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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가만례

“계세요. 노대기 씨 계신가요.”

현관문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지소는 문을 열었다. 선뜻 들어가지는 못했다.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뒤돌아 대문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싸웠다.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수 없고 뭐라도 해야 했다.    

실내는 어두웠다. 벽을 더듬어서 불을 켰다.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는 소리가 파다닥 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활개치던 사물들이 급속도로 정지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물들은 바로 직전 움직임의 여운을 미처 회수하지 못한 황망한 얼음 상태처럼 정지해 있었다. 낯설고 기이했다. 정지해 있으면서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물. 지소는 사물들의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뒤뚱거릴 것만 같던 사물들이 균형을 잡고 의젓한 상태가 되자 거실로 들어섰다. 노대기 씨 계세요, 라고 짐짓 크게 말했다. 그건 노대기 씨가 아니라 사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인사인 셈이었다. 

집은 단출했다. 소파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하긴 하루종일 낚시를 한다는 건 그런 걸 들여놓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관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가구들이 보였다. 원목색깔이지만 원목으로 만든 것은 아닌 옷장이 벽을 기대고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삼단 서랍장이 같은 색깔로 놓여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어느 숙박업소에 가도 있을 것 같은 하늘색 요와 이불, 베개가 한 세트처럼 개켜 있었다. 

지소는 거실로 나와 주방으로 갔다. 개수대는 물 한 방울 튄 자국 없이 말끔했고 그릇과 컵은 보송하게 마른 채 선반에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양념통의 뚜껑은 반듯하게 닫혀 있었고 주걱과 국자 등 주방기구들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모든 사물이 정직하게 용도를 드러내고 있었고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은 완벽히 정지되어 있다.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던 사람의 흔적은 모두 회수되었다. 한 가지만 빼고. 

소박한 주방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식탁이 있었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진짜 원목이었고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식탁 위에 이 리터 크기의 생수병과 유리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곳을 떠나버린 사람이 미처 거두어가지 못한 잔상. 그 사람은 이미 가버렸지만, 먹다 만 유리컵에는 가버린 그 사람이 남아있었고 유리컵을 들이키던 순간이 남아있었다. 강강술래 달 밝은 물. 생수병에는 맑은 물 대신 보리차 색깔을 띤 액체가 반쯤 담겨 있었다. 유리컵에도 같은 색깔의 액체가 남아있었다.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으면 딱 알맞을 만큼이었다. 

유리컵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시큼하면서도 싸한 알코올 냄새. 어제 밤 김을숙 씨가 딱 한잔만 마시라고 권하던 매실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매실주를 마신 뒤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에 대해 지소는 잠시 생각했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각인된 장면. 김을숙 씨의 얼굴에 비친 달빛을 홀린 듯 바라보았던 짧은 순간. 그런데 반달섬에서 매실주는 무엇일까. 처음 만난 이에게도 권할 만큼 섬사람들은 매실주를 즐겨 마시는 걸까. 지소는 누군가 마시다 만, 설마 지소를 위해 남겨 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매실주를 한번에 마셨다. 상큼하고 톡 쏘는 맛이 혀에 감기다가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적당한 농도로 잘 담근 술이었다. 그대로 빈 컵을 내려놓기 아쉬워 생수병의 술을 반 정도 따랐다. 한 모금 마시자 고단함이 밀려왔고, 한 모금을 더 마시자 출처를 알 수 없는 너그러움이 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좋다, 좋구나. 

지소는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약봉지 아래 검은색 공책이 눈에 띄었다. 고만례상회의 외상장부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지소는 공책을 잠시 바라보았다. 공책을 펴보고 싶은 마음과 이대로 이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또 싸웠다. 지소는 공책을 들었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뭐라도 해야 했다. 혹은 매실주가 지소를 과감하게 만들었는지도. 공책이 손에 닿는 순간 지소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꿈속을 얼핏 들여다보는 듯 비밀스럽고 애틋한 그런 느낌이었다.  공책을 손에 든 채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안은 적막했고 사물들은 여전히 정지해 있었다. 공책을 열었다.

