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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동굴

선착장에 통통배가 있었다. 노용희 씨는 지소 쪽을 힐끔 바라만 볼 뿐 아는 척하지 않았다. 배에는 사진관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지소를 보자 손을 흔들었다. 푸른 하늘처럼 해맑은 청년을 보자 노용희 씨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 그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한배를 탔다. 

배가 선착장을 떠났다. 청년은 카메라를 들고 바다 저 너머의 풍경을 여러장 찍었다. 지소가 바라보자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본명은 서현준. 이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타지에서 공부하고 이것저것 해보다가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부모님이 계시는 섬에 다시 들어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상태. 반달섬의 자연과 사람들을 찍다보니 자기가 고향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 날 때마다 섬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은 용희 씨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현준 씨는 배를 모는 남자를 용희형, 이라고 불렀는데 노용희 씨는 현준의 말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을 했다. 

지소도 그들에게 약간의 정보를 주었다. 먼 도시에서 살며 원래는 마케팅업무를 하다가 지적재조사 사업에 차출되어 장기 출장 중이고, 내일모레면 업무를 끝내고 떠날 것이라는 것 정도. 현준 씨가 뭐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용희 씨는 지소 쪽을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너른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배를 타고 함께 어디론가 간다는 건 묘한 동지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한 배를 탄다. 이 표현이 생사를 함께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건 참 적절하다고 지소는 생각했다. 이 배가 뒤집어진다면 모두의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고 한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모두가 그러한 상황이었다. 

“주상절리 쪽으로 가신다고요? 무슨 일로?”

현준 씨가 물었다. 지소는 어제 영상에서 노대기 씨가 거기 있는 것을 보았다고 답했다. 자신은 노대기 씨를 꼭 만나야 하며 경계 조정에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용희 씨는 앞만 보고 배를 몰고 있었다. 

“해안동굴이 있는 데잖아, 그치 형?”

용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이요? 가봤어요?”

“저는 안 가봤는데 형은 가봤을 거예요. 형은 이 근처 섬이며 바다며 모르는 데가 없거든요. 낮이고 밤이고 카누를 타고 여기저기 다녀요. 여기도 아마 수십 번은 와봤을 걸요.”

“카누요? 그 손바닥만한 배요?”

“카누 만드는 기술자예요, 용희 형.”

“공무원이라고…”

“아, 시에서 카누체험장을 열었는데 거기서 당분간 일하는 거예요.”

용희 씨 대신 현준 씨가 답했다. 

“노대기 씨는 거길 왜 간 건가요?”

현준 씨가 뭐라 말하려다 용희 씨를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현준 씨의 머리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지소의 질문을 갈매기가 낚아채버린 것 같았다. 배가 파도와 부딪치며 철썩, 물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손으로 닦아냈는데 몹시 짰다. 지소가 궁금한 건 또 있었다. 

“물고기를 왜 가져다주시는 거예요?”

“아, 용희 형 할아버지요?”

“저는 생선을 싫어해요. 살아있던 시절이 느껴져서.”

용희 씨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살아있게 놔줘요.”

“물고기요?”

“물고기요.”

“그래도 되요? 애써 잡은 것 같던데.”

“애써 잡았다고 꼭 먹어야 되는 건 아닙니다.”

“안 먹을 거면 왜 잡아요?”

용희 씨가 다시 입을 닫았다. 지소는 노인을 떠올렸다. 낚시대를 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노인은 먹기 위해, 혹은 먹이기 위해, 물고기를 낚는 게 분명해 보였다. 

통통거리는 소리가 약해지더니 배가 해안절벽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푸른 하늘과 초록의 산, 깎아지른 절벽이 마치 선물이라는 듯 눈앞에 펼쳐졌다. 절벽에 부딪힌 물살들이 하얀 포말이 되어 둥둥 떠다녔고 바닷물은 일어섰다 부딪치고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바다는 초록색에서 하얀 거품으로 변했고 다시 초록으로 돌아갔다. 드론 영상에서 본 것보다 아름다웠고 바람과 파도소리가 더해지니 경이로웠다. 절벽은 굳건하고 바다는 울렁거렸으며 배는 들떴다. 현준 씨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고 덩달아 지소의 몸도 들썩였다. 

