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는 이층 양옥으로 갔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배낭 속 물건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필통과 화장지, 명함지갑, 텀블러, 노트, 포스트잇, 손수건과 우산,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영양제가 든 파우치… 볼펜의 잉크가 새나오는지 화장지에 푸르스름한 물이 들었다. 노트와 포스트잇은 물에 젖어 퉁퉁 불었다. 모든 물건이 제 효용을 잃어 몹쓸 것이 되었다. 필수품들이어서 어딜 가나 짊어지고 다녔는데, 막상 늘어놓고 나니 생명에 하등 지장 없는 그런 물건들이었다. 이제 못 쓰게 되었으니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겠다. 못쓰게 된 물건 중 계산기도 있었다. 열한번 째 다른 답을 남겨놓고 이제 사망했다. 엑셀파일의 빈칸은 계속 비어있을 것이다. 지소는 묘하게 홀가분했다. 거리의 제곱을 더해서 루트를 씌워 경사거리를 재고, 코사인을 곱해 수평거리를 재고, 변의 길이와 경사각을 토대로 토지면적을 구하고. 계산기를 붙잡고 씨름했던 시간들도 이제 안녕인가. 그럴 리가. 아직 과업은 끝나지 않았다. 위임장이나 경계조정 동의서 같은 서류들은 방에 두고 간 건 다행이었다. 노트북도 놔두고 갈 걸 잠깐 후회했지만, 노트북은 직장인 지소의 필수도구였고 무기였으므로 몸에 장착하는 게 습관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윤팀장. 유능한 상사는 돌발상황을 감지하는 촉이 있는 게 분명했다. 지소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사는 진행 상황을 묻고 책임과 신뢰 운운하며 독촉할 게 뻔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할 일은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기다리세요, 윤무식 팀장. 지소는 중얼거렸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현준 씨 말대로 물에 빠진 일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감기약을 먹을까 하다 문득 매실주 한잔 마시면 몸이 따뜻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소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김을숙 씨가 사용하는 일층은 조용하고 정갈했다. 을숙 아주머니는 갔어요 준희의 말을 떠올렸다. 그날 저녁 매화나무를 심고 매화주를 마시던 김을숙 씨. 가볍게 날아오르던 나비처럼 김을숙 씨도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가버린 걸까.
지소는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강강술래 달 밝은 물. 생수병에 보리차 같은 노란 액체가 들어 있었다. 병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역시 매실주였다. 식탁에 앉아 유리컵에 매실주를 따랐다.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달콤하고 알싸한 향취가 혀부터 목구멍까지 가득했다. 두 번째는 조금 깔짝거리며 마셨다. 몸이 금방 따뜻해지고 덩달아 마음도 넉넉해졌다. 마실수록 신기한 술이다. 딱 한잔 마셨는데 등 돌리고 있던 세상이 몸을 돌려 품을 내어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탁 위에 놓인 책을 들여다보았다. 표지에 은하수 제과점이라고 쓰인 두꺼운 팸플릿이었다. 빵과 과자에 대한 수십 가지 설명과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었다. 가게를 본다는 건 저런 걸 읽으면서 잠드는 생활일지도 모른다. 혹시 김을숙 씨는 가게에 들여놓을 만한 빵을 알아보러 은하수에 간 건 아닐까.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고 위생적인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납품 가격도 협의하고, 뭐 그런 일을 하러.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시선을 돌렸을 때 지소는 냉장고 측면에 뭔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사진이었다. 조약돌 자석이 사진을 누르고 있었다. 지소는 사진을 떼어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보리밭에서 찍었는지 연둣빛 보리들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앞에 보리만큼이나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손바닥으로 보리의 이삭 끝을 건드릴 때의 가려운 감촉이 느껴질 듯 머리카락은 바짝 깎여 있었고, 감색의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양팔은 건강하게 그을려 골반에 올려졌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희고 반듯한 치아를 보며 지소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물론 그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이름으로 불렸는지 어느 동네에 살았으며 어떤 친구를 두었고 쉬는 날 무엇을 했는지 지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지소는 이제 저 남자가 저런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의 것이라기에는 비현실적인 웃음이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과 건강한 팔, 반듯한 치아, 그리고 미소,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었지만 그 사람의 것인 그 무엇도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것도 의미 없는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그렇구나, 하고 지소가 무감하게 깨닫는 그것에, 결코 무감해질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무의미의 침묵 속에서 이 남자의 이름을 알고 웃음을 기억하고 보리 이삭 같은 머리카락의 감촉을 되살리던 사람이, 여기 있었다. 싱긋하는 웃음에 화답하는 다정한 말들, 그걸 이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들이쉬는 숨마다 느꼈을 그 사람이 여기 있었다. 지소는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여기 이 자리에 앉아 매실주를 마시면서 그 사진을 바라보곤 했을 이의 시선이 지소의 것과 겹쳐지는 순간의 무게는 지소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소는 냉장고의 조약돌 자석에 사진을 눌러놓고 현관문을 나섰다. 바람을 쐬야 할 것 같았다. 김을숙 씨가 떠났는지 그건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고만례상회 평상에 한 무리의 노인들이 있었다. 막걸리와 새우깡, 깍두기를 앞에 놓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효노인이 지소를 보자 왜 이렇게 오래 가게를 비워놔, 하고 타박했다. 지소는 저도 일이 있어요, 라고 대답하면서 책상에 앉아 외상장부를 확인했다. 막걸리 세 병만 적혀 있었다. 지소는 막걸리 옆에 새우깡 1개 라고 썼다. 김을숙 씨가 온다면 외상장부에 적힌 이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받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오늘이 그날인가?”