글자. 한글이 분명했으나 매우 독특한 글자들이 있었다. 가로획은 굽었고 세로획은 비뚤했다. 동그라미인지 네모인지 애매했고 받침은 너무 작거나 컸다. 급하게 휘갈긴 것 같기도 하고 한 글자 꾹꾹 정성스럽게 눌러쓴 것도 같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지소는 글자들의 뜻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글자들은 읽힌다기보다 애초 품은 뜻을 발하는 듯 명료했다.      


삼월 열여드레. 야퉁계곡 십리길.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발병도 나지 않은 것이냐.

시월 초사흘. 삼태리 두물머리. 연꽃 핀 저수지 앞 판잣집. 처자가 닮았으나…. 해수양반이 놀랄 만도 하다.

오월 그믐. 돌섬 바람언덕. 바람이 거세 배가 뜨지 못해 사흘을 허비했더니 그새 간 것이냐. 원통하다 원통하다.

칠월 초닷새. 어야진 두홉마을. 너를 보았다는 사람은 저 무성한 강냉이 수염을 본 것이냐. 도대체 이 세상에 있기는 하는 것이냐.     


공책에는 날짜와 장소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공책 한 권이 전부 그랬다. 어느 날 어느 곳에 갔다 오고 난 후 적은 듯 보였다.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북쪽과 남쪽, 산과 바다, 섬과 해안, 계곡, 골짜기, 마을, 저수지. 지소는 알지 못하는 세상의 온갖 지명이 나왔다. 연도를 확인하고 나서 지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의 사십 년에 걸친 일이었다. 누군가를 찾아다닌 기록일까. 간혹 공책 한쪽을 가득 메운 긴 글도 있었다.      


굶지는 않은지, 아프지는 않은지, 어디를 가야 볼 수 있는지. 

이 세상에 없다면 꿈에서라도 일러주지. 

그럼 차라리 죽어버리기나 하지. 

이 세상에 있을 것만 같고.

그 너머 저 너머에 있을 것만 같고.

그 너머 저 너머를 가보면 엄한 사람이 나를 보고 딱하다 한다.     


몇 장을 더 넘기다 지소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반달섬에 왔다. 

내가 없는 반달섬에 네가 왔다. 

왜 나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냐. 

왜 나를 보려하지 않은 것이냐. 

이 세상에 살아있는데 왜 나에게 오지 않은 것이냐. 

나를 잊은 것이냐, 내가 싫은 것이냐.

나는 어찌 살라고 나를 보지 않은 것이냐.     

그 다음 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희 적혀 있었다.     

가만례가 죽었단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한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다들 거짓을 말하는구나.

왜들 그런 것이냐.

가만례는 살아 있는데

왜 거짓을 말하는 것이냐.


기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빼곡했던 글자들이 뚝 끊겼다. 이후 공책은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공백이었다. 아주 큰 공백. 지소는 공책을 덮었다. 삐뚤하고 애매하고 받침도 제각각인 글자들이 지소의 마음에 둥둥 떠다녔다.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는 노용희 씨였다. 그는 불이 켜진 집안을 둘러보다 지소와 눈이 마주쳤다. 지소는 그제야 이곳이 노대기 씨의 집임을, 자신은 허락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임을 깨달았다. 벌떡 일어나기도 어색해 주섬주섬했다.

“노대기 씨를 만나야 하는데 만날 수가 없어서요. 집에 계신다고 해서.”

노용희 씨는 말이 없었다. 식탁으로 다가와 공책을 바라보았다. 

“아, 이건 혹시 노대기 씨의 행방을 알 수 있을까 하고.”

납득하기 힘든 변명이라는 건 지소도 알았다. 그러나 지소가 이 공책을 만졌을 때의 기묘한 느낌에 대해 이야기한들 그가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반달섬에 일하러 왔어요. 그리고 제 일은 노대기 씨가 동의해주셔야 끝이 나고요. 할아버지 되시죠?”

지소가 물었다. 

“노인네 제정신이 아니에요. 평생 제정신일 때가 없었어요.”