갑자기 아, 하는 신음이 지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바다로 비죽 튀어나와 있는 절벽을 휘돌자 커다란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을 보자마자 지소는 어깨가 움츠려들고 몸이 말아 들어갔다. 동굴이 크고 무서워서라기보다 마치 소풍을 깽판 치러 나타난 불한당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동굴은 자연이 아니라 인공의 결과물이었다. 인공적이라고 해서 다 흉물은 아니겠지만 눈앞의 동굴은 산과 바다, 주상설리의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풍경 속에 끼어든 부자연의 극치였다. 

동굴 입구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밀려 들어갔다 밀려 나왔다. 배를 타고 들어갈 수는 있으나 넘실대는 바닷물을 보니 수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용희 씨가 평소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들어갈게요.”

“잠깐만요.”

지소가 소리쳤다. 

“이런 곳에 노대기 씨가 있을까요?” 

노용희 씨가 지소를 바라보았다. 그 눈이 물고기 같다고 지소는 생각했다. 

“가보면 알겠죠.”

지소가 망설이는 사이 통통배는 파도와 포말을 뚫고 동굴로 들어섰다. 동굴 폭은 배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고 높이는 사람 키보다 훨씬 높았다. 벽은 군데군데 세로 주름이 나 있었다. 천장은 대체로 울퉁불퉁했고 뚝 끊긴 고드름처럼 뭉툭한 부분도 있었다. 배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요란하게 들썩이던 물살도 잠잠해졌다. 고요함과 냉한 기운, 달구어진 호흡을 가라앉히는 고립된 침묵. 바깥세상의 것과 아주 이질적인 공기가 몸으로 스며들었고 으슬으슬 추웠다. 

벽의 주름을 타고 흐르는 석간수를 바라보며 지소는 중얼거렸다. 눈물 같다, 동굴이 우는 것 같다. 혼잣말이 동굴 벽을 타고 흐르다가 되돌아왔다. 지소는 조금 놀라서 말을 멈추었다. 이미 지소의 목소리가 아닌 소리가 꼬리의 꼬리를 물며 물살을 따라 퍼져나갔다. 소리의 꼬리가 사라진 뒤에 더욱 짙은 침묵이 밀려왔다. 순간 동굴의 정적 속에서 심장 박동소리만 들렸다. 지소는 그 소리를 배에 탄 두 사람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듣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언뜻 맞은편에서 검은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섬뜩한 기분이 들어 동굴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현준 씨가 말했다. 

“이 동굴을 사람 손으로 뚫었다는 거잖아. 그렇지, 형?”

“곡갱이로 뚫었지.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고. 태평양 전쟁 말기 연합군이 대규모 공습을 계획했고 그걸 알아챈 일본은 이렇게 굴을 파서 공습에 대비했다고 알고 있어. 이곳에 신요라는 배를 대고 자살특공대들을 훈련시켰다고 해.”

“자살특공대, 카미카제요?”

지소가 놀라 물었다. 용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하면 뭔가 낭만적인 느낌이잖아요. 인류 최초 예술가들이 그려놓은 황소나 고래 그림 같은 걸 상상하게 되고요. 근데 카미카제용 배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다니, 부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었군요.”

동굴은 화산 폭발이나 지진 같은 지구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지소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그려지곤 했다. 태초의 비밀을 간직하고 인간의 눈에는 여간해서 발각되지 않아야 하는 곳이거나, 알타미라 동굴처럼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살았던 조상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경이로운 곳과 같은 이미지 말이다. 그런데 이곳은 자연적으로 생성되지도 않았고 신비로운 곳도 아니었다. 섬뜩한 의도가 만들어낸 불한당 같은 곳.

동굴 중간부터 돌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용희 씨가 배에서 내려 줄로 고정했다. 나머지 두 사람도 배에서 내렸다. 앞선 용희 씨가 랜턴을 켜고 바닥을 비추며 나아갔다.   

“반달섬에 이런 동굴이 최소 열 개 정도 있어요. 해안가에 일곱 개 정도 있고 섬 가운데도 있고. 형체가 제법 보존된 것도 있고 조금씩 무너져 내려 반대편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버린 것도 있고요. 아예 입구가 다 막혀버려 찾을 수 없는 것도 있을 겁니다.”

“형, 우리 어렸을 때 뻘삼촌 따라 저쪽 해안에 있는 동굴에 가본 적 있잖아. 그때 물고기 말린 게 엄청 많았어.”

