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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랜덤

한마음 바자회 및 에코백 만들기 체험강좌.

교회 정문에 알록달록 풍선이 달리고 현수막도 내걸렸다. 에효노인이 요플레와 콩나물, 치약을 사갔다. 현준 씨가 와서 몰라 담배를 사갔다. 전도사는 물건을 나르고 손님을 맞이하면서 교회 안팎을 분주하게 오갔다. 

지소는 멍을 때리는 것도 생각에 잠겨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계산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피곤했고 알쏭달쏭했으며 감기 기운이 있는 듯 몸이 으슬으슬했다. 졸고 있기도 했을 것이다. 갑자기 바다 속 노대기 씨의 얼굴이 떠올랐고, 어디선가 향냄새가 나서 기도를 해야할 것 같다가, 죽어도 뻘을 내놓지 않는 놈들이 있어, 라는 노인의 말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지소는 알 수 없는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윤팀장이 아침부터 전화를 해댔지만 지소는 받지 않았다. 팀장에게 업무를 보고하는 부하직원의 역할이란 게 지금의 지소에게는 오히려 현실감각이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처음 보는 손님이 들어왔다. 기하학 무늬가 새겨진 흰 원피스에 검정색 재킷을 입고 서 있는 여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거 드릴까요, 라고 여자가 말하면서 지소에게 건넨 것은 가방이었다. 

가. 

검정색 바탕에 흰색의 궁서체로 가, 라는 글자 하나가 크게 써 있었고 그 밑에 연보라색의 작은 글씨로 오후 여덟시라고 되어 있었다. 검정의 무거움과 궁서체의 명령조 속에 박혀 있는 ‘가’라는 글자를 보니 누가 큰소리로 가, 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지소는 조금 쭈뼛거리며 가방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근데 제게 왜…”

“가게 보는 분에게 드리고 싶어서, 다른 분인 줄 알았지만.”

“아, 김을숙 씨요, 곧 오실 겁니다, 그분 드릴 거라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지소가 그렇게 말했으나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그윽하게 지소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지소를 허둥지둥하게 만들어 뭐 좀 마실래요, 라고 말했다. 초면에 별로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여자는 커피믹스 한잔 주실래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가게 안을 천천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여자도 어깨에 천가방을 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녹색을 배경으로 했고 중앙에는 무지개가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빨간색 글자가 잘린 채로 군데군데 들어가 무늬처럼 보였다. 하우스라는 단어도 있었고 부야, 인 것도 같고 분양이 잘린 것도 같은 단어로 보아 폐현수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아파트 분양 광고를 잘라 만든 것 같았다. 지소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찾던 아이의 말을 떠올리고는 그가 배춘영 씨라는 걸 직감했다, 

여자는 마치 고대의 유적지를 둘러보듯 과자와 음료수, 세제, 휴지 등속의 물건을 눈으로 만졌다. 라면이 진열된 선반 앞에서는 꽤 오랫동안 멈추어 서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소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가루를 컵에 부으면서 저 사람은 어떤 사연으로 가게를 보게 되었을까, 주인여자와 어떤 사이일까, 따위의 답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 선반의 물건들을 모두 보고서야 여자는 계산대로 다가왔다. 지소가 건넨 종이컵을 받아들고서 유리창 밖 아이스크림 냉동고, 평상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간혹 종이컵을 든 손가락을 까닥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치 여자에게만 들리는 어떤 선율을 타고 있는 듯 리드미컬했다. 여자는 한참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곧 잘 마셨어요, 라고 말하고 가게를 나갔다. 