노용희 씨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노용희 씨가 대리하시면 되요. 위임장 쓰시고요. 직계자손이니 가능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요? 공짜로 땅이 생겨요. 손해 보는 일 아니니 저를 믿으세요. 저는 공무원은 아니지만 정부 일을 하거든요. 지적재조사라고 들어보셨죠? 제가 이 구역 담당자예요, 아니 담당하게 되었어요. 여기 명함도 있고요.”

지소는 배낭을 뒤져 명함 지갑을 찾았다. 비타민씨,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노트와 볼펜만 손에 잡혔다. 명함 지갑을 어디 두고 왔나. 그런 지소를 모른척하며 노용희 씨가 말했다. 

“당신이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헛수고입니다. 저 노인네는 그딴 거 관심 없어요. 평생 그딴 거 관심 없었어요.”

“노용희 씨가 설득해주시면 되잖아요. 복잡한 서류는 제가 다 준비할 거고 도장만 찍으시면 돼요. 땅이 생기는 일이니 노용희 씨에게도 좋은 일이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에요. 저 노인네를 자극하지 말란 말입니다. 당신이 일을 열심히 할수록 더 힘들어질 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남자는 지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나가주었으면 합니다, 라는 의미라는 걸 지소는 이해했다. 

“부탁드려요. 저는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도와주세요.” 

지소는 꾸벅 인사를 한 뒤 현관문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와 불 꺼진 고만례상회의 평상 위에 앉았다. 주머니가 불룩했다. 명함 지갑이었다. 빌어먹을. 한 장을 꺼냈다. ㈜플래닛엑스, 기획전략본부 마케팅팀 이지소 주임. 필요할 때 손에 안 잡히니 몇 장 쓰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차라리 안 갖고 다니는 낫지. 아니, 애초 이 명함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을까? 일을 열심히 할수록 힘들어질 겁니다. 이 명함도 노용희 씨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반달섬에 와서 수수께끼 혹은 선문답 같은 말들만 듣다 보니 지소도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소의 배는 다시 끼니를 알리고 있었다. 꼬르륵 소리가 우렁찼다.       


                                                                                          *     


모든 것이 이 음식 때문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해물뚝배기탕을 보자마자 지소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날 그렇게 허기진 상태로 이 국물을 먹지만 않았어도, 된장과 고춧가루가 적당하게 들어간 국물이 펄펄 끓지만 않았어도 사흘만 가게를 봐달라는 말을 즉시 거절했을 텐데. 그런데 이 신비로운 음식은 왜 이렇게 여전히 맛있는 건가. 어떻게 조개와 새우, 낙지 등속이 처음 그대로 풍성하냔 말이다. 

식당 노인은 어쩐지 지소가 고만례상회를 보고 오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 같았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저녁밥은 여기 와서 먹소, 밥값은 김 씨가 내고 갔으니까, 라고 말했다. 김 씨? 아, 김을숙 씨. 밥값을 내줄 이는 지소에게 가게를 봐달라고 부탁을 한 김을숙 씨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사흘간의 밥값을 내주고 간 여자의 호의가 고맙다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문득 지소는 궁금해졌다. 

“어디 가신 거죠, 김을숙 씨요.”

노인은 말이 없었다. 지소의 물음을 못 들은 것인지 못들은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앞쪽 테이블에 앉아 파를 다듬고 있었다. 

“어디로 갔냐고요.”

지소가 큰 목소리로 묻고 나서야 노인이 고개를 들어 지소의 얼굴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가 잘 안 들리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따지기에 지소는 너무 피곤했다. 피곤할수록 오늘 가게를 다녀간 이들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디스아프리카 몰라를 사간 사진관 청년과 변비약을 찾듯 요플레를 달라던 노인, 순수한 기쁨으로 라면을 반기던 복순, 그리고 배를 모는 남자 노용희 씨와 낚시하던 노인, 어망 속 물고기. 이곳이 아니면 결코 만나지 않았을 이들. 그리고 백발노인.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 동굴에 아이가 있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것이 멀쩡한 정신인지 의문이었다. 그건 노인이 먹은 이백밀리미터 우유 값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뜻. 우유 값? 천원? 이천 원? 그깟 게 뭐 대수야, 아니다, 천원 이천 원짜리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겨야 되는 게 구멍가게이다.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껌값도 백번 받으면 큰돈이고 우유도 매일 마시면 큰돈이다.

