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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시선

바람은 잔잔했고 바다는 얌전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까지 경쾌한 것이 어제와 사뭇 다른 날 같았다. 다른 날이다, 같은 날은 없다. 그래도 이렇게 색감과 질감까지 하루 사이 완벽히 달라지는 날이 자주 있지는 않을 것이다. 고만례상회를 가려면 이층 양옥에서 언덕길을 내려와 선착장을 지나쳐야 했다. 고작 두 번째 가는 길인데 어제와는 천지차이. 길이란 게 참 신기하다. 단 한번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익숙해진다. 

선착장 바위 위에 노대기 씨는 없었다. 지소는 이어도식당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이들의 속을 데워주기 위해 새벽부터 문을 연다고 들었다. 그러나 오늘 이어도식당은 휴업이었다. 오늘은 쉽니다, 라고 문 앞에 붙인 종이가 바람에 날려 퍼덕거렸다. 지소는 서운했다. 뜨거운 국물은 먹을 수 없게 되니 더욱 간절했다. 다른 음식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가게에 가서 카스테라를 먹자, 하고서 지소는 고만례상회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자 비린내가 진동했다. 지소는 물고기를 떠올렸다. 깜빡 잊고 있었다. 쪽방 한켠 어망 속에 잠겨있는 물고기 비늘은 검은색이 짙어져 있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물고기가 퍼덕거렸다. 저걸 어쩐다. 검게 변해가는 저 생물체를 먹을 수도 없고. 

“몰라 줘요, 몰라 알죠?” 

첫 손님은 역시 청년이었다. 어제와 같은 청바지에 점퍼차림이었고 목에 카메라를 건 대신 가방을 매고 있었다. 몰라 알아요, 대답하면서 지소는 무슨 이런 해괴한 조합이 있나 싶었다. 

“오늘은 사과향이 걸렸어요. 괜히 숲으로 가고 싶어지더라고요. 대박.”

“이렇게 일찍요? 뭘 찍었는데요?”

“직접 봐야 해요.”

청년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액정화면을 보더니 하나를 골라 지소에게 내밀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의 안개 낀 숲속이었다. 무덤처럼 보이는 둔덕들이 몇 개 보이고 그 사이로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아주 크고 늠름한 진돗개였다. 소나무와 무덤들 사이로 무언가를 바라보듯 옆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개는 신성한 전령사 같았다. 새벽에 깨어있는 이들만이 알고 있는 어떤 비밀을 간직한 채 안개처럼 스며들 듯 조용히 움직이는 고귀한 생물체. 

“워리에요.”

“네?”

“이 녀석 이름이 워리라고요. 반월의 월, 부르다 보니 워리. 서랑마을 전체가 키웁니다. 말하자면 모두의 개.”

“주인이 없고요?”

“이 녀석이 아마 사대손이나 오대손 쯤 될 거예요. 어미나 새끼나 이름이 다 워리였습니다. 원조 어미가 큰일을 했던 개죠. 반달산 중턱에 샘골이라고 있는데 거기에서 아주 중요한 걸 발견해냈거든요.”

“뭘요?”

“유골이요. 스물여덟 구의 유골을 발견했어요. 워리는 숲이고 바다고 온갖 데를 다 다녀요. 비가 세차게 온 다음날 워리가 샘골 근처를 맴돌더래요. 어르신 몇 분이 고사리 끊느라 숲에 갔다가 봤대요. 몇 번 불렀는데 오지도 않고요. 누구든 워리야, 하면 번개처럼 달려와 반기는 녀석인데 그날은 이상했다 합니다. 음푹 파인 계곡 근처를 빙빙 돌면서 낑낑대고 급기야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죠. 가보니 글쎄 사람 팔뚝 뼈가 땅 위로 올라와 있었다고.”

“스물여덟 구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말하자면 길어요. 반달섬에는 슬픈 역사가 있어요.”

청년이 담배갑을 열었다. 

“이번엔 뭐가 걸리려나. 몰라요 몰라.”