오전 열한 시가 가까워지자 손님들이 몰려왔다. 말 그대로 물밀 듯이 몰려왔다. 삼월치고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이들이 가게에 들러 생수나 음료수를 사갔다. 어른과 동반한 아이들은 초코파이와 쿠키 같은 과자류를 집었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오렌지주스와 베지밀을 골랐다. 아이스크림은 쮸쮸바, 콘을 합쳐 총 열두 개가 나갔다. 물건을 찾아주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주느라 지소는 바빴지만 혼이 빠질 정도로 허둥지둥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가게에 오는 사람들의 어깨에는 천가방이 걸쳐져 있었다. 폐현수막을 재활용해 만든 에코백이었다. 축, 복, 돈처럼 글자 하나만 적혀 있기도 하고 ‘너나잘해’, ‘라면 먹고 가’처럼 글귀가 조합된 것도 있었다. 글자 없이 무지개나 새싹, 나뭇잎이 그려진 것도 있었다. 글자가 잘린 것인지 오아, 어서, 맑, 심지어 ㄸ나 ㅃ, ㅎ같은 글자들이 뜻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원래부터 독특한 디자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해보, 라는 글자가 적힌 가방을 보고, 지소는 행복이라는 원래 단어를 떠올리는 대신 어렸을 적 헤헤거리고 웃고 다녀 별명이 해보가 된 친구를 떠올렸다. 웃음도 흘리고 침도 흘렸던 단발머리 아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부디 그 웃음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표시는 되지 않기를 지소는 잠시 바랐다. 

오후 한시가 지나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손님들은 물밀 듯이 밀려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소는 빵 매대에서 카스테라를 집어 책상에 앉았다. 믹스커피를 타 마시면서 유리창 너머로 목양교회 전도사가 천막을 허물고 책상을 접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도사는 사다리를 타고 교회 정문에 걸린 현수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가게에 드나든 손님들의 짤막한 대화 속에는 전도사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의 목사 아들이라는 것, 교회를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뜻에 반해 목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전도사로 머물면서 변두리의 가장 외로운 동네에 들어와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는 것,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신도 몇이 목양교회로 옮겨왔지만 전도사가 되돌려 보냈다는 것. 전도사의 손에서 에코백 만들기 체험 강좌, 라는 글자가 접히고 있었다. 지소는 배춘영 씨를 떠올렸다.

가.

가방의 글자가 지소를 바라보았다. 받을 때부터 신경 쓰인 물건이다. 글자와 지소의 눈싸움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 철제 금고를 바라보며 그 안에 들어있을 주판을 생각했다. 지소는 이어도식당 노인의 손에 걸려있던 팔찌의 작은 알을 떠올렸다. 금고 속의 주판을 꺼냈다. 노인의 팔찌에 달린 주판알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했다. 어젯밤 은복사에서 노대기 씨가 노인의 팔을 잡아끌면서 끊어져버렸다. 지소는 주판을 바라보았다. 주판알 두 개의 공백이 무척 크게 느껴졌고 그 작은 나무알을 지소 자신이 찾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소는 고만례상회를 나와 걸어가기 시작했다.      


                                                                                 *     


대나무숲의 암자는 고요했다. 지소는 암자 주위를 돌며 나무알을 찾았다. 워낙 작은 알이고 바닥에 돌맹이들이 많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동안 땅바닥을 훑은 뒤 계단 앞 석등 밑에서 주판알을 발견했다. 지소는 기뻤다. 이렇게 내버려져서는 안되는 물건인 것 같았다. 조심스레 주판알을 집어들고 옷소매로 닦았다. 금고 안의 주판알만큼 광이 났고 만질만질했다.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계단에 앉았다. 바람이 대나무 잎을 건드렸는지 쉬익, 하는 소리가 났다. 지소는 어젯밤 노인이 바라보았던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고 수다스러웠다. 그 고요한 수다를 듣고 있으려니 다시 졸음이 쏟아지면서 비몽사몽이 되었다. 

대나무숲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왔는지 소란스러워졌다. 지소는 일어서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불탑 앞에 서 있었다. 무리의 맨 앞에선 이는 ‘근대역사문화 탐방 – 반달섬 편’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여기 탑 보이시죠. 아까 보았던 유곽의 한 기생이 시주하여 만든 거랍니다. 이 지역은 애초부터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더 쉽게 착취할 수 있도록 개발이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죠? 일본은 태평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기후 조건을 최대한 이용해 자원을 수탈했습니다. 이곳은 소금도 풍부하고, 목화도 잘 재배되었거든요. 그래서 이곳에 항만을 건설하고 길을 뚫고 동굴 진지까지 구축했죠. 총칼로 조선인들을 위협하면서요.”

