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삼월의 어느 날이었고 이제는 익숙한 이곳 카페의 커피 맛도 여느 날과 같았다. 다른 날과 다르다면 출장 마지막 날이라는 것 정도였다. 다음날이면 지소는 국토 최남단의 이곳에서 진행한 두 달간의 업무를 마치고 서울 본사로 복귀하게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순조롭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간혹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이 일어나긴 했지만 심각한 갈등이나 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소에게는 돌발상황에 대비하는 매뉴얼이란 게 있었고 그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윤무식 팀장은 운이 좋다고 말했고 지소는 스스로 최선을 다한 덕분이라 생각했다.
지소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켜놓고 오늘 측량한 토지의 데이터를 검토하고 처리 결과를 액셀파일에 기입했다. 화면을 눈으로 훑어 내려가다 계산이 완료되지 않은 셀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왜 비어있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지소는 공학용 계산기를 두드렸다. 경사거리를 측정하는 크게 복잡하지 않은 계산이었다. 수평거리와 연직거리, 경사각이 있으니 삼각함수를 이용하면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결과값을 기록했다. 평소 습관대로 한번 더 계산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계산한 결과는 첫 번째와 다른 값이었다. 긴장이 풀린 건가, 끝까지 실수 없이. 지소는 숫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세 번째의 결과는 첫 번째와도 다르고 두 번째와도 달랐다. 계산기가 미쳤나.
지소는 커피를 마시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게 뭐라고 시간을 끌어, 정신 차리고 한방에 끝내자. 정색하고 계산한 네 번째의 결과도 이전과 달랐다. 지소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면 한번 해보자는 거지. 알 수 없는 승부욕에 사로잡혔다. 이 계산을 정확히 해내는 것이 지금 지소에게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졌다. 몰두할수록 다른 결과값이 쌓였다. 지소는 황당했다. 어떻게 이래, 나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어떻게 이래. 거리의 제곱을 더해서 루트 씌운 거 맞잖아. 우씨. 열 번째 계산을 하고 있을 때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윤무식 팀장이었다. 업무 보고. 상사에게 당일 업무를 보고하는 것이 출장자의 의무, 매일 오후 다섯 시에 하던 보고를 잊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로 지소는 말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두 달간 매일 하던 습관대로 보고를 시작했다. 산들로 9번지, 거기가 지적부 불합지(地籍簿 不合地)였잖아요. 실제 측량한 값을 토대로 소유주간 합의를 통해 경계 조정 완료했습니다. 산들로 15번지와 16번지는 측량 오차가 있었는데 기준점이 달라서인 것으로 확인했고요. 재측량하고 데이터값 산출했습니다. 그리고…
“이주임, 지금 당장 7구역에 가야겠어.”
윤팀장이 지소의 말을 끊었다.
“네? 무슨…?”
“7구역에 일이 생겼어. 이주임이 가서 마무리해.”
“7구역이요? 제가요?”
지소가 물었다.
“철수 안 한 직원이 이주임밖에 없잖아, 3구역에서 가까워. 상황 파악하고 매뉴얼대로 처리하면 될 거야.”
“제 구역도 아닌데 갑자기.”
“박주임이 어머니 위중하시다고 급히 철수했어. 자기가 마무리 못해 유감이라고 박주임이 전해달래. 회사 일에 내 구역 네 구역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 다 알잖아. 측량기사들 철수 못하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둘러.”
그러니까 윤무식 팀장은 7구역 담당자인 박주임이 일을 마무리할 수 없는 사유가 생겼고 지소가 그걸 해야한다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소는 책상 위의 계산기를 바라보았다. 이 소식의 징조였나, 계산기의 매번 다른 결과가. 다른 직원의 일을 떠맡는 것도 반가울 리 없는데 그 당사자가 박주임이라니. 게다가 오늘은 출장 마지막 날이지 않나.
“제 구역도 방금 일을 마쳤어요. 다른 구역보다 시작이 늦었고 촉박한 일정이었습니다. 팀장님 잘 아시잖아요.”
지소는 투덜거리는 걸로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했다.
“그래, 이주임 애 많이 쓴 거 내가 잘 알지. 7구역까지 마무리 잘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거야. 약속할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부하직원에게 일을 지시하는 상사의 역할은 강고했다. 윤팀장은 회사 차원의 보상까지 약속하며 지소를 독려했다. 윤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7구역에 데려다줄 사람이 군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보고하라. 매뉴얼대로만 처리하면 될 일이다, 믿을 사람은 이주임밖에 없다. 뻔한 립서비스로 상사의 지시는 종결되었다.
카페 주인이 초콜릿 쿠키를 내왔다. 두달 간 매일 들르는 손님이니 단골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지소는 쿠키를 깨물며 해가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왕복 열두 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에 두 달간의 장기간 출장이었다. 일을 마쳐야 하는 기간도 촉박해서 누구든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지소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일했다. 겨울내내 바닷바람을 맞으며 토지 측량을 지원했고 밤늦게까지 데이터와 씨름하면서 액셀파일을 채워나갔다. 휴일에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해안가 산책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마감을 지켰고 보고서도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거의, 라는 건 끝이 가까웠다는 거지 끝났다는 말은 아니란 건가. 모든 게 순조로웠다고 너무 빨리 끝을 말한 걸 비웃는 건가. 박주임의 이름이 거론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나저나 7구역이 어디쯤이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이곳과 가깝다면 인접한 숫자가 매겨졌을 텐데 3과 7은 가깝다고 할 수 없는데.
