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원서 접수 마감일인데 Y대 정치외교학과와 K대 경영학과 중 어디를 선택할지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너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겠지만 최근에 우리집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서 네 뒷받침을 언제까지 해줄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네가 어려서부터 외교관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외무고시에 합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집 형편에 될 때까지 밀어줄 상황도 못되니 보수적으로 선택을 하는게 어떻겠니?'
고등학교 졸업하는 해에는 내가 오랜 기간 동안 뜻해 왔던대로 외교관의 꿈을 펼치기 위해 정치외교학과에 입학원서를 냈었지만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고, 급격하게 기울고 있던 가세에 허덕이고 계시는 부모님에게는 면목이 없었지만 재수까지 했던터라 더 이상의 실패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더욱이 만일 또 다시 실패해서 삼수를 하기에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다. 또한 K대 경영학과에서는 지원자에게 사전에 입학 상담을 해 준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원만 하면 합격은 물론이고 장학생으로 선발해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원서 접수 마감 전일 늦은 시각에 아버지와 최종적인 상담을 하기 전에 어쩌면 내 마음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졸업 때 대입에 낙방하여 최악으로 구겨졌던 내 자존감은 K대 경영학과에 장학생으로 합격하면서 완전히 회복되었고 아울러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강한 근자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입학 초기에 배짱이 맞는 같은 학과 동기 몇 명과 함께 졸업반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런 저런 대학 생활의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애들아, 이제까지 오느라 수고했으니 앞으로는 재미있게 하고 싶은 일 맘껏하면서 대학 4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형, 맘껏 즐기다가 나중에 취직도 못하는 패잔병 신세가 되는건 아닐까요? 하하하'
친구들 중 외모가 가장 모범생에 가까웠던 순구가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만약에 우리과를 졸업했는데 취직을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대한민국이 망한거야. 이제 공부는 좀 뒷전으로 밀어 놓고 앞으로는 내말대로 각자 하고 싶었던 일 맘껏 하면서 살아. 하하하...'
이날의 대화는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이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것은 내 대학 4년간의 생활이 어떠할지에 대한 예언이 되고 말았고, 대학 4년을 그야말로 달콤한 휴가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