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배짱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호 Sep 15. 2023

배짱

2. 인연

소위 이야기하는 명문대 인기학과 입학이라는 사건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유리한 출발점에 서게 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을 그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나는, 마치 모든 것을 거머쥔 사람처럼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1학년 1학기를 학과 공부와는 전혀 관계없는 미팅, 여행, 음주가무로 보냈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 한켠에는 남들보다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대학 첫 여름방학에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동기생 철근이의 고향 집을 여행하면서 나의 허전함과 야심을 채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경영학과의 고시격인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1학년 2학기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동문 선배는 물론 동아리 선배 중에서도 공인회계사 시험을 다년간 준비했음에도 계속 낙방하며 졸업을 맞이하게 된 형들이 상당수 있었고 심지어는 졸업 후에도 취업을 포기하고 수험생 생활을 이어가는 선배들도 있었다.


그렇게 주변에 수많은 시행착오의 예시가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실패 원인을 파악해서 본보기로 삼을 생각 대신에 무능한 인간들이라고 싸잡아 치부하고, 나는 보기좋게 대학 3학년 이내에 합격하리라는 가당치 않은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시험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사범대에 다니던 동아리 선배가 여름방학 때 자신의 과 후배를 소개시켜줬는데 그 친구에게 홀딱 반하는 바람에 그 친구와의  만남이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위한 시간을 대체하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고 결국 4학년 1학기까지 이어진 나의 무모하고 불성실한 도전은 보기좋게 실패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렇게 공인회계사 시험 공부 시간과 맞바꾼 그 시간들 덕(?)에 지금까지의 내 유일한 동반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된 아내를 얻게 된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 지원 당시 이미 기울고 있던 가세는 점점 가속이 붙고 있었고, 4학년 1학기 즈음에는 이미 지하실 입구를 찾듯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에 내 대학 생활의 대의명분이 되어 주었던 공인회계사 도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4학년 1학기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다수의 대한민국 젊은 남자들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했던 군복무를 나는 조금은 늦은 나이였던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시작하였고 제대 후 4학년 2학기 복학을 앞둔 7월, 여름 방학의 한복판이었던 어느날 우연히 학과 게시판에 붙은 A4 용지를 같은과 친구이자 동아리 친구인 택민과 함께 보게 되었다. 우리가 본 A4 용지는 간략한 안내문이었는데 내용은 S 그룹 계열 종합상사에 재직 중인 경영학과 1년 선배가 입사를 희망하는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회사 소개 및 음주가무를 무료로 제공하겠노라는 것이었고 대학 생활 내내 취업에는 뜻이 없었던 나는 종합상사라는 조직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사업을 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취업에 대한 귀동냥 겸 공짜 저녁과 음주가무도 즐길겸 해서 그 선배에게 연락하였다.


약속된 장소에 택민이와 함께 가보니 우리 이외에도 대략 10여명의 경영학과 졸업반 친구들이 와 있었고 맛난 저녁 식사 후 간단한 술자리를 통해 간략하나마 종합상사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쑤시개부터 미사일까지 수출입을 하는 곳이 종합무역상사야!'


'그럼 해외 출장의 기회도 많겠네요?'


'물론이지. 전 세계 주요 국가에 해외 지사망이 있고 해외 거래선과 업무 협약 등등의 필요성 때문에 자주 출장도 가고 기회가 되면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도 하는게 종합상사 맨의 일상이지.'


'그럼, 박 선배님 회사에 입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일반적으로는 연말에 공채를 통해서 채용을 하는데 오늘 모인 친구들은 특채 형식으로 채용을 할꺼야. 아마 지원서를 제출하면 형식적으로 간단한 영어 시험을 볼 것이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임원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하는 프로세스로 진행 될꺼야.'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오랜 기간동안 외교관을 꿈꿔왔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외교관 신분으로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었는데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오랜기간 동안 잊고 있었던 해외 거주의 꿈을 종합상사에서 이룰 수 있다니...   실은 그냥 공짜 저녁과 술이나 얻어 먹자는 단순하고 치기 어린 생각으로 가볍게 나간 자리였는데 박 선배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랜 기간 잊고 지냈던 해외에서 살아보고자 했던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안으로써 종합상사 입사에 대한 내 관심은 증폭되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날 우리 동기생들에게 종합상사 입사를 권유하면서 저녁과 술을 사준 이 선배가 현재 S 그룹의 부회장이자 회장의 오른팔로서 그룹 전반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애당초 일면식도 없었던 선배였고 입사 과정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을 뿐더러 내 성격 자체가 주위 선배나 상사를 먼저 찾아다니면서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이지 못하다 보니 입사하게 된 후에도 회사 내에서 먼발치로 몇번 스쳐 지난간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인연을 쌓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공할 선배라는 것을 눈꼽만큼이라도 알았다면 좀 더 친하게 지낼걸....


지금도 가끔씩 이 일을 생각하면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도 사람은 생긴대로 살 수 밖에 없는지 지금도 내 이런 성향은 특별하게 바뀐것이 없이 여전히 무쏘의 뿔처럼 독불장군식의 생활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전 01화 배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