지수의 회사 ㈜플래닛엑스는 올해부터 지적도면 디지털화를 수행하는 컨소시움에 참여하고 있었다. 토지의 위치와 소유관계, 경계 등을 등록해놓은 서류가 지적부(地籍簿)인데, 이걸 디지털화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원래 회사는 측량과 탐사 장비를 제작하는 업체로 설립되어 지적측량까지 사업을 확장 중이었다. 국토관리 선진화의 일환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참여한 것 자체가 회사로서는 도약의 기회였고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었다. 지적도면 디지털화는 단순히 종이 지적부를 디지털 정보로 옮기면 되는 일이 아니다. 서류와 실제 토지 현황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전제되어야 한다. 국토의 15% 정도는 서류와 실제가 달랐기 때문이다. 작업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토지를 재측량하고 지적부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불일치가 확인되면 이를 바로잡거나 경계가 불규칙한 경우 디지털화할 실제 데이터를 산출해낸다. 만약 토지소유주 간 협의가 필요할 경우 조정자로서 합의를 이끌어낸다.
지소는 육개월 전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었고 두달 전 3구역의 지적재조사 측량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조사는 토지 측량을 담당하는 측량기사 혹은 지적기능사가 주축이 되고 지소와 같은 지원인력은 서류정리와 지적부등록을 담당했다. 원래 지원인력도 자격증을 가진 외부전문가로 구성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회사는 비용 절감을 이유로 사내에서 무작위로 지원인력을 차출했다. 말이 무작위였지, 계약직이나 임시직 직원들이 대상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장기간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라 정규직 직원들을 차출한다면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니 결론은 뻔했다. 이럴 때 부리려고 계약직 직원을 뽑는 거지, 라고 직원들은 생각했다. 회사는 프로젝트 성과에 따라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는 당근을 제시했지만 그걸 신뢰하는 계약직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회사방침은 자발적 참여였지만 그걸 따르지 않으면 사직서를 내야 할 분위기였으므로 대다수 계약직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출장 짐을 쌌던 것이다.
오늘 밤 혼자 맥주를 마시려던 계획은 없던 게 되었다. 오랜만에 취할 때까지 마실 생각이었는데, 중얼거리면서 지소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계산기를 두드렸다. 열한 번째의 다른 답을 출력한 계산기는 사이코패스의 얼굴처럼 뻔뻔했다. 씨발, 집어쳐. 지소는 노트북을 닫고 배낭을 챙겼다.
*
“배를 타야 한다고요?”
남자가 가리키는 배를 보며 지소가 물었다. 얼마 안 걸려요, 라고 대답하며 남자는 날렵하게 배에 올라 시동을 켰다. 통통, 거려서 통통배인 건 알겠는데 저런 걸 타고 가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회사 상사들은 늘 그랬다. 딱히 거짓은 아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기도 애매하다. 말할 기회를 놓쳤다거나 너무 사소해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는 듯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것도 부하직원에게 일을 시키는 상사의 스킬에 속하는 건가. 그러나 지소에게는 그런 게 중요했다. 배를 타고 가야 하는지, 얼마나 타고 가야 하는지, 배를 모는 사람은 믿을 만한지 등등. 낯선 곳에 출장 온 것만으로 지소는 충분히 긴장상태였다. 배까지 타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걸 알았다면 윤팀장의 지시를 거절할 수 있었을까. 남자가 힐끗 지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 갈 겁니까?”
“그러니까 이 배를 타야 7구역으로 간다는 거죠?”
“7구역인지 8구역인지는 모르겠고요. 반달섬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섬이요?”
지소가 큰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여기는 엎어지면 코 닿는 게 섬입니다. 반달섬까지 대교가 건설되긴 했는데 한참 돌아가야 해요. 배가 빠릅니다.”
군청 앞에서 지소를 기다리는 이는 키가 훌쩍한 젊은 남자였다. 그를 따라 걷다 보니 선착장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게 섬이라는 남자의 말이 지소를 안심시키기는커녕 불안감을 키웠다. 그러니까 팀장이 말한 7구역은 반달섬에 있고 배를 타고 가야 하며 생판 모르는 남자가 그곳으로 지소를 데려다준다는 것이었다. 납치 혹은 유괴의 전형적인 스토리인 것만 같아서, 안 그래도 삼월의 바닷바람에 한기가 돌던 지소의 몸이 오들거렸다. 등에 지고 있는 배낭이 무겁게 느껴진 건 출장 온 뒤 처음이었다.
“뭘 그렇게 춥게 입었어요? 이거라도.”
남자가 지소의 옷차림을 바라보며 담요를 건넸다.
“아, 니요,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보여요.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공무원이라고요. 계약직이긴 하지만.”