“노인이 한 분 왔는데, 우유가 맛있다 그러고, 동굴에 아이가 있다고 하고, 혹 누군지 아세요.”

“…” 

“어디 사는 분인가요.” 

“왜 그리 묻소?” 

“우유값 받아야 하니까요.”

“내가 주리다.”

“왜요?”

“그냥 그런 줄 알면 되오.” 

다듬고 있는 파가 매웠던지 노인이 인상을 쓴 채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자기가 보호자도 아니면서 뭔 우윳값을. 어,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매우 닮아있지 않은가. 백발노인을 처음 봤을 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어도식당 주인의 것이었나. 

우직, 조갯살과 함께 뭔가 씹히는 느낌이 들어 먹던 것을 밥뚜껑에 뱉어냈다. 으깨진 밥알에 거무스름한 흙 같은 게 섞여 있는 것이 뻘이 제대로 씻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개에 뻘이 있어요, 해감이 덜 된 모양인데요.”

“해감은 충분히 하오, 그것 하나는 제대로 해.”

“뻘이 씹혔다고요.”

“죽어도 뻘을 안 뱉어내는 놈들이 있소, 그건 어쩔 수 없어, 복불복이지.”

말문이 막혔다. 손님이 조개에 뻘이 있다고 해도 복불복,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불복을 뽑아 든 재수 없는 사람 취급. 그런데.

“어르신이 구이순 씨죠?”

노인은 말이 없었다. 아닌가. 김을숙 씨가 사흘 후면 만나게 될 거라고 했으니 이 노인이 아닌 건가. 지소는 김을숙 씨의 말만 믿고 구이순 씨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소답지 않다. 예측 가능한 모든 일을 상상하면서 대비하는 건 지소의 오랜 습관이었다. 업무에 필요한 서류와 자료는 물론, 계산기와 필기도구,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각종 영양제, 티슈와 물티슈, 아로마오일,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우산과 비옷, 손수건과 머플러 등 어떤 상황에서 쓰일지 모를 대비책들이 필요했다. 대비하면 할수록 필요한 건 많아지고 그럴수록 지소의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완벽주의여서 피곤하다고 동료들은 한마디씩 했지만 정작 그들은 음식물이 옷에 묻거나 생리통이 찾아왔을 때, 목이 컬컬할 때 지소를 찾아왔다. 그런 지소가 구이순 씨를 만나게 될거라는 약속을 아무런 의심없이 믿고 있다. 사흘이 지나 구이순 씨를 만나지 못할 상황을 전혀 대비하지도 않고 있다니.

갑자기 노인이 일어서 조리실로 들어가 쟁반을 들고나왔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지소에게 다가와 숭늉 한 그릇을 놓았다. 주름진 노인의 손목에 팔찌가 눈에 띄었다. 염주 알처럼 생긴 작고 동그란 게 달려 있었는데 노인만큼 오래되어 보였다. 노인이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은 갔지만 매운 냄새는 남았다. 

“오십오년 쯤 되었소, 가게 말이오.”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루도 문을 닫은 적이 없소. 서랑마을에 하나뿐인 가게인데 문을 닫을 수는 없지. 다른 슈퍼를 가려면 배를 타거나 해안도로를 한참 돌아 편의점까지 가야 하오. 편의점이라는 게 보기만 번지르르하지 물건은 별로 없고 가격만 더럽게 비싸지 않수. 섬사람들에게는 그저 먼 길이고.” 

“어떻게 하루도 안 쉬죠, 가게가?”

“열다섯 사람이 왔다 갔지, 가게 보는 사람. 이제 열여섯 사람이 된 거고.”

“김을숙 씨가 쭉 계신 게 아니고요?”

“김 씨가 여기 온지 삼년 됐소. 그 이전에 배 씨라고, 그 사람은 한 오년 있었나, 그 전에는 장 씨라고 있었지. 장 씨 전에 오 씨였고. 아니, 오 씨 전에 장 씨였나.”

“뭐 그렇게 자주 바뀌어요?”