“어민들이 어류를 저장하거나 작업 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하기도 했으니까. 한국전쟁 때는 대피소로 쓰이기도 했다는데 이제는 아는 이가 별로 없지.”

용희 씨의 설명에 현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소는 궁금했다. 

“왜 반달섬이어야 했을까요?”

“전략기지였으니까요. 이 지역은 면과 소금, 쌀 생산의 최적지였고 대규모 항구가 가까이에 있으니 강탈하기도 쉬웠을 거고요.”

현준 씨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말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알면 알수록 슬픈 역사가 있어요. 자연이 우연하게 반달 모양으로 빚어놨을 뿐인데 전략적 요충지 어쩌고 하면서 전쟁 기지로 쓰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부리고요.”

동굴 벽의 주름을 만지면서 지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의 주름이 아름다운 반달섬이 겪어온 슬픈 시간처럼 느껴졌다. 용희 씨가 손전등을 찾아 켜고 벽의 주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곡갱이 자국이에요, 이게.”

“후벼 판 자국이네요. 삽과 곡갱이로만 이 동굴을 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맨몸으로 손도구만을 써서 이 단단한 암석을 뚫고 땅속으로 나갔다는 거잖아요.”

현준 씨가 지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 열네 시간씩 굴을 팠다고 합니다. 허기와 노동, 몽둥이질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도 해요. 그때 강제 노역했던 몇 분이 우리 섬에 살아 계셔요. 제가 작년에 그분들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했죠. 저도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런 일이 우리 반달섬에서 일어났다는 걸 모르고 자랐거든요. 몇십 년이 흘렀어도 그 시간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마치 어제 일처럼요.”

“그걸 다시 기억해내는 것도 괴로운 일일 것 같아요.”

지소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동굴 벽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현준 씨가 말했다. 

“그렇죠. 그래도 기억하고 말해야 해요. 그 세월을 살아내고도 목소리 한번 못 내고 위로 한마디 듣지 못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곁에서 묵묵히 살고 계실지도 몰라요. 저는 그게 마음이 아파요. 그런 일을 겪고도 어느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위로 받지 못한다는 게. 우리 할머니는 그저 서러운 운명이야, 라고 말씀하시는데, 태어날 때부터 서러운 운명이란 건 없잖아요.”

지소는 어둠 속에서 곡갱이 하나로 굴을 팠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하루를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삶을 버텨낸 곳이네요, 이곳은.”

“버텨냈죠, 살아냈고요. 그래서 생존자이고요.”

“노대기 씨도 그 중 한 분이신가요?”

용희 씨가 굳은 표정으로 동굴의 저쪽을 바라보았다. 현준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소는 알 듯 말 듯 했다. 

동굴은 생각보다 길게 뻗어있었다. 돌바닥을 지나자 단단하게 굳은 흙바닥이 드러났다. 동굴은 위쪽으로 향해 있는 듯 경사가 졌고 소금기가 조금 가신 선선한 공기가 지소의 얼굴에 닿았다. 얼마동안 걸었을까. 앞서 걷던 현준 씨가 말했다.

“형, 삼거리야. 지하에 이렇게 삼거리를 만들어놓다니 생각보다 복잡하네.”

한 갈래로 쭉 이어지던 동굴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왼쪽은 막혀 있어. 오른으로 가.”

용희 씨가 말했다. 오른쪽 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았을 때 환한 빛이 쏟아졌다. 동굴의 반대편 입구인 것 같았다. 지소는 안심했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넓은 공터가 보였다. 동굴은 공터의 풀무더기 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어제 와봤던 곳이다. 동굴이 여기로 이어져 있다니. 저 아래 깎아지른 주상절리에서 시작해 숲을 지나 파란대문 바로 옆까지 지하로 길이 있었다. 땅 밑에 어떤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는지 땅 위의 사람들은 알까.  

“다시 내려가죠.”

현준 씨가 말했다.    

“다시요?”

지소가 물었다. 

“아까 삼거리 왼쪽 길을 가봐야지요.”

“그 길은 막혀있다고 했잖아요. 꼭 그럴 필요가…”

“저도 배를 타고 가야 하니 어차피 내려가야 합니다.”