남자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노용희, 이라는 이름 밑에 〇〇시 해양관광과라는 글자가 약간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씩이나 되는 분이 왜 여기에서 이런 통통배를 타고 있는지 새로운 물음표가 생겼다. 거친 바닷바람은 갈수록 괜찮지 않아지고 계속 이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도 없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지소는 배에 올랐다. 처음부터 어쩔 수 없었고 어쩐지 끝날 때까지 그럴 것 같았다. 남자가 건넨 담요를 어깨에 두르자 오들거리던 몸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통통배는 살짝 후진하는 듯싶더니 오른쪽으로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선착장은 곧 멀어졌다. 정박 중인 크고 작은 배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혔다. 그것도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더 먼 곳으로 향했다. 선창가 뒤편 야트막한 산동네에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통통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와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포말에 정신이 흐릿해졌다. 헐렁해지는 마음과 달리 섬 하나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지소는 궁금해졌다.
“반달처럼 생겼나요?”
남자가 돌아보았다.
“비슷해요.”
지소는 휴대폰을 꺼내 지도앱을 켜고 반달섬을 찾았다. 앱은 반달섬을 찾지 못했다. 반월도로 찾아보세요, 라고 남자가 말했다. 타원형을 반으로 싹둑 잘라먹은 것 같은 섬이 검색되었다. 정말 반달 모양이네, 지소가 중얼거렸다. 남자가 배를 댔다. 지소는 어깨에 두른 담요를 접어 두고서 일어섰다.
그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바닷가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형물인가 싶었다. 해안절벽으로 이어지는 바위 끝에 돌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뚝 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움직였다.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를 들었다 내렸다 반복했다. 낚시하는 중인 것 같았다. 그가 서 있는 바위는 검고 번들거려 미역 줄기처럼 미끄러워 보였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다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 지소의 마음도 미끌거렸다.
“이렇게 바람 많은 날에 물고기가 잡혀요?”
“잘 안 잡혀요, 바람 불고 파도가 세지면 녀석들도 안전한 곳으로 숨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낚시를 하는군요.”
“저 자리는 날씨와 상관없는 낚시 명당 중 하나예요. 저 노인은 이 섬의 명당을 다 꿰차고 있고요.”
남자가 낚시하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다시 건너오지 않을 거죠? 혹 배를 타야 하면 연락하세요.”
“가는 거예요? 7구역은 어떻게 찾아가라고요?”
남자는 지소가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했다.
“몇 구역인지 모른다니까요. 군청 과장님이 서랑마을 고만례상회 가는 길 가르쳐주면 된다고…”
“고만, 례요?”
“걸어서 금방이어요. 앞에 길 보이지요? 그 길을 쭉 따라가십시오. 산을 왼편에 끼고 돈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걷다 보면 크고 늠름한 느티나무가 보일 겁니다. 나무를 보고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걸으면 돼요. 그러다 보면 교회 건물이 나오고요. 그 맞은편에 가게가 있어요. 길만 쭉 따라가면 됩니다.”
매일 똑같은 설명을 하는 해설사처럼 줄줄 읊고 나서, 해양관광과의 임시직 공무원은 지소를 남겨두고 떠났다. 지소는 서운했다. 그가 정확한 지점까지 데려다줄 것이라 기대해서가 아니라 낯선 섬에 혼자 남겨졌다는 막막함 때문이었다. 7구역의 주소라도 받아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몸을 돌려 길을 가려는 순간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몸놀림이 급해졌다. 낚싯대가 활처럼 휘어졌다. 몸을 뒤로 젖혀 줄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힘센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는지 선뜻 끌려오지 않았다. 되레 물고기에 딸려 나가 바다에 빠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그의 두 다리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그 낚시의 결말이 궁금했지만 지소는 모르는 길을 가야 했으므로 발길을 돌렸다.
길만 쭉 따라가라고 남자는 말했지만 갈래 길이 나올 때마다 지소는 남자를 원망했다. 두 개로 갈라진 길이 두 번 나왔고 삼거리가 한번 나왔다. 지소는 투덜거렸다. 이렇게 길이 많은데 길만 따라가면 된다니, 도대체 그 사람은 뭘 가르쳐준 건가. 내키는 대로 걸었는데 저 멀리 크고 우람한 나무가 보였다. 느티나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늠름한 건 분명했다. 지소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능선을 넘었다. 동화처럼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휴, 하면서 뒤돌아서니 석양에 물든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이 시원하게 열리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해가 수평선 뒤로 넘어가면서 주홍빛이 변해갔다. 그 황홀한 색감에 넋을 놓게 되었다. 아차, 저렇게 해가 지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거잖아. 지소는 발길을 재촉했다.
마을에 접어들어 한참을 걸었다. 뾰족지붕 아래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보였다. 그 맞은편에 가게가 있었고 삼각대와 측량기를 다루고 있는 측량기사들이 있었다. 점퍼 차림에 나이가 들어보이는 사람은 측량기 모니터를, 셔츠차림을 한 젊은 사람은 평상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점퍼 차림의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젊은 사람은 본사 회의 때 몇 번 보고 인사를 나눈 적 있는 하대리였다. 지소는 하대리에게 다가갔다.
“지적부 불합지.”
