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마라톤. 풀코스의 반. 거리는 정확히 21.0975km.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충분한 연습 없이 완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거리다. 바꾸어 말하면 하프 코스 완주를 위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평소 신체 움직임이 없다가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삭신이 쑤셨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라톤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마라톤에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설령 완주하더라도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다. 자신감만 가지고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교만에 가까운 일이다.
10km는 가볍게 뛸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거리다. 10km를 가볍게 뛰었으니 그 느낌으로 다시 10km를 달린다고 생각하면 하프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생각대로만 몸이 따라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우리의 신체 에너지는 운동하는 시간과 양에 따라 점점 떨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발에서 완주할 때까지 힘을 균등하게 나누고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신체 능력이다. 이 능력을 갖추기 위한 것은 오로지 노력뿐이다.
18번째 열리는 합천 벚꽃 마라톤 대회에 신청했다. 거의 두 달은 이 대회를 목표로 달리고 달렸다. 본업에 충실해야 하는 평일에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 시간 정도를 달렸고, 토요일에는 다음날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렸다. 평소보다 더 달린 날은 종아리 근육에 묵직한 뻐근함이 찾아왔으나, 조금씩 더 단단해지는 느낌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목표를 향한 노력의 흔적이라 생각하니 더 강한 자극이 되었다.
대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밀려왔다. 마치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대회 전날, 다음날 있을 하프를 위해 쉬어야 할까, 가볍게 뛰어볼까, 긴장감 서린 초조한 마음으로 고민하다 결국 운동화를 신고 말았다. 몸만 푸는 정도의 가벼운 조깅으로 내일을 대비해야 했건만, 평소처럼 한 시간을 달리고 말았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잠을 청했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긴장감에 생애 처음 하프를 뛴다는 설렘까지 더해져 쉽게 잠을 불러올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환호를 맞으며 멋지게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회가 열리는 합천까지 갈 것을 생각하면 늦어도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해야 했으나, 잠을 설치고 말았다.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다. 대회장은 참가자들로 가득했다. 마라톤 마니아가 이렇게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모두 내공이 상당해 보였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참가자들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랜 세월 달리기라는 조각도로 다듬어 온 근육질의 미끈한 다리와 군더더기 없는 몸은 부럽기까지 했다. 그들이 내뿜는 아우라에 괜한 열등감이 들기도 했으나 축제 같은 행사장 분위기를 최대한 즐기면서 몸풀기에 집중했다. 풀코스 참가 선수들이 먼저 달리고, 하프 코스 차례가 왔다. 드디어 참가자 무리 속에 자리를 잡고 출발선에 섰다. 한 방향으로 달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출발 신호와 함께 썰물처럼 밀려 나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랐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많이 달리지도 않았는데 이내 숨이 가빠왔다. 평소 페이스보다 더 빨리 달린 게 분명했다. 10분쯤 달리자 속도가 느려졌다. 그런데 뒤따라 오던 사람들이 하나둘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명인지 셀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셀 수가 없었다. 50대로 보이는 아줌마가 나를 추월했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건강한 뒤태를 뽐내듯 힘찬 뜀박질로 나를 앞질러 나갔다. 심지어 백발의 할아버지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미를 자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잘 달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음을 눈앞에서 확인하면서 달리기로 자신을 표현하는 이 순간만큼은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반드시 완주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계속 달렸다. 정말 힘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다는 나약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할 수 있다, 해내야 한다는 의지를 붙잡는 것 외에는. 결국, 17km 지점에서 달리기는 걷기로 바뀌고 말았다. 걷다가 달리고, 달리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은 달리는 경기이지 걷는 경기가 아니다. 그것이 내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때는 걷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포기하고 의료 버스에 태워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뇌리를 스쳐갔다. 어차피 형편없는 기록이니까 그만둬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역시 기권만은 하지 않았다. 설령 기어가는 한이 있어도 결승점에는 도착하고 싶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