용희 씨가 말하고서 동굴로 들어섰다. 현준 씨가 뒤를 따랐다. 지소는 잠깐 망설이다 현준 씨 뒤를 따랐다. 일행이 가보지 않은 길은 폭이 좁았고 천장도 낮았으며 바닥도 울퉁불퉁했다. 조심하세요, 라고 현준 씨가 말했다. 동굴 폭이 갑자기 좁아지고 천장이 기울어진 듯 머리 쪽에 가까워졌다. 벽과 천장에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을 들었을 때 지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굴은 턱, 막혀 있었다. 거대한 뭔가가 동굴을 뚝 잘라 먹어치운 듯 그렇게 갑작스러웠다. 막다른 곳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소는 생각했다. 이제 귀에서 귀뚜라미가 윙윙거리며 울기 시작할 것이다. 그에 호응하면서 심장은 가열 차게 펌프질을 할 것이고 손발은 저릿해지면서 눈 한번 깜빡이면 와르르 깨져버릴 것처럼 몸 전체가 얼어붙을 것이다. 동굴 전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나를 밀어내겠지, 이곳 전체가 부풀어 올라 나를 압박하고, 그럴수록 부질없이 심장의 펌프질은 더욱 가열 차지고…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까딱하지도 발걸음을 옮기지도 못한 채 그 압력을 견디다가, 이내 쪼그라들고 끝내 튕겨져 나갈 것이다… 출구 없는 곳에 이르렀을 때의 익숙한 느낌, 이번만은 아닐 것이라 고개를 저었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피해갈 수 없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곤 했던 그 익숙한 고통,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고 있는 것을 견디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것을, 지소는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리던 것은 오지 않고 생존자, 라는 현준 씨의 말만 귓가에 생생했다. 괜찮아진, 건가? 숨이 가빠오기만 할 뿐 숨이 멎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지소는 크고 깊게 숨을 쉬었다. 냉한 기운과 젖은 점퍼 때문에 지소의 몸이 떨려왔다. 그때 현준 씨가 말했다. 

“형, 여기 봐.”

현준 씨가 동굴 막다른 벽의 왼편을 가리켰다. 벽 사이로 족제비 정도가 지나다닐만한 공간이 나 있었다.

“흙이 쏟아져 내렸나봐. 막히기 전에는 어디까지 통했을까?”

“글세. 아마도 숲 쪽이지 않을까 싶어. 정확히는 측정을 해봐야겠지만.”

“어, 이거 봐.”

현준 씨가 천정을 가리켰다.

“이거 글씨 맞지? 누가 글씨를 새겨놓은 것 같은데.”

용희 씨가 랜턴을 비추었다. 지소는 현준 씨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글자인 것 같죠? 이건 가, 다음 건 레?”

지소가 글자를 보고 말했다.

“현준 씨, 가운데 이것도 글자 같아요.”

“아?”

“가, 아, 례?”

“마인가? 가, 마, 례?”

가만례! 라고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뒤이어 고만례, 라고 두 사람이 또다시 소리쳤다. 이내 소리가 퍼지면서 웅웅 하고 꼬리를 만들며 퍼져나갔다.

“이게 왜 여기 적혀 있지? 누가 쓴 걸까?”

“고만례상회가 원래 가만례상회였을까? 가게가 그때부터 있었을까, 형?”

“이어도식당 주인이 가게가 오십오 년 됐다고 했어요. 굴을 팠을 때는 그보다 오래 전이니까 가게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지소가 대답했다.

“그럼 뭘까요 이건?”

“글쎄요.”

지소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생명이 다한 줄 알았던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랄까. 오래되고 용도가 다한 동굴에서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그 얼굴이 있을 것만 같았다. 지소는 조심스레 동굴의 막다른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닥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눈으로 좇으니 나뭇가지로 만든 기다란 낚시대와 찢어진 어망이 버려진 장난감처럼 놓여 있었다. 지소는 용희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하고서 어망을 외면했다.

되돌아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길은 한 번만 와봐도 금방 친숙해진다. 내리막이다 싶더니 바다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 동굴 바깥의 하늘이 우중충해졌다. 배에 올라 입구를 빠져나가려 할 때 거센 물덩어리가 동굴 입구로 몰아쳤다. 바다의 풍랑이 파도를 절벽으로 휘몰아치고 있었고 격해진 물살이 좁은 입구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통통배를 위협했다. 배는 쉽사리 입구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심하게 흔들리면서 제대로 떠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지소는 배낭을 맨 채 양손으로 선체를 붙잡고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물살은 통통배를 집어삼킬 듯 더욱 거세게 몰아쳤고 지소의 오른손이 선체를 놓고 말았다. 지소의 몸이 미끄러지더니 어어, 하는 사이 배 밖으로 떨어졌다. 물에 빠진 것이다. 