대뜸 점퍼 차림의 남자가 측량대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네?”
“서류와 실제가 다르다고.”
“네.”
지소가 대답했다. 하대리가 일어서 지소에게 인사를 하면서 서류를 보여주었다. 측량이 끝난 후 마무리는 지원인력의 몫이었다. 측량기사들이 이 시간까지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은 순전히 박주임의 사정 때문이었다. 점퍼 차림 남자의 반말을 지소는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하대리가 서류를 두 장 넘긴 뒤 한 곳을 짚었다. 산23번지와 산24번지. 하대리는 드론이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상당히 큰 불일치예요. 이게 왜 아직도 조정이 안된 건지 의문이네요. 자, 보세요. 지적부상으로는 이곳이 산23번지이고 여기부터 산24번지 필지가 시작돼요. 저 위쪽 파란 대문이요. 경계가 그렇게 그어져 있단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저 계단을 지나쳐 칠십이점삼 미터 정도를 더 가야 집이 나와요. 기준점에서 보면 X좌표가 252233.35, Y좌표가…”
“그러니까 요 아래 건물 경계는 여기에서 끝나고 저 파란 대문은 칠십 미터, 정확히는 칠십이점삼 미터를 더 가야 경계가 시작돼요. 그 두 경계 사이에 있는 땅이 공백이라는 거죠?”
“공백이지. 그것도 아주 큰 공백.”
점퍼 차림 남자가 가게와 파란 대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다시 모니터 화면에 눈을 갖다 댔다. 삼각대가 낮아 남자는 허리를 약간 숙여 구부정한 모양새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공룡 유적지라도 발견한 듯 심각했다. 지소는 남자의 계속되는 반말도 개의치 않고 물었다.
“측량기준점이 다른 건 아닐까요?”
점퍼 차림 남자가 지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소는 그 정도쯤은 안다는 투로 말했다.
“인접한 필지인데 기준점이 다르기도 하잖아요. 지금 지적부가 워낙 오래전에 제작된 것이기도 하고요. 이곳은 백년 전 지적부가 만들어진 뒤 한국전쟁 지나고 딱 한번 재측량이 있었네요.”
하대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불합지 이유가 그럴 수 있죠. 근데 어제 측량해보니 이 두 필지 기준점이 다르진 않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지형이 변해 그럴 수도 있는데 여기 지반은 단단한 바위층으로 되어 있어 퇴적이 진행되거나 그랬을 것 같지 않고요. 애당초 경계 설정이 잘못되었던 걸로 파악됩니다. 어쨌건 이렇게 상당한 불합지가 방치되고 있었다니 놀랍죠.”
“백삼십칠점 삼십칠 제곱미터, 평수로 치면 사십일점 육이야. 사십 평이나 되는 토지가 주인 없이 방치되고 있어. 무덤에 있는 땅 주인이 벌떡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야, 땅값 오른 걸 생각하면.”
점퍼 차림 남자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하대리가 웃었다. 지소는 수긍했다. 이 정도 공백이면 두 필지의 소유자 중 누구건 재조사를 요구하고 재측량을 진행했을 법도 했다. 땅과 소유, 이 두 가지 조합이면 사람들은 열 일 제쳐두고 번거로운 일에 뛰어들었다. 이 일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소는 그걸 알게 되었다. 지소가 맡았던 3구역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도시재생과 관광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공공예산이 투입되고 있었다. 도로가 정비되고 낡은 건물이 리모델링 되면서 쾌적한 환경으로 변신 중이었고 상권도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그건 땅값이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평당 십만 원하던 게 이십만 원, 오십만 원 하더니 백만 원, 삼백만 원으로 치솟는데 육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이장은 말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그곳에 살았다는 이장은 팔십 평생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 했다. 반달섬도 육지로 연결되는 다리가 개설되었다니 3구역과 동일한 관광권으로 묶일만했고 삼십 배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한 상승세를 예상할 수 있었다. 점퍼 차림 남자의 말대로 땅주인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측량을 요구할 법한 것이다. 그러나 서류에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다. 어지간히 무던한 이들이거나 혹은 정말로 소유권이 땅속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측량한 필지 영상과 데이터는 박주임님 메일로 전송했어요. 전달받았어요?”
하대리가 드론을 거둬들이고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못 받았어요. 죄송한데 제 명함에 있는 메일로 다시 주시겠어요?”
지소는 어깨에 진 배낭을 내려놓고 속을 뒤적거렸다. 노트북과 서류철, 필통, 영양제가 든 파우치, 화장지 사이로 명함지갑을 찾았으나 없었다. 분명히 파우치 옆에 넣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찾을 때는 숨어버리는 게 명함지갑이었다. 하대리는 만물상을 구경하듯 지소의 배낭 속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다녀요?”
“그게, 다 필요한 물건들이어서. 출장이기도 하고요.”
명함지갑은 노트북에 깔려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지소는 명함을 한 장 꺼내 하대리에게 내밀었다. 하대리가 말했다.
“이 정도면 경계 변경이 불가피해 보여요. 이주임 일이 많겠어요. 토지소유주부터 찾아야할 텐데 쉽지 않아 보여요, 어제 박주임 보니까 애를 좀 먹던데. 자, 저희는 철수합니다. 수고하십시오.”