깃발을 들고 있는 이가 무리에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설명을 들으며 때론 혀를 차고 때론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이곳은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입니다. 군인들이 상시적으로 집결해있었고 이들을 위한 유곽이 선창가 근처에 조성되었고요. 여기 은복사는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입니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느끼셨죠? 건물은 에도막부 시대의 건축양식을 따왔고 일본 신사의 구성을 그대로 따랐죠.”

무리는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으로 뾰족지붕과 종각 등을 가리키며 해설사에게 질문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복사를 돌고 나서 배를 타고 동굴 진지를 보실 건데요. 동굴 진지만 하더라도 굶주림과 극한의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간 이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희생자들은 누구였는지, 그 이름조차 우리는 알 수 없어요. 그분들의 극락왕생을 바라면서 탑을 세운 거랍니다.”

“그분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까?”

“끝까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 우리도 이름 없이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잠시 묵념할까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지소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용희 씨와 갔던 동굴을 생각했다. 갈매기가 비상하는 주상절리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노대기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오늘 노대기 씨는 물고기를 갖다 놓지 않았다. 지나가던 한 늙은 스님이 무리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더니 합장을 했다. 

“그분의 이름은 가만례입니다. 평생 모은 돈을 시주하셨지요. 그분의 극락왕생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십시오.”

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고 뒤돌아섰다. 가만례, 그 이름을 이곳에서 듣는다. 주머니 속의 주판알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지소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판알을 만지작거렸다. 대나무숲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한 무리의 새들이 하늘로 날아갔다.

누군가 바라보는 눈길을 느끼고 지소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돗개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다가와 지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늠름하고 위엄있어 보이는 개. 워리. 지소가 앉아 손을 내밀자 워리가 다가왔다. 지소의 손과 신발의 냄새를 맡고 지소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신비로운 전령사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워리가 걷기 시작했다. 다시 뒤를 돌아 지소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라는 거구나. 워리, 가보자. 반달섬은 이번에 또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가보자꾸나. 워리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자기만 아는 길이라는 듯 앞장서 걸었다. 바위와 개울을 가뿐히 넘고 중간에 지소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면서 한참을 오르더니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저 아래 뾰족지붕이 보이고 고만례상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이렇게 통하는 길이구나. 워리는 가게 쪽이 아니라 공터로 걸어갔다. 

워리는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가만히 서서 지소를 기다렸다. 반달섬의 모든 것이 이 동굴로 통하는 것 같았다. 준비되었냐는 듯 지소를 바라보는 워리의 눈동자에 대고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알아야 할 게 있다면, 보아야 할 게 있다면 피하지 않을게. 워리가 익숙한 몸짓으로 동굴로 들어섰다. 워리는 삼거리에서 막다른 동굴로 걸어갔다. 막다른 벽 앞에서 코를 킁킁거리더니 한 곳에 멈추어 서서 지소를 바라보았다. 지소가 다가가 벽을 살펴보았다. 틈 사이로 무언가 불그스름한 게 삐져나와 있었다. 천 조각 같기도 하고 옷의 일부분 같기도 했다. 지소가 꺼내 보려 했으나 벽의 틈 사이에 끼어 잘 빠지지 않았다. 아마 세월이 지나면서 흙이 쌓여 단단해진 것 같았다. 뭔가 도구를 가져와야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뭘까. 워리는 왜 이걸 내게 보여주는 걸까. 뒤를 돌아보았다. 워리는 없었다. 자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지소는 동굴을 나왔다.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지소는 고만례상회로 돌아왔다. 머리를 뒤로 묶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창고방과 선반을 오가며 과자와 라면의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냉장고에 음료수를 줄 맞춰 세워놓고 생수도 넣어두었다. 휴지통을 말끔히 비웠고 컵을 씻어 개수대에 엎어놓았다. 사흘 전 지소가 이곳에 처음 몸을 들인 그대로의 상태를 만들어놓고 싶었다. 김을숙 씨에게 열쇠를 건네주면 지소의 할 일은 끝날 참이었다. 그런데 김을숙 씨가 오지 않고 있었다. 

현준 씨가 가게로 들어왔다. 노트북을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서는 복구가 힘들답니다. 메인보드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전문업체에 의뢰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 되도록 빨리 서울로 가면 좋겠지만 영 힘들 수도….” 