“무슨 향이 날지 기대되나요, 랜덤이라니 제비뽑기하는 느낌인가요.”

“제비뽑기까지는 아닌데, 뭐 그냥 소박한 궁금증입니다. 모두 좋은 향이니까 사실 뭐가 걸려도 괜찮은데 무작위의 결과가 재미있잖아요. 아, 사진관 놀러 오세요.” 

청년이 나갔다. 다섯 가지 향을 랜덤으로 고르는 게 정말 재미있는 걸까. 랜덤, 무작위, 그런 단어는 지소에게 낯설었다. 함께 취업 준비를 하던 동기들의 얇은 지갑을 천원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열어젖힌 그 흔한 인형뽑기도 지소는 해본 적 없었다. 뭐든 노력보다 운에 좌지우지되는 게 싫었고 노력으로 안 되는 건 지소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깟 인형이 뭐라고, 잡힐 듯 빠져나가 버리는 마지막 순간의 낭패가 더 큰 집착을 불러오는 것을 지소는 지켜보기만 했다. 천원의 행복이 이천원 삼천원 만원의 허탈감으로 변하는 데는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루치 밥값을 인형뽑기에 소진해버려 저녁을 굶어야 하는 동기들에게 컵라면을 사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배고프면 공부가 안된다는 걸 취준생들 모두 잘 알았지만, 집게에 걸린 인형이 결승전에 도달하기 바로 직전 빠져나가 버릴 때면 허기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몰라 담배는 인형뽑기보다 나은 건가. 꽝은 없고 뭐가 걸리든 모두 좋은 향이다, 뭐가 걸려도 괜찮다는 건, 정말 괜찮은 거다. 지소는 유리창으로 청년의 뒷모습을 슬쩍 쳐다보면서 꽝이 없는 순진무구한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한가하게 이럴 때가 아니다. 일을 해야 한다. 박주임을 생각하면 가게고 뭐고 다 팽개치고 본사로 올라가 그 자식의 멱살을 잡고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지소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일단 일을 마무리한다, 멋지게 마무리하고 나서 박주임을 한방 먹인다. 어떻게? 그건 우선 이곳의 공백을 해소하고 난 다음 생각한다. 그게 지소가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지소는 산23번지와 24번지를 공평하게 나눌 경계예측선을 긋기로 했다. 하대리가 보내온 데이터를 토대로 실제 지형을 고려하여 공백의 토지를 양쪽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미리 작업해두면 구이순 씨와 노대기 씨를 만났을 때 조정이 쉬워질 것이다. 에효노인이 요플레와 빨래비누를 사간 뒤 지소는 배낭을 챙기고 가게를 나왔다.  

계단 위부터 파란대문까지 지형을 살펴보니 공백이 난 땅을 자로 재듯 반으로 나누는 건 가능하지도 최선이지도 않았다. 경계 조정은 구조물과 지형, 그리고 이용자들의 동선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이다. 다행히 산23번지와 24번지 사이의 공백 안에 분할하기 어려운 구조물이나 지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계단 위쪽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 생각보다 굴곡이 심해 그 크기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공평한 분할의 관건이 될 것 같았다. 지소는 하대리가 측정한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평수를 계산해나갔다. 그렇게 계단에 올라 파란대문에 이르렀다. 파란대문을 지나자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왼편은 숲으로 이어지는 공터였고 오른편은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하대리가 드론으로 촬영한 주상절리가 펼쳐진 곳이 오른편 그 너머인 것 같았다. 공백은 두 갈래로 갈라지기 직전에 끝이 났다. 지소는 공백의 끝부분까지 계산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때 어디선가 수상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쩐지 익숙하기도 했다. 짠내 나는 바닷바람은 아니었고 흙냄새를 품고 있는 축축한 바람이었다. 지소는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오는지 둘러보았다. 왼편 숲으로 이어지는 공터에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작은 길이 나 있었는데 아마도 반달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반달산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무성했다. 바람이 부는지 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렸지만 지소의 피부에 닿는 바람은 산에서 불어오는 것과 달랐다. 그건 불어온다기보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듯 은밀하고 조심스러웠다. 