하대리는 드론과 노트북을 챙겼고 점퍼 차림 남자는 측량대를 접어 손에 들었다. 점퍼차림 남자가 언덕길을 내려가려다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 지소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지소의 어깨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낮게 말했다.
“여기 지형이 말야, 하대리 말대로 암반층이라 퇴적이 진행된 것 같진 않은데 뭔가 이상해.”
“뭐가요?”
“지형측량을 해보니까 그렇다는 거야. 여기 건물에 가게 있잖아, 고만례인지 고마려인지, 여튼 가게 후미가 땅 밑으로 들어가 있어. 가게 밖으로 나와 계단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요렇게 길이 나 있는데 그 밑까지 물려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조사해보면 뭔가 나올 것도 같은데 시간이 없어서 말야.”
남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놓아 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봤으면 싶은데 시간도 없고 문도 닫혀 있고.”
지소는 남자의 반말이 계속 신경에 거슬려 따지듯 물었다.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공백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남자는 지소의 기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지소의 말을 듣고 뭔가를 떠올리는 듯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남자가 지소에게 뭔가를 더 말하려는데 늦겠어요, 라고 언덕 밑에서 하대리가 소리쳤다. 남자는 영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뒤돌아서며 공백이 아닐 수도 있겠어, 라고 말했다. 지소는 언덕길을 내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백이 아니면 뭐라는 거야.
지소는 지적부를 들여다보았다. 산23번지와 24번지 옆에 불합지라 쓰고 괄호로 공백형이라 적었다. 측량오류로 인해 토지 경계선이 벌어지는 현상. 소유주를 확인했다. 산23번지는 구이순, 산24번지는 노대기라 되어 있었다. 이들을 만나 지적부와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고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 경계선을 정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윤팀장 말대로 매뉴얼에 따라 진행하면 끝날 일이었지만 지적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구이순과 노대기라는 이름 아래 적혀있는 전화번호 옆에는 ‘없는 번호’라는 연필 메모가 있었다. 얍삽한 글자체가 박주임의 것이 틀림없었다. 지적부 하단에 같은 필체로 서랑마을 이장의 휴대폰 번호가 적혀있었는데 이석증 치료차 병원 입원, 이라고 되어 있었다. 보통 시골마을이라면 웬만한 건 이장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땅주인들은 연락처가 없고 이장은 부재중이고 쉽지 않겠다. 공백으로 시작해 없는 번호와 부재로 이어지는 단어의 연결. 계산기와 씨름할 때의 싸한 느낌이 몰려왔다. 같은 계산식에 매번 다른 답을 내놓는 게 뭔가 지소를 골탕먹이는 것 같았는데 거기에 더해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지소는 배낭을 열고 텀블러를 꺼낸 뒤 물을 마셨다.
*
커다란 나무가 눈에 띄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길에 기준점으로 삼았던 느티나무였다. 묵은 세월의 비늘처럼 나무껍질이 떨어지고 있었으나 가지마다 새순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건물 외관과 무신경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고만례상회. 원래 초록색 바탕에 흰색의 입체 글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ㄴ자와 ㅣ가 떨어져나간 곳에 분홍색과 파란색 페인트를 칠해놓았다. 언뜻 보면 고마례상회나 고만려상회, 그도 아니면 고마려상회로 보였다. 간판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다니. 원래 이름이란 별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그렇지만 결국은 고만례상회라고 주장하는, 어설픈 듯 고집스럽고 무감한 듯 집요한 간판.
시멘트 건물 외벽에는 흰색으로 칠을 새로 하고 주황색 지붕을 얹었다. 가게와 이어진 벽에는 담배와 공중전화 표식이 붙어 있었고 출입구 유리창에는 목양교회 바자회, 라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맞은편 교회 건물을 바라보니 뾰족지붕 아래 글자가 써 있었다. 목양교회.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천사들은 노래하네. 찬송가의 한 구절이 지소의 입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지소가 어릴 적 동네에 작은 교회가 새로 생겼을 때 친구들은 과자를 먹으러 교회에 갔고, 지소도 곧 그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만왕의 왕 아기 예수를 찬양 경배하네. 과자를 오물거리면서도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것을 어린 지소는 이미 알고 있었고 찬양 경배의 뜻을 정확히는 몰라도 아기 예수에 대한 좋은 마음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교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 예수에 대한 좋은 마음은 그렇게 쉽게, 지속적으로 가져지는 게 아니었다. 매번 교회에 갈 때마다 찬송가를 새로 배우는 것도 귀찮아질 즈음 지소는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교회는 가지 않았지만 가끔 오후가 무료해질 때면 목자가 양을 지킬 때 천사들은 노래하네, 하고 노래를 불렀다. 목자가 양을 지킨다는 구절이 어쩐지 좋았다. 어떨 때는 책임감 강한 목자가 되었다가 또 다른 때는 목자가 지키는 연약한 양이 되었다가 하는 마음이었다.