“식당 문을 닫았잖우.”
“올해는 조용히 넘어갈는지.”
“누가 아누?”
노인들은 역시 지소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오늘도 농어인가?”
“숭어 같은데?”
“어제 껀 어쨌누?”
지소는 퍼뜩 어제의 물고기를 기억해냈다. 쪽방으로 가보았다. 죽지는 않았으려나, 싶었는데 물고기는 없었다. 백발노인도 없었다. 가게를 비운 사이 누가 가져간 것일까. 아무리 거저 얻은 것이라지만 가져간다고 말은 해야 하지 않나. 뭐 가게를 비운 지소의 탓이기도 했고, 원래 지소가 받을 물고기가 아니었을 것이니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에효노인이 가게로 들어섰다.
“뭐 드려요?”
“이따 가게 문 닫고 은복사로 와.”
“은복사요? 거기가 어딘데요?”
“대교 넘어 산길로 오르다 보면 있어.”
“거길 왜요?”
“그 양반 만나야 한다면서?”
“노대기 씨요? 구이순 씨요?”
“와보면 알아. 해지면 와. 저 물고기도 챙기고.”
“또요? 저 생선 싫어한다고요.”
“그쪽이 생선을 싫어하는지 아닌지 알고나 하는 일인가.”
“왜 주시는 건데요?”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씌어 그래.”
“말씀이 좀 지나치신…”
에효노인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내가 그이를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야. 달리 뭐라 할 수 없어서 그래.”
“네?”
“오래된 이야기야, 오래 되었어.”
“오래되었는데 왜 아직 그러는 거예요?”
“묵은 일 풀어내기가 그리 쉬운가, 그것도 죽은 사람과.”
에효노인이 가게를 나가며 말했다.
“내일은 가게 비우면 안 돼. 교회 행사가 있어. 가게에 꼭 붙어있어야 한다고. 붙박이처럼.”
한 무리의 노인들이 가게를 떠났다. 지소가 모르는 이야기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평상 밑을 보니 오늘 물고기는 힘이 좋아서인지 물을 계속 튀겨내고 있었다. 이걸 또 어쩐다? 쪽방에 둬보자. 또 없어지나 보지 뭐. 내일도 살아있다면 왔던 곳으로 돌려 보내줄 거다. 지소는 믹스커피를 한잔 타서 계산대 의자에 앉았다. 무심코 지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가만례.
지소는 가만례, 라고 한번 더 말하고 다시 고만례, 라고 해보았다. 잡힐 듯하다 운무처럼 희미해져버리는 뭔가를 지소의 마음이 좇으려 했다. 부질없다, 내일이면 나는 구이순 씨를 만나고 노대기 씨나 노용희 씨의 도장을 받아 고만례상회를 떠날 것이다. 가게도 사람들도 물고기도, 가져가지 않을 거다, 여기 모두 남겨두고 갈 거다. 그게, 과연 될까?