미안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지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했다. 괜찮겠어요, 라고 묻는 현준 씨에게, 죽고 사는 일은 아니잖아요, 라고 말했다. 현준 씨가 그렇긴 하지만, 이라고 말했다. 지소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랜덤이고 무작위라면서요.”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이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윤팀장이 7구역에 가라고 했을 때부터, 배를 타고 가야한다고 했을 때도, 가게를 봐야 한다고 했을 때도, 바다에 빠졌을 때도, 지소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은 흘러갔고 지소가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무언가를 향해 떠밀리고 있었다. 공백, 아주 큰 공백에 내던져진다는 건 이런 일을 겪는다는 뜻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라고 지소는 중얼거렸다. 박주임과 윤팀장, 회사에 복수하는 방법이 저절로 실행된 것인지도. 그곳으로 되돌아가지 않기로 마음먹는다면. 

늦게까지 계시네요, 라고 말하며 들어선 사람은 전도사였다. 주일의 예배가 모두 끝났는지 교회는 불이 다 꺼져 있었고 마당의 태양광 전등만 밝게 해놓았다. 교회 마당이 북적거린 지가 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곳은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한 곳처럼 공허했다. 그 허전함을 저 사람은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오고 가는 사람들과 들고 나는 자리들을. 

지소가 전도사에게 물었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저는 커피를 먹지 않습니다, 비타 오백 두 개 주세요.”

“저는 비타오백 안 마십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는 비타오백을, 지소는 믹스커피를 마셨다. 

“복순자매 집에 라면 두 박스 들여놓았습니다, 쌀도요.”

“…네.”

“고만례상회에서 사야 하는데, 시내에 사는 신도님이 직접 구입해 들고 오셔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전도사를 보며 지소는 가게 근처에 살며 가게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마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복순 자매의 할머니가, 정난향 자매님인데, 무척 아프십니다. 우리 교회 건물이 세워지기 전, 천막 하나 쳐놓고 예배를 보았을 때부터 오시던 분입니다. 주일 예배나 수요 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는데 요즘 통 거동을 못하고 교회에도 못 오시고.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복순자매가 혼자 살기는 힘들고 복순 자매의 어머니가 계시긴 한데 그분도 사정이 딱하다고 들어서. 복지원으로 가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잘 견딜지 어쩔지.”

“…그렇군요.” 

와, 라면이다, 라고 기뻐하던 복순이 떠올랐다. 정신이 좀 들면 설거지는 할 수 있다던 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복순은 어떻게 살아가나, 어디로 가야 하나. 잘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괜찮은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로든 가야 한다면… 복순 어머니의 사정이란 것이 복순을 홀로 남겨둘 만큼 딱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소는 생각했다. 사정이란 것은 바뀔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딱한 것도 조금은 덜 딱해질 수 있으니까. 아주 작은 차이라도 그것으로 인해 많은 게 변할 수 있다… 

그 순간 문득 지소는 김을숙 씨가 이곳으로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렴풋하게 감지했던 뭔가가 확실해진 느낌이었다. 

“김을숙 씨는 어디로 갔을까요.”

“가야 할 곳으로 갔겠지요, 주님은 늘 그렇게 인도하시니까요.”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나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어떻게 해도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군대 간 아들을 잃었다고,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화장을 해야만 했다고, 1주기 기일에 아들 제사상을 차리다가 무작정 집을 나서서 온 곳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지소는 냉장고 옆면에 붙어 있던 사진 속 남자를 떠올렸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희고 반듯한 치아를 드러내면서 싱그럽게 웃는 사람, 그런 사람을 땅에는 묻었고 차마 마음에는 묻을 수 없어 김을숙 씨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가. 

“김을숙 씨도 처음에는 사흘만 가게를 보기로 했지요.”

“사흘요?”

“사흘이요. 그런데 나흘이 되고 한달이 되도 계속 가게를 보셨습니다, 쭉.”

“…” 

“가게를 봐야 할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유요. 그게 뭐였을까요? 이제는 그 이유가 없어진 걸까요?”

“흠, 글쎄요. 참, 저녁은 교회에서 드시죠. 행사 음식이 많이 남았습니다.”

“배고프지 않아요.”

“배춘영 씨도 같이 드실 건데.”

“그런, 가요?”

“조촐하지만 함께 하시죠.”

지소는 전도사를 따라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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