한가하게 이럴 때가 아니다, 땅 주인을 찾아야 한다. 구이순과 노대기. 주민번호를 보니 거의 한 세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었다. 지소는 고만레상회 앞에 섰다. 가게 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생각해보니 측량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인기척이 없었다. 이제 겨우 저녁 여섯 시가 되어가는데 가게 문을 일찍 닫는 건가. 하긴 여긴 섬이고 하루가 일찍 끝난다.
가게 위쪽 계단으로 올라 산24번지를 향해 걸었다. 계단은 생각보다 구불구불했다. 왼쪽, 저쪽, 그 너머, 그리고 주황색 양철지붕에 파란 대문. 대문에 들어서니 현관이 두 군데였다. 왼쪽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계세요, 라는 말해도 인기척이 없었다. 오른쪽 현관문은 닫혀 있었지만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멘. 남자가 문밖으로 나왔다. 지소는 명함을 건넸다. 남자는 목양교회 전도사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측량 때문에 그러시군요.”
“혹시 노대기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노대기 형제님이요.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지소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지적재조사측량 과정에서 고만례상회와 파란대문 집의 경계 조정이 필요해졌습니다. 이 땅 소유주인 노대기 씨가 조정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대기 씨를 만나야 합니다. 전도사는 왼쪽 집의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사시는 게 맞습니다. 이쪽 복순자매님은 세들어 사시는 거구요. 노대기 형제님이 집을 자주 비우시긴 한데, 오늘도 안 계시나 봅니다.”
지소는 감사하다고 말했다. 혹시 고만레상회의 소유주인 구이순 씨를 아느냐고도 물었다. 전도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그럼 지금 가게를 보고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고만례상회요? 김을숙 씨였는데 그분이 가게 주인은 아닙니다. 이어도식당 주인분이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도식당이요?”
“요 아래 선착장 근처에 있습니다. 해물뚝배기가 아주 맛있습니다.”
지소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도사가 웃었다. 지소는 머쓱해졌다. 남자에게 인사를 한 뒤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해물뚝배기 전문. 이어도식당은 선착장에서 한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까 배에서 내릴 때는 선착장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다시 보니 제법 분주하면서도 살가운 풍경이었다. 항구와 여객선터미널, 관공서 등이 밀집한 3구역에 비해 소박한 바닷가마을의 정취가 느껴졌다. 고기잡이배들이 들고 나는 선착장과 야트막한 산등선에 들어선 집들, 바지락칼국수와 뚝배기해물탕 등속을 파는 가게들이 조용히 영업하고 있는 어촌마을이었다.
지소는 식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선착장 주변을 배회했다. 고기잡이배들이 속속 귀환하면서 선창가는 부산스러워졌다. 배를 대고 고기를 내리고 그물을 손질하는 능숙하고 빠른 손길을 바라보며 지소는 숙련이라는 말이 품은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고기를 실은 트럭들이 떠나고 사람들도 어디론가 사라지자 인공의 불빛이 선창가를 밝혔다. 바람이 세지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밤바람은 세상의 많은 것이 그렇듯 때로 부드러웠지만 대개는 거칠었다.
지소는 서랑마을로 가는 반대쪽 해안선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다 위로 대교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에 새로 건설되었다고 노용희 씨가 말한 게 저 다리인 모양이었다. 대교가 가까워지자 캐리어를 끌거나 배낭을 맨 관광객들이 꽤 보였다. 휴대폰과 도로 표지판을 번갈아 바라보며 목적지를 찾는 이들도 있었다. 섬 안쪽으로 난 길에는 이질적인 구조물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벽돌에 기와지붕을 얹은 이층 건물, 대리석 외벽을 둘러친 후 붉은 벽돌로 아치를 세운 뒤 뾰족지붕을 얹은 건물들이었다. 다다미방에 있을 것 같은 일본식 목조가옥도 여러 채 보였다. 오래된 건물들이 공방과 카페,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 되어 과거와 현대가 뒤섞인 거리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근대화거리라는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봄바람을 타고 매화가 휘날렸다. 여행객들이 꽃비를 손으로 잡으면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구김살 없는 발랄한 소리를 듣자 지소는 배가 고파졌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어도식당에 들어가 해물뚝배기탕을 시켰다. 배가 고프니 일단 저녁식사를 하고 식당 주인과 산23번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저벅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머리 허연 노인이 한쪽 다리를 절면서 김이 오르는 뚝배기를 들고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태롭게만 해서 지소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냥 있어요, 내가 해. 노인이 말했다.
뚝배기에는 새우와 조개, 낙지 등속이 고춧가루와 된장을 푼 국물과 함께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수저를 들어 한 입 떠먹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묘하고 깊은 국물이었다. 조개 속을 까먹고 낙지를 씹어 먹고 새우 껍질을 벗겨 먹고 나니 갑자기 세상이 만만해졌다. 뭐든 한 방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소 앞에서 의자에 앉아 파를 다듬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저, 구이순 씨를 아실까요?”
노인이 파 다듬는 손을 멈추고 지소를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빛에서 경계하는 눈빛으로 빠르게 바뀌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지소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목양교회 전도사님이 고만례상회에 대해 아실 거라고 해서.”
“무슨 볼일이오?”