알록달록한 지붕들 위로 바다와 선착장이 내려다보였다. 바다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른 빛을 내며 울렁거렸고 작업선들이 귀환하고 있는지 선착장은 부산스러웠다. 바다의 배들도 저렇게 들고 나고 하고, 사람들도 떠났다 돌아오고 하는데, 붙박이처럼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지소는 에효노인의 말을 생각했다. 웬만해서는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고 뭔가가 필요한 사람이 그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언제든 맞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가게를 보는 일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지소는 헐거워지려는 마음을 느끼며 바다의 표면에서 빛이 거두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나무도 아니고 붙박이처럼 어떻게 살아. 붙박이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지소는 가게 옆에 서 있는 느티나무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신의 자리를 정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생명체. 의심도 의혹도 없이 새순을 돋우고 초록 잎을 키우는 늠름한 생물.
이곳 아닌 저곳으로 향할 때마다 지소는 생각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아도 돼, 어차피 그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어,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했잖아, 더 어울리는 곳이 있을 거야, 더 안전한 곳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붙박이라는 말이 주는 지루함, 무기력, 순응, 체념, 그런 것은 나와 맞지 않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붙박이는 아니어도, 저 느티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그 자리에서 버티다가 누구의 것도 아닌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굳건하고 아름다운 생물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소는 굳건해지지 못했고 뻗어나가지 못했다. 인턴만 세 번, 일 년짜리 계약직 두 번, 그리고 숫자 세는 것을 포기한 삼사 개월의 단기계약직을 합쳐 열 곳이 넘는 회사에서 일했다. 그런 산만한 이력은 물론 지소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할 때마다 기대했다. 이곳이라면 조금 오래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블라인드 테스트로 뽑았으니까, 실무 경험을 위주로 인사평가를 하고 평가가 좋으면 정규직도 가능하다니까. 그런 기대가 배반당하기를 반복하고 정규직의 문은 열리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더 노력했어야 했나, 죽을 만큼 애써야 했나.
이력서는 그만 쓰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력서는 능력과 경험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실패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이력서의 너무 많은 이력은 오히려 마이너스였고 이력을 쌓을수록 이력만 쌓아가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디든 뿌리내리지 않으면 어디서든 쓰고 버리는 소모품 인생이 지소를 기다릴 것 같았다. 말하자면 뭔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감각이 지소 안에서 커갔던 것이다. 그런 조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윤무식 팀장이 3구역을 맡겠냐 했을 때 지소가 주저없이 네, 하고 대답한 이유 말이다. 보통 네다섯 달 일정이지만 두 달 안에 끝내야 되는 구역이라는 걸 설명했을 때도 지소는 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팀장은 흡족해했고 지소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주임의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거야. 남들이 기피하는 일에 성과를 낸다면 회사에서 눈여겨보지 않겠어.
이지소라는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육 개월, 일 년이면 새로운 얼굴로 대체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대체 가능한 인력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지소는 잠을 줄여 공부했다. 토지이용현황조사, 일필지조자서, 측량오차, 지적부, 지적부불합지, 임야도선, 도상경계값, 등록사항정정대상토지… 생전 처음 보는 전문용어들의 뜻과 의미를 외우고, 0.1㎡까지 세 번 네 번 다섯 번씩 확인하면서 서류를 작성했다. 비전공자니까 더 열심히, 숫자에 약하니까 한번 더, 스스로에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용기를 내면서 왔다. 여기까지, 이곳 반달섬까지.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매실주 탓인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제 하루 남았다. 내일이면 업무 완료, 출장 종료. 그러나 지소는 아직 토지 소유주들조차 대면하지 못했고 데이터를 담은 노트북은 바닷물에 흠뻑 젖어 분해되고 있었다. 업무는 끝날 것 같지 않고 출장은 영원할 것만 같은데 알 듯 모를듯한 오래된 이야기만 지소의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같은 계산식에 매번 다른 답을 내놓는 계산기처럼, 반달섬에서의 매순간은 지소를 전혀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 뭐가 있을까. 답은 있는 걸까.
가게 문을 닫으려 할 때 한 여자가 들어왔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들고 선반에서 새우깡을 집더니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소를 보고도 어? 아…… 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고만례상회에 들른 것이거나 혹은 가게 보는 사람이 바뀌는 것 정도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마음이 바쁜 건지 모른다. 저기, 라고 여자가 선반에 있는 종이컵을 가리켰고 지소는 하나를 집어 건넸다. 여자는 물건값이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계산대 위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고 평상으로 갔다. 소주와 새우깡의 가격이라면 지소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소주는 천오백 원 새우깡은 천삼백 원, 도합 이천팔백 원, 만원을 받았으니 거스름돈은 칠천이백 원.