지소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 걷다 이내 길을 비켜났다. 허물어가는 무덤처럼 보이는 풀무더기가 보였다.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갔다. 웃자란 풀을 헤쳐나가며 지소에게 닿고 있는 바람의 감촉을 따라갔다. 갑자기 풀무더기 사이로 벙 뚫린 구멍이 보였다. 랜덤처럼, 무작위처럼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마치 이 세계에 난 큰 공백처럼, 비어있는 페이지처럼 그렇게. 이게 뭘까. 이런 게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지소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소는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땅 아래로 내려가다 옆으로 뚫린 듯해 보였다. 높이는 지소의 키보다 약간 낮았고 폭은 겨우 한 사람이 오고갈 정도였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 줄줄 새어나가는 것이 있다면 이곳으로 흘러들어갈 것 같은 그런 구멍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무언가 흘러들어가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그곳으로부터 무언가 새어나오기도 했다. 고요함과 냉한 기운, 그리고 고립된 침묵, 수상한 바람. 

동굴이다. 복순이 그린 동굴이다. 뺨에 닿는 서늘한 공기의 감촉과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낯선 냄새 너머로 언뜻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섬뜩한 기분이 들어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지소의 발은 어느새 입구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지소의 몸은 그대로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지소는 뭔가에 홀렸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급히 휴대폰을 받았다. 윤팀장이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 어제 저녁 업무보고는 왜 건너뛴 거야?”

“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정신이 없어서.”

“토지 소유주들은 만났어?”

“그게요. 한 분은 만났고 한 분은 내일쯤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지소는 확신할 수 없었다. 노대기 씨를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지, 구이순 씨를 내일이면 만날 수 있긴 한 건지, 확실한 건 없었다. 뭔가를 하긴 했는데 무엇을 했는지 헷갈렸다. 일을 열심히 할수록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노용희 씨의 말이 떠올랐다.   

“같습니다는 또 뭐야? 진행이 왜 그렇게 더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회사라는 건 말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과를 내는 사람이 필요해. 이주임 아직도 그걸 모르나?”

순간 지소는 말문이 막혔다. 모릅니다, 아니 그건 압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고 성과도…”

“내일이야, 내일까지 꼭 종결짓도록 해. 빨리 마무리하라는 본부장님 지시야. 최종보고서도 거의 완성되어 가니까 서두르라고. 회사의 신뢰가 걸린 문제라는 거 기억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돼.”

“알겠습니다. 근데 팀장님, 박주임은 복귀, 했나요?”

“뭐? 아, 위급한 상황은 넘긴 모양이야. 왜?”

“최종보고서를 박주임과 쓰고 계신가 해서요.”

“본사에 인력이 누가 있어? 이주임은 현장에 있고 다른 직원들도 데이터 정리하고 보고서 고도화하느라 바빠. 그나마 박주임이 지난번에 프로젝트 최종보고서를 써봐서 다행이지.”

“급한 상황을 넘겼으면 여기 현장으로 오는 게 맞는 게 아닌가요. 원래 박주임이 맡은 구역 일입니다. 담당자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태도를…”

“이봐, 이주임. 지금 이 와중에 내 구역 네 구역이 어디 있어? 다 회사 일이잖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이주임이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게 그게 우선이라고. 알아들어? 내일이야, 내일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해야 해.”

팀장은 전화를 끊었다. 어제 지소에게 일을 떠맡길 때의 독려와 립서비스는 없었다. 지소는 불쾌했다. 열심히 해야 성과도 나는 거지, 그게 어떻게 다른가? 니 구역 내 구역이 따로 있냐고? 불리할 때 일단 퉁치고 보는 게 얄팍한 인간들의 수법인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박주임 싸고돌다 뒤통수 맞고 나서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어, 윤무식 팀장. 지소는 배낭에서 텀블러를 꺼냈다. 마실 물이 없었다. 배낭을 등에 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산23번지와 24번지의 일을 해결해야겠다는 오기가 솟아올랐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윤팀장은 역시 유능한 상사임에 틀림없다. 지소는 고만례상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에서 불어오는 수상한 바람은 이미 사라졌다.  

