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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세한노을 Jun 06. 2023

해소의 여름과 열대과일

여름의 싱가폴을 회상하며



싫어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여름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산뜻하고 보송하게 입었던 아까의 옷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끈적끈적한 팔다리. 후각이 예민해지는 대중교통. 무엇보다 햇빛을 막으려 손을 올려 눈을 가리고 계속해서 찡그러지는 표정과 지친 입모양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게 세상과 서로에게 참 무례한 계절이라 생각했다. 내 의지로 여름을 부른 것도 아닌데 단단히 마음을 먹고 준비하던 오뉴월. 그래도 한 가지 기다리는 이유는 장마였다. 비 오는 날이 좋아서.


작년엔 이 지긋한 여름을 마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취업에 성공하고 입사까지 7월 한 달의 자유가 주어졌다. 길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같았다. 물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날 불편하게 하던 많은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해소의 여름이 될 것 같았다. 오랜 컴플렉스였던 피부도 그냥 태워볼까 생각이 들었다. 꽁꽁 싸매고 있던 긴팔 옷을 모두 정리해 넣고, 평소 여름이라면 더워도 입지 않던 민소매를 입고 한참을 걸었던 하루가 있다. 땀이 흐르고 피부가 뜨거운데도 그냥 걸었다. 그리곤 싱가폴 항공권을 끊었다. 설레면서도 낯선 새 시작에 뛰어들기 전 나와 마주할 여행이 필요했고, 내 여름을 극대화해줄 동남아를 택했다. 기온은 높은데 습도는 한국보다 낮아서인지, 강했지만 불쾌하진 않았던 햇볕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살이 뜨겁다, 내리쬐는 햇볕을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근데 이것도 자연이라 생각하면, 자연을 즐겨본다고 생각하면 반갑게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생각. 혼자 싱가폴을 돌아다니며 파셀스 노래를 참 많이 들었고 열대과일을 많이도 먹으며 샘플로 받은 아뜰리에코롱 향수를 아침마다 뿌렸다. 목을 축이기엔 과하게 달았지만 그래도 상큼한 오렌지 만다린 탠저린 류의 과일들. 작년 여름으로 기억되는 향, 보헤미안 오렌지 블라썸. 지도 없이 한참을 걷다가 들어간 카페 창가로 내리쬐는 햇볕은 유리컵을 깨버릴 것 같았고, 나는 라임에이드를 시켜 일기를 썼다. 이 여행은 지금까지를 돌아보며 앞으로를 계획할 걱정 섞인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온전히 여름이었던 그 현재 속에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여전히 모르겠는데, 어떤 답답한 것들을 직면해 해치운듯한 느낌.


바다에 발을 적시고 해변가에 누웠다. 태닝크림을 바르지 않았는데 살갗이 벗겨지거나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다음날도 호텔 수영장에 누워 태닝을 하고, 마지막 날까지도 햇빛 아래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다. 지독하게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정신은 맑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매서운 폭우가 들이닥쳤다. 곳곳의 피해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죄송했지만 나는 걱정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상쾌함을 느껴버렸고, 이불 빨래를 하며 보송한 여름잠에 취했다. 그렇게 8월을 맞이했다. 또다시 덥다. 습도가 느껴진다. 올해의 여름은 작년만큼 애정 담길 것 같진 않은데, 갈증 없는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여전히 장마는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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