그 후 십분 여 시간의 일을 지소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남자가 물에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이며 지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소가 한참 동안 물 위로 떠오르지 않자 용희 씨가 바다로 뛰어들어 구조했고 배 위의 현준 씨와 함께 끌어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희 씨는 지소가 깨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대를 잡더니 요령 있게 동굴 입구를 빠져나왔다. 그새 먹구름은 걷혀 있었고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해졌다. 지소는 누운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 사이로 눈부신 빛줄기가 쏟아져내렸다. 살랑거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이대로 어디든 흘러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굴 따위 잊어버리고, 노대기 씨나 구이순 씨는 그냥 내버려두고, 시간 많고 할 일은 없는 곳으로 어디든. 몸이 노곤해지면서 슬슬 눈꺼풀이 감기려 했다. 

“괜찮아요?”

현준 씨가 물었다. 지소가 갑자기 소리쳤다. 

“노트북, 노트북이요!”

“이런, 바닷물에 젖은 건 복구가 쉽지 않을 텐데.”

“데이터가 모두 노트북에…”

“일단 제가 아는 업체에 맡겨볼게요. 이리 줘보세요.”

지소의 배낭은 여전히 어깨에 메어 있었다. 현준씨가 물이 질질 흐르는 배낭을 지소의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지소의 몸이 뒤로 쏠렸다. 선체에 기댄 채 자신이 지고 다닌 짐을 바라보았다. 노트북이 복구되지 않는다면 큰일이 날 것이다. 육개월 동안 몇 사람이 수고한 작업의 결과물이 수포, 말 그대로 하얗게 사라지는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니까. 지소가 월급 받으며 놀지 않았다는 알리바이이자 지소의 성과를 나타내줄 증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소는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달섬에 올 때 덫에 빠진 기분이 들더니 정말 덫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세상일은 늘 이렇게 될 대로 되었지, 안간힘을 써도 늘 이렇게… 휴, 하고 지소가 한숨을 쉬었다. 용희 씨가 물고기 같은 눈으로 지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그렇게 물살이 휘몰아치다니, 꼭 바다가 화를 내는 것 같았어. 안 그래, 형?”

용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착장으로 가는 바닷길 풍경은 이곳으로 올 때와 아주 다르게 보였다. 세 사람의 몸은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고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용희 씨가 배를 댔다. 지소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면서 용희 씨가 말했다. 일단 따뜻한 물로 씻으시고 차를 한잔 드세요.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용희 씨는 지소와 현준 씨를 내려주고 떠났다. 통통배가 사라지자 현준 씨가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이제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걱정되죠. 물에 빠진 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잖아요.”

지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노대기 씨는, 그곳에 왜 가신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한 번씩 사라질 때가 있어요. 평소에도 집에 잘 안계시지만 그래도 잠은 꼭 집에서 주무시거든요. 그런데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실 때가 있어요. 형이 할아버지 찾으러 다니느라 고생 많이 했죠..”

“노대기 씨를 만날 수 없으니 위임장을 받아야겠어요. 노용희 씨가 자손이니 가능해요.”

“그게…”

“왜요?”

“혈연관계는 아닙니다. 호적에 안 올라가 있는 걸로 알고요.”

“어…”

“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그럼 전 노트북을 수리하러 가볼게요.”

“부탁드려요. 수리비가 얼마 나오든 상관없어요. 꼭 고쳐주세요.”

“제가 하는 게 아니라서,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라고 할게요.”

지소는 고맙다고 말했다. 멀어져가는 현준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었어요. 물속에서 노대기 씨를 보았다고, 노대기 씨가 지소에게 물고기를 주면서, 먹어, 먹어야 살아, 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물속에서도 노대기 씨의 눈물은 다른 빛깔을 내면서 너무도 생생하게 흘러내렸다고. 지소 자신도 믿을 수 없어서였는지 모른다. 실제 일어난 일이었는지, 바다 속에서 잠시 기절한 채 꾼 꿈이었는지, 혹은 노대기 씨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망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지소에게 불가사의한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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