    

                                                                                    *

     

고만례상회 평상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작지만 야무진 몸을 하고 있었다. 

“냉동고가 잠겨 있어요.”

아이가 말했다. 

“뭐?”

“아이스크림 냉동고요.”

아이가 가리키는 건 밖에 비치되어 있는 아이스크림 쇼케이스였다. 

“이걸 잠가놓고 가게를 비우면 어떡해요.”

“어, 그것도 자물쇠로 잠그는 거였구나. 내가 잠근 게 아냐, 잠근 걸 풀지 않았을 뿐이지.”

“그게 그거 아녜요?”

지소는 김을숙 씨가 건네준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가게 문을 열 때 쓴 거 빼고 남은 두 개를 차례로 밀어넣어 자물쇠를 열었다. 아이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냉동고 문을 열고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렸다.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캔디 구슬 없어요.”

아이는 망고 아이스바를 꺼내 입에 물고 평상에 앉았다. 지소가 말했다.

“김을숙 씨 오면 갖다 놓으라고 할게.”

“을숙 아주머니요? 안 와요.”

아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뭐?”

“을숙 아주머니는 갔어요.” 

“갔어? 어디로?” 

“몰라요.” 

“아니야,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사흘만 가게를 봐달라고 했어.”

지소는 김을숙 씨의 큰 짐가방을 떠올렸다. 사흘간의 외출치고는 크다 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사흘이라도 볼일이 많으면 가방은 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닐걸요.” 

“뭐가 아냐? 그럼 고만례상회는 누가 봐?”

“화났어요?”

아이가 아이스크림 묻은 입술을 쌜쭉거렸다. 지소는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동네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알아듣지 못할 말만 하는구나. 아이를 붙잡고 얼토당토 않은 말로 힘 빼기 싫어 이렇게 물었다.

“저 위에 동굴 알아?”

아이가 아이스바를 핥다가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면 안돼요.”

“왜?”

“함부로 들어갔다가 큰일 나요.”

아이가 주변을 살피더니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동굴 안에 들어가면 안돼요. 앞에서 시끄럽게 해도 안돼요. 뭔가 소중한 게 있대요. 그 안에. 그래서 조용히 지켜져야 한대요.”

“지켜져야 한다고? 누가 그래?”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었어요. 동굴 앞에서 놀다가 혼났고요. 옛날에 동굴에 들어간 사람이 죽을 뻔했대요. 아니, 죽었대요. 아니, 미쳤대요.”

“죽었다는 거야, 미쳤다는 거야?”

“둘 다일걸요. 근데요, 동굴이 가끔 허락한대요.”

“뭘?”

“동굴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요. 동굴이 신호를 보낸대요. 그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요. 그 사람은 들어가도 된대요.”

“그런 사람이 있었어?”

“그럴걸요.”

듣고 보니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설화 같았다. 소를 닮은 뒷산이나 부처 모양을 한 바위, 번개 맞고도 살아난 나무에 살고있는 구렁이,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여인의 무덤에서 피어난 수선화, 옛날 옛적에, 라고 시작하는 오래된 이야기.   

“아이스크림 천원이야.”

“비밀 말해줬는데 돈 내요? 참 제 이름은 김준희예요. 서랑초등학교 다니구요.”

“오늘만 공짜로 해줄게, 준희. 근데 정말 을숙 아주머니 안 와?”

“갔어요, 말도 없이. 춘영 아주머니도 그랬어요. 배춘영 씨요. 친절하고 잘해줬어요.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가버려서 마음이 아팠어요. 아, 내일 와요. 교회에서 바자회 해요.” 

