 해지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게 양복을 하나둘씩 장만해서 입다 보니, 오히려 일반 복장보다 여러 장점들도 느껴지게 되었다.

아침마다 옷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래서 오히려 캐주얼한 옷들은 주말용만 사도 된다는 점, 또 생각보다 양복핏이 나에게 잘 어울리더라는 점이었다. 키는 작지만, 그 시절엔 배가 덜 나온 덕분인지 아내나 부모님으로부터 양복 입은 모습을 보고, 잘 어울린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렇다! 아내와 부모님만 그렇게 이야기했다!)

짱구의 수트핏도 엄마에겐 멋져보일거예요!

30대 시절에는 무슨 패기였는지 은갈치 양복도 입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참... 사람들이 얼마나 희한하게 봤을까 싶다. 돌이켜봐도 얼굴이 빨개지는 짓이었다.


요즘은 지방에서 근무하고, 본사틱한 업무도 아닌지라, 완전 자유복장으로 다닌다. 더운 여름철인 지금은 라운드 반팔티에 청바지, 워킹화로 끝이다.

굉장히 편하다!


덕분에 전에 입던 양복들은 옷장신세를 면치 못한다. 가끔이지만 걸려있는 양복들을 보면서, 이 옷들을 내가 입었었지, 나름 잘 어울렸는데 하는 생각에 잠시 잠기지만,


'오랜만에 한번 입어나 볼까?'


하고 바지를 입는 순간, 잠기지 않는 지퍼와 힘겹게 삐져나온 뱃살과 뱃살친구인 옆구리살을 보고는, 절망에 잠겨서 바로 벗어버린다.

아직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멀지 않은듯 ㅠ

입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는 양복들이 옷장에 계속 걸려만 있는 이유다. 그런 사유로 친구인 코트들도 옷장에서 같이 쉬고 있다.


이제는 핏이고 뭐고, 허름하게만 안 보인다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최고인 것 같다. 특히 더운 여름,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비라도 오게 되면 양복 입고 다니는 게 쉽지 않았었구나 싶.


오히려 요즘 가끔 옷장 속의 양복들을 보게 되면, 다른 사유로 양복을 입을 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게 된다.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덧붙임. 분위기 전환해서...전 양복핏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007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라고 생각해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