“오래 되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일하는 분이 자주 바뀌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월급은 제때 주는 거 맞아요? 누가 줘요? 주인이 누구예요? 구이순 씨가 주인인 건가요? 구이순 씨 어디 있냐고요. 어르신은 구이순 씨와 어떤 관계이길래…?”

질문이 쏟아졌다.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으니 지소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물음표였다. 노인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고약한 노인네. 배가 부르자 잠이 고팠다. 이층 양옥으로 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잠을 자자, 일단 자는 거다. 지소가 밥을 다 먹고 일어서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노인은 아무 기척도 듣지 못한 척 파를 다듬고 있었다.      


                                                                                          *     


지소는 고단했다. 어딘가 아주 먼 곳을 오랫동안 여행하다 온 것 같았다. 고만례상회를 봤고,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에게 물건을 내어주고 외상장부에 기록하거나 돈을 받았다. 그리고 노대기 씨를 찾으러 다녔다. 복잡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인데 몸과 마음은 무거웠다. 한나절 바둑을 두고 왔더니 한평생이 가버렸다는 오래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듯했다. 오십오 년이나 된 가게를 보는 사람은 그 세월만큼의 감각에 젖어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양옥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는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대리였다. 자료를 메일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지소는 자지 않아도 될 핑계를 찾았다는 듯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하대리가 보내온 메일을 확인했다. 엑셀파일 한 개와 동영상 파일 두 개가 첨부되어 있었다. 엑셀파일을 열어 데이터를 확인한 뒤 영상 파일을 열었다. 드론이 산23번지와 24번지를 공중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드론은 고도를 낮추어 근거리에서 두 필지를 스캔하다가 고도를 높여 한눈에 두 필지를 다 볼 수 있도록 촬영했다. 하대리는 영상에서 보이는 두 필지 사이의 공백 부분을 빨간 선으로 표시했고 정확한 좌표도 기록해놓았다. 지소는 좌표를 토대로 오대 오로 나눠질 토지의 경계를 계산했다. 계산 결과를 하대리가 보내온 엑셀파일의 수치와 비교한 뒤 서류에 기입했다. 내일은 이 데이터값을 토대로 실제 경계선을 그을 부분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대리는 하나의 파일을 더 첨부해놓고 있었다. ‘서비스영상_반달섬의 절경’이라는 제목이 었다. 드론을 다루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안 해도 될 일을 좋아서 하는 모양이다. 지소는 파일을 열었다. 드론이 고도를 높여가면서 촬영 범위가 넓어지고 산24번지 너머의 바다까지 화면에 잡혔다. 지소는 낮에 반달섬 지도를 훑어보아서 대충의 지형은 파악하고 있었다. 섬에는 해발 오백미터 정도의 제법 높은 산이 있고 산24번지에서 숲 쪽으로 조금만 오르면 정상이었다. 숲이 끝나는 지점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타원형의 섬이 반쪽으로 뚝 잘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끝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달을 반쯤 뚝 잘라놓은 것처럼. 그래서 반달섬. 

지도로 파악한 반달섬의 지형이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푸른 바다와 절벽, 해송이 만들어내는 절경이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했을 하대리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지고 머리가 시원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니. 

영상의 하이라이트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절벽을 따라가며 촬영한 부분이었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시점으로 지소는 풍광을 따라갔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던 화면이 갑자기 급하강하더니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다 바다 위를 날았다. 절벽을 날던 새가 바다에 떠오른 물고기를 발견하고서 쏜살같이 낚아채고 유유히 상공을 나는 듯했다. 자연이 그려내는 대서사시를 보는 듯 장엄하면서 가슴 졸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하대리의 드론 조작 솜씨는 가히 레전드급이었다. 그러다 얼핏 지소의 눈에 어떤 물체가 잡혔다. 지소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절벽 아래 뭔가 있었다. 지소의 등 뒤로 수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 이층에 누가 있다고, 이 집에는 나 혼자뿐이다. 지소는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사람이었다. 어떻게 저기에 사람이 있지. 위로는 구십 도의 절벽이었고 밑으로는 거센 파고가 이는 바다인데.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지형이 분명했다. 지소는 장면을 확대했다. 그 사람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낚시대로 보이는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설마, 노대기 씨…? 저곳에 어떻게…? 헤엄쳐서 접근한 건가. 도대체 저 노인은 뭘 하고 다니는 건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일만 한다던 에효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 죽은 사람의 일이라는 건 뭘까.