지소는 전도사에게 했던 설명을 노인에게 똑같이 했다. 노인이 지소 쪽을 바라보았으나 지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인지 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태도 아무 일 없었소. 이제사 무슨 선을 다시 긋는다고.”
“그게, 사십 평이어요. 두 분이 합의 잘 하시면 이십 평의 땅이 생기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노대기 씨와 말입니다.”
“누구?”
“인접 토지의 소유주가 노대…”
노인이 눈을 감았다. 파가 매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한참 동안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지소는 눈꺼풀 밑으로 숨어버린 노인의 눈동자를 생각하며 공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세상을 만만하게 본다고 누군가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지적재조사 일을 진행한 경험으로 볼 때, 산23번지와 24번지의 경계조정은 분쟁으로 이어질 사안이 아니라는 게 지소의 판단이었다. 두 필지의 구조물이 명확하므로 칠십이점삼 미터의 공백은 오대 오로 각 필지에 덧붙여지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노인은 공짜로 땅이 생긴다 해도 관심 없는 태도였고 노대기 씨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감아버렸다. 지소는 노인이 구이순 씨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확실히 물어볼까 했지만 노인의 감은 눈을 보자 괜한 일이겠다 싶었다.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입장에서 초반부터 심기를 건드리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지소는 가방을 뒤적거려 파우치를 찾아 비타민C를 꺼냈다. 오백 밀리그램짜리 알약 두 개를 입에 넣고 물을 들이켰다. 해물뚝배기탕이 불어넣은 자신감은 사라졌다. 서두르지 말자, 일단 오늘 밤 푹 자고 내일부터 동네를 뒤져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저, 혹시 어디 묵을 데가,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노인이 눈을 뜨고 지소를 바라보았다. 지소는 노인의 얼굴을 그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백발에 주름진 얼굴이 잔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노인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노인이 지소에게 말했다.
“길 따라 걷다 보면 언덕 위에 이층 양옥이 있소. 노란색 페인트를 칠해놓아서 금방 찾을 거요.”
노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파를 다시 다듬기 시작했다. 밥그릇은 비었고 뚝배기는 바닥을 드러냈다. 나눌 이야기도 끝났다. 이어도식당에 더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 지소는 밖으로 나왔다.
*
“그래서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윤팀장이 말했다.
“모르겠어요. 아직 땅 주인들을 만나지도 못했거든요.”
“꼭 만나봐야 아나, 대충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면서 일을 해야지. 이 프로젝트가 이번 달 안에 마무리되어야 하는 건 이주임도 알잖아. 다른 구역은 모두 종료되었고 7구역 그 건만 남았어.”
“세 시간 전에 일을 맡았습니다, 팀장님.”
“그래, 이주임 고생하는 거 내가 잘 알지. 그런데 우리 회사 미래가 달린 일이야. 이번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쳐야 회사도 좋고 이주임도 좋을 거 아냐.”
“아주 큰 공백이래요, 공백. 팀장님 알고 계셨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박주임이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요. 왜 그런 걸 보고에 빠뜨리냐고요.”
지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백번 양보해서 어머니가 위독해서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건 그렇다 치자. 공백이라는 걸 파악하고도 팀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일을 넘긴 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혹여 골치 아파 떠넘긴 거라면 박주임 넌 정말 개자식이다, 아니 개새끼다. 그러나 지소는 곧 목소리를 높인 것을 후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상사에게 감정적인 말투는 곤란하다. 그 부메랑은 꼭 돌아온다. 열 배, 스무 배가 되는 건 아주 쉽다.
“박주임이 경황이 있었겠어? 어쨌건 상황은 알겠어. 되도록 빨리 소유주들을 만나 경계 조정을 마치는 수밖에. 이주임이 수고해줘. 사흘 안에 마무리 해. 더 이상은 안 돼.”
윤팀장은 전화를 끊었다. 유능한 상사. 명확하고 단호하게 일을 지시하고 그걸 꼭 지켜야 하는 중요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팀장이라는 직책이거나 목표의식이거나 뭐 그렇겠지. 성실함은? 그건 기본일 테고. 그렇지 않다면 저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다리가 퍽퍽해질 때 언덕 위 작은 집이 보였다. 어두워서 노란색 집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양옥으로 오르는 길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물음표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지소는 양옥의 대문 앞에서 계세요, 라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오늘은 답 없는 문 앞에 서 있는 날. 어둠 속에서 묵묵한 대문을 바라보다 공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만례상회에서 무심코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백지처럼 하얀 짐승이 떠올랐다.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을까, 하얀 짐승의 검은 목구멍이라니. 그런 걸 어디서 본 적이 있었을까.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갑자기 지소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왜 또 이 타이밍에. 숨을 쉬자. 들이쉬고 내쉬면 된다. 지소는 처음 호흡을 배우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다. 바다로 쏟아지는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 생각이 났을 거야, 그건 정말 눈부셨다.
지소는 문을 밀었다. 집 마당이 먼저 보였다. 어둠이 얌전한 짐승마냥 웅크리고 있었다.
슥, 삭, 슥, 삭.