잔돈을 어떻게 거슬러줘야 하나, 할 때 계산대 책상 위에 작은 철제 금고에 보였다. 열릴 때 땡, 하고 소리가 나는 슬라이딩 금고였다. 녹이 슬고 칠이 벗겨진 것이 무척 오래돼 보였는데 그편이 고만례상회와 더 어울렸다. 금고는 손으로 돌리는 아날로그식 버튼이 양 옆으로 두 개 있었고 그 가운데 열쇠 구멍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구멍에 집어넣었다. 땡, 소리와 함께 미끄러지듯이 금고가 열렸다.
금고에는 현금이 가득했다. 지폐를 넣는 칸마다 오만원 권과 만원권 천원권이 수북했고, 그 아래 칸에도 동전이 가득했다. 칸막이를 들어 아래 공간을 확인하니 노란고무줄로 묶인 현금다발이 세 개 있었는데 아마도 결제하려고 정산해놓은 것 같았다. 지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많은 현금을 두고도 가게를 비우고 다녔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니.
돈뭉치들 사이로 계산기가 보였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연식도 꽤 차이나 보이는 두 대의 계산기였다. 그리고 계산기 옆에는 하나의 물건이 더 있었다. 사각형의 나무틀 속에 둥글둥글하고 앙증맞은 알들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물건. 지소는 그것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주판.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우연히 일본의 주산경진대회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셈에 집중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주판을 꺼내들었다. 주판 나무틀은 양쪽이 부서져 온전한 사각형을 만들지 못했고 주판알도 두 군데 비어있어 제대로 된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기름을 칠한 듯 주판알이 윤이 나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의 손길에 오랫동안 길들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주판을 쓰던 시절이 있을 만큼 이 가게는 오래되었다. 오십 오년의 역사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 가게에서 새로운 건 지소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평상에 앉아 술을 마셨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은 없었고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굽은 등과 말린 어깨, 하나로 묶은 머리. 가게를 본다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는 일일지 모른다. 여자는 어둑해진 선착장 너머를 바라보다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두어 번 나눠 마시고 새우깡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는 점처럼 반짝이는 불빛만이 둥둥 떠다니는 선착장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이 어깨까지 내려온 여자의 머리카락을 흩날렸고 여자는 얼굴에 달라붙은 걸 어쩌지 않았다. 그런 것조차 내버려둘 정도로 여자는 고단한 것일까. 그래도 바다를 바라보면서 마시는 소주는 두 평짜리 원룸에서 마시는 것보다 낫겠지. 피곤한 몸에서 새어나오는 텁텁한 기운이 벽에 부딪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으니까, 내가 덩치만 큰 쓸모없는 짐승처럼 느껴져 잔을 기울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럴수록 몸은 비대해져 결국에 벽과 벽 사이에 끼어버리게 되는 그런 느낌은 없겠지. 바다는 저렇게 넓고 시야는 툭 트여 있고 저녁공기는 이렇게 보통이니까.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소는 여자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여자는 아주 느리지는 않은 속도로 술을 마셨다. 여자가 일어서 빈 병은 그대로 두고 먹다 남은 새우깡 봉지를 들고 가게로 들어왔다. 지소가 거스름돈을 건네려 할 때 여자가 선반에서 포테이토칩과 카라멜땅콩, 사또밥, 초코파이를 집어 들었다. 지소는 비닐봉지에 과자를 담으면서 이 정도면 얼추 여자에게 내줄 돈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봉지를 받아든 여자가 말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알코올 냄새가 연하게 풍겼다. 지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여자의 얼룩덜룩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도 라면을 끓여주셨다고, 우유랑 두부, 이런 것도 챙겨주신다고,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감사하고, 제가, 면목이 없어서…
여자가 젖은 얼굴로 나갔다. 지소는 의자에 앉아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여자의 손에 든 과자를 보고 복순은 라면을 봤을 때만큼 좋아할까. 그런 게 왜 궁금한가. 지소가 중얼거렸다. 내가 원래 이렇게 생각이 많은 사람이 아니잖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밤 반달섬은 또 어디로 나를 데려가려나. 한번 가보지 뭐. 에효노인이 초대를 했고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가게 문을 닫고 내리막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