지소는 노트북 화면에 반달섬의 지도를 띄워놓고 영상에서 보이는 곳의 위치를 확인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마음은 자연스럽게 물음표를 따라갔다. 그러다 지소는 정신을 차렸다. 물음표를 따라가다 보면 불필요한 일에 연루되고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 있었다. 한가하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지소에게는 해결해야 할 업무가 있고 사흘 안에 마쳐야 했다. 노대기 씨, 저 노인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면 내일은 노용희 씨에게서 반드시 위임장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동영상 재생화면을 닫았다. 

그새 새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역시 하대리였다. 오늘 미팅 있어서 본사 사무실 갔는데 박주임 출근해 있더라고요. 윤팀장님이랑 프로젝트 결과보고서 준비하고 있던데요. 이주임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소식 공유합니다. 그럼 무사히 복귀하시길. 하대리 드림.  

지소는 노트북을 닫았다. 박주임은 어머니가 위독해서 복귀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얄팍해도  부모까지 팔아먹을 줄이야.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보고서는 참여 직원 중 성과가 가장 좋은 에이스가 맡는 게 관례였다. 회사가 수행한 과업에 멋진 포장지를 입히는 일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결과보고회의 평가가 좋으면 차후의 보상이 주어지고 회사에서의 위치도 확고해진다. 그걸 박주임이 하고 있다고 하대리는 전하고 있었다. 그것도 윤무식 팀장과 함께. 반달섬의 골치 아픈 조사를 지소에게 떠맡기고 말이다. 개새끼. 생각보다 더 쓰레기다. 윤팀장도 마찬가지. 지소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안돼, 한번 당하지 두 번 당하지는 않는다. 

박주임과 지소는 작년에 채용된 계약직 직원이었고 끈끈한 것까지는 아니어도 동료로 잘 지내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입사하자마자 마케팅팀에 소속되어 차장의 지휘로 회사의 브랜드메이킹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석달 동안 시장조사와 분석, 경쟁업체와의 차별화전략을 정리해서 최종보고서를 발표하도록 되어 있었다. 지소는 거의 매일 시장조사차 출장을 다녔고 사무실에 복귀해서 분석내용을 차트로 만들고 결론을 쓰느라 밤 열두 시 이전에 퇴근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박주임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두 사람은 짜장면을 시켜먹고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잠과 싸웠으며 서로의 격무를 응원했다. 지소가 보기에도 꽤나 괜찮은 보고서가 두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발표는 마케팅 팀장이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략본부장까지 배석하는 큰 회의라 팀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발표자료가 스크린에 띄어지고 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첫 페이지를 본 순간 지소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고서의 작성자는 총괄에 팀장, 실무책임에 차장, 그리고 자료조사에 박주임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었다. 지소는 박주임을 바라보았다. 박주임은 정면을 응시한 채 지소를 외면했다. 팀장의 설명이 시작되었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으며 박수와 치하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열띤 환호 속에서 지소는 보았다. 온통 검은색의 머리, 지독히 검은 불길한 머리들. 거기 모인 이들 중 지소가 이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지소는 철저히 없는 사람이었다. 지소의 가슴에서 뭔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은 그 순간의 박수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이 칠층인지 구층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와 대로변에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지소는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각 박주임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최종 정리한 파일을 헷갈려 다른 파일이 띄어졌다, 고의가 아니었고 실수였다, 미안하다. 실수였다고? 개자식, 이라고 그때도 지소는 욕을 했다. 이번에는 가만두지 않겠어. 그때는 뭘 어떻게 해볼 용기가 없었지. 이번에는 다를 거야, 기다려라 박주임.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해도 특별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밤 지소는 검은 바위 위에서 박주임을 물에 빠뜨리고 물 위로 올라오려는 그의 머리를 발로 밟아주는 꿈을 꾸었다. 발에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쥐가 나 잠을 깰 정도였다. 깨고 나니 일단은 좀 시원했으나 본격적인 복수의 방법은 일을 마무리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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