아이는 춘영 아주머니라는 사람을 매우 좋아하는 듯했다. 그렇다 해도 마음이 아프다는 뜻을 아이가 알고 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뭘 해도 가슴이 벙 뚫린 것 같은, 한 번만 다시 그 얼굴을 어루만졌으면 좋겠다는 그리움으로 밤을 새우는, 그 사람이 사라져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그런 걸 준희가 알까. 책가방을 짊어지고 골목길을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소는 그런 생각을 했다.

가게 안의 매대에서 카스테라를 집어들고 믹스커피를 타서 쪽방으로 들어섰다. 깜짝이야. 백발노인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렸다. 나는 우유가 참 맛나다. 지소를 보자 노인이 말했다. 지소는 노인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매번 지소의 눈에 띄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기이했다. 파란대문까지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어온 것일까. 물고기의 비늘은 더욱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저 물고기를 어쩐다. 지소는 냉장고로 가 우유를 꺼내고 입구를 열어 빨대를 꽂은 다음 노인에게 건넸다. 

“어디 사세요?”

“저기.”

노인은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아니잖아요.”

“거기 맞아.”

“누구랑 살아요?”

“동굴 가봤어?”

“어떻게 아세요?”

“아이 봤어?”

“할머니, 우유가 팔백 원인데 어제 거랑 오늘 거 천육백원 주셔야 돼요.”

“그렇게 비싸? 삼십 원 아니었어? 이십 더하기 오백 더하기 천, 나는 셈을 참 잘한다.”

“돈 있으세요?”

“내가 돈이 어디 있어?”

“그럼 누구한테 돈 받아요?” 

나는 점방 여는 게 꿈이다, 대뜸 노인이 말했다. 노인은 치매를 앓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노인이 가게를 계속 찾아온다면 그때마다 우유를 내주어야 하나. 까짓거, 내일 하루 남았는데 우유 세 갯값 이천사백 원 내가 내고 만다….

“나는 셈을 참 잘한다, 셈 하는 게 좋다.”

노인이 말했다. 

“집으로 가세요, 해지면 쌀쌀해요.” 

지소가 말해도 노인은 빨대로 우유를 빨면서 나는 셈 하는 게 좋다, 라고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노인이 큰 소리를 냈다. 공판장 같은 데서 경매를 진행하는 사람의 목소리만큼이나 크고 우렁찼다. 사십 더하기 육십칠 빼기 구, 칠백육십 더하기 오십구 더하기 십, 이천사백오십 더하기 팔백삼십. 지소는 깜짝 놀랐다. 이십 더하기 육 빼기 팔, 칠십 더하기 사백이 더하기 천삼십삼. 이 노인 정말 미친 건가, 119를 불러야 하나 싶을 때, 노인은 다시 보통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백단위 천단위 넘어가도 잘한다, 셈을 잘한다. 

지소는 머리가 아팠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노인과의 대화도 그렇고 소파 아래에서 쉬지 않고 까닥거리는 다리를 보고 있자니 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지소는 일어서 쪽방을 나왔다. 어쩌자고 노인은 다른 곳이 아닌 고만례상회로 와서 우유를 달라고 하는 것인지, 가족들은 뭐하느라 정신 나간 노인이 집 밖을 돌아다녀도 찾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가게를 보는 건 딴 게 아니라 이런 게 힘들구나. 

그건 그렇고. 어제 하대리가 보내온 영상이 내내 지소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노대기 씨를 만나러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노인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안개가 낀 것처럼 부연 머릿속을 시원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지소는 망설이다가 노용희 씨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배를 타야 할 일이 있을 때 연락하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했으면 싶었다. 게다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일이었으니까. 전화를 받는 노용희 씨는 무뚝뚝했다. 지소의 말을 듣더니 삼십분 후에 선착장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동행이 있는데 괜찮겠냐고 노용희 씨가 물었고 지소는 상관없다고 했다. 지소는 배낭 속에 노트북을 집어넣었다. 가게 문을 잠글까 잠시 고민하다 쪽방의 노인을 생각해 그냥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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