마당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소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매화나무는 달빛을 받아 희끗했다. 나무 아래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매화나무에서 담벼락까지 이어지는 아담한 화단을 식별하려 애쓸 때, 담 그늘에서 무언가 뭉툭한 것이 움직였다. 뭉툭한 것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땅을 파서 무언가를 심는 것도 같고 묻는 것도 같았다. 설마 이 밤에 시체를 묻는 건 아니겠지. 달을 가렸던 구름이 흘러가고 얌전한 어둠에 묻혀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가 작은 묘목을 심고 있었다. 슥, 삭, 몇 번의 삽질로 방금 심은 묘목의 아랫부분을 두툼하게 만들고서 광, 광, 삽 등으로 토닥거린 뒤 여자는 허리를 폈다. 휴, 하고 큰 숨을 내쉬면서 화단을 빠져나와 낡은 의자에 앉았다. 화단 위에 올려둔 컵에 든 걸 한 모금 들이키더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휴, 하는 소리가 연기를 따라 피어오르는 것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소는 여자에게 걸어갔다. 여자는 플라스틱 병에 담긴 액체를 자기가 마시던 컵에 따라 지소에게 내밀었다.
“한잔 해요.”
“네?”
“매실주니까 한잔만 해요.”
지소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상한 거 안 탔으니까 마셔요. 고단한 날은 매실주가 딱이니까.”
조금 고단하긴 하죠, 라는 심정으로 지소는 여자가 준 액체를 들이켰다. 알싸하고 달달한 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층 방을 쓰면 돼요. 바다가 보이고 조용해요. 안전하기도 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죠?”
지소는 방값을 선불로 건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저, 구이순 씨라고 아시나요? 고만례상회 토지 소유주인데요.”
“구이순.”
“네, 구이순.”
“만나게 해드릴게요.”
“진짜요? 어디 계시는데요? 아,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리려나 싶어 지소는 흥분했다.
“그 전에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네?”
“가게를 봐야 합니다.”
“가게요?”
“고만례상회. 사흘.”
“그렇다면 김을숙 씨…?”
여자가 담배를 두어 번 더 빨더니 땅바닥에 떨어뜨려 발로 껐다.
“제가 김을숙입니다. 고만례상회를 보고 있는.”
“그런데 왜 제가?”
“꼭 당신이어서가 아닙니다. 가게를 닫지 않아야 해서죠. 사흘만 봐주면 됩니다.”
오늘의 키워드는 사흘. 지소가 접속하는 사람들은 사흘을 이야기한다. 사흘 안에 일을 마무리하라, 사흘만 고만례상회를 봐달라. 오래 묵힌 빚을 받으러 온 사람들처럼 요청도 아니고 부탁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처럼. 갑자기 목이 간질거리고 기침이 나려 했다. 지소는 햐안 짐승의 목구멍을 생각하면서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파우치, 명함지갑, 노트, 접이우산 옆에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찾아 목구멍을 향해 두 번 뿌렸다. 그런 지소를 바라보며 여자가 말했다.
“사흘입니다.”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팔을 뻗어 하얀 매화꽃이 달린 가지를 잡아당겨 코에 들이댔다.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지소는 가게를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편의점 알바라면 학교다닐 때부터 신물 나도록 해봤다. 졸업 후에도 계약직에서 다른 계약직으로 옮겨가기 전 짬이 날 때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다. 진상들만 없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물건을 진열하고 바코드를 찍고 쓰레기를 청소하고,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가게가 허름해서 바코드 기계 같은 건 없어도 대충 물건값을 알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 반달섬까지 와서 왜 꼭 가게를 봐야 하나? 사흘만 봐주면 된다고, 방금 심은 묘목에 사흘에 한번 물을 주면 된다는 투로 말하는 여자의 입술이 잣나무 잎사귀처럼 꼿꼿했다. 지소가 물었다.
“왜 사흘 후인가요? 저는 구이순 씨를 더 빨리 만나면 좋겠습니다.”
열쇠꾸러미를 건네면서 여자가 말했다.
“사흘 후면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지금은 그래야 하는 이유보다 그이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건 장담할 수 있어요.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여자는 말을 마치고 대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노랑나비가 새겨진 작은 천가방을 매고 있었고 손에 커다란 짐가방을 들었다. 며칠간 출타하는 사람의 가방치고는 너무 컸다. 어딜 가는 건가 의아해하다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생각했다가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뭐 그런 생각으로 지소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여자가 대문을 나서려다 뒤돌아 지소에게 다가왔다.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연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여자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오늘 심은 저 매화나무는 내후년이 되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지금은 어리고 연약하기만 해서 뿌리가 뻗어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당연한 말이었다. 아이가 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식물도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당연한 말을 하는 여자의 얼굴이 은거하는 현자처럼 보인다고 지소는 생각했다. 달빛이 여자의 광대뼈에 머무르다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모습이 지극히 비현실적이었고, 여자의 어깨에 걸쳐진 천가방 속의 노랑나비가 하얀 광목천을 빠져나와 여자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 꿈인 듯 아련했기 때문이라고, 지소는 나중에야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보통 아닌 일들이 현실을 초월한 어떤 감각을 동반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렇게 그 순간은 지소에게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