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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의딸정미경 Oct 01. 2023

오래된 일

은복사는 고만례상회에서 산 반대편에 있는 절이었다. 가게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소는 큰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선착장에서 산을 끼고 돌아 꽤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어제 보았던 대교와 관광객들을 구경 삼아 걷다 보니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옆을 지나치다 반달사진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준 씨가 운영한다는 사진관이었다. 오래된 건물에 흰색 칠을 하고 유리창을 새로 달아 작은 카페 같은 느낌을 주었다. 초록색으로 반달을 만들어 돌출 간판으로 붙여놓으니 근사했다. 유리창 너머로 현준 씨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꽃무늬 카디건을 걸친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소는 들어가서 인사를 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현준 씨가 지소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가게 안 의자를 가리키며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소는 약간 뻘쭘하게 문을 열고 사진관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현준 씨에게 말하기를 멈추지 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지소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의자에 앉는 대신 벽에 걸린 사진을 구경했다. 

입구 쪽은 반달섬의 자연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소나무숲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바다와 등대, 수풀에 앉아 있는 작은 새무리들, 깎아지른 절벽을 나는 갈매기떼, 투명에 가까운 파도와 포말들. 모두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절경들이었다. 가운데는 인물 사진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한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이 중에 현준 씨가 아까 말한 생존자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소는 주의 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어도식당 노인인 것도 같고 복순 할머니인 것도 같고 우유를 좋아하는 동굴노인인 것도 같은 얼굴들. 카메라를 의식한 수줍은 태도와 이제는 몇 개 남지 않은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환한 웃음. 워리의 사진도 있었다. 거리에서도 해안가에서도 워리는 늠름하고 신비로운 전령사처럼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반달섬의 건물과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찍은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낡은 건물과 새로운 패션들이 묘하게 어울리는 인상적인 사진들이었다.  

처음 현준 씨가 사진관을 한다고 했을 때 요즘도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나, 하고 의문을 품었던 게 생각나 지소는 혼자 무안해했다. 현준 씨의 사진은 보통의 안정적 구도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재능이란 게 이런 거구나, 혹은 태도의 문제일까. 따뜻한 시선과 태어나고 자란 장소에 대한 애정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감탄하고 있는 사이 노인이 지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복순 할매 알제? 열흘 동안 똥을 못 싸서 응급실 실려간 할매 말여. 그 할매랑 내가 목화공장에서 일했어. 그 할매는 저기 아래 가게에서 심부름하는 이였는데 공장이 들어선다니 내가 꼬드겼제. 그때가 열서넛이었을 거여.”

“아, 네.”

지소는 노인과 현준 씨를 번갈아 바라보며 대답했다. 현준 씨는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하루 열두시간 씩 일혔어. 집에 오면 손가락이 다 얼얼해. 손톱이 남아나들 안혔어. 떨어져나간 자리에 다시 새 손톱이 길고 하는 것이 어려서 그랬것제? 우리는 목화솜에서 씨를 빼내는 일을 했는디 처음에는 요것이 눈에는 보이는디 쉬이 빠지들 안혀서 아주 씨름을 했제. 하다보니 요령이 생기제, 뭐든지 그렇잖우.”

“맞아요, 어르신.”

현준 씨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손으로 하던 걸 인자 기계가 다 하더만. 목화솜을 털어서 반듯허게 이불모양으로 만들어 쌓아 배를 태워 지놈들 나라로 가져갔제. 목화 싣는 날이믄 항구가 눈이 온 것처럼 하얗제. 목화밭도 하얗고 항구도 하얗고. 천지가 눈 온 것처럼 하얗게 되갖고 애기처럼 좋아했제. 일은 고되도 하얀게 좋드만.”

지소는 복순의 집에서 보았던 노인의 몸짓과 말을 떠올렸다. 천지가 하얘, 눈 온 것처럼 하얘.

“사진은 며칠 걸린다고?”

“다음 주에 한번 들르세요.”

“부끄라서 어쩐디야. 내 생전 나를 주인공으로 이렇게 사진을 찍어대는 건 처음이어서. 이쁘게 나왔을랑가 모르겠는디.”

“이뻐요. 멋지고요.”

“사진값도 안받는다 하니 고마워서 어쩐디야.”

노인과 현준 씨가 함께 웃었다. 노인이 가게를 나갔다. 현준 씨가 카메라에서 USB를 꺼내 노트북에 끼웠다.

“드립 커피 한잔 드릴까요?”

“마시고 싶긴 한데. 어딜 가는 중이어서요. 사진이 멋져요. 정말이에요.”

현준 씨가 웃었다.  

“참, 노트북은 맡겼어요. 어떨지 모르겠어요. 뜯어봐야 안다고 하네요.”

지소는 알겠다고 했다. 

“자주 놀러 오세요. 커피도 맛있게 내려드릴 수 있어요.”

탁자 위 긴 주둥이를 가진 포트를 가리키며 현준 씨가 말했다. 지소는 들어올 때처럼 가볍게 목례하고 사진관을 나왔다. 산쪽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젊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열서너 살 아이가 열두 시간 씩 했을 노동의 고단함, 그 고단함 속에서도 천지에 하얀 눈이 내린다고 좋아할 수 있는 순진무구함에 대해. 그리고 가만례, 그리고 고만례. 지소는 자꾸 발을 헛디뎠다. 갈증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도 들었다. 물에 빠진 게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현준 씨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혹은 죽었다 살아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걸지도. 

산으로 오르는 길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에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길 양편으로 노랗고 빨간 연등이 매달려 있었다. 절의 입구였다. 중앙에 그리 크지 않은 몸체에 넓고 높은 지붕이 달린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석탑과 종각이 있었다. 지소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동을 일으켰는지 처마에 달린 풍경이 댕댕 소리를 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앞을 바라보니 반듯하게 뻗은 대나무들이 쉬익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대나무숲 사이로 작은 길을 따라 누군가 지소에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에효노인이었다. 노인이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지소는 노인의 뒤를 따라 대나무숲 사이로 들어섰다. 지렁이처럼 굽은 길을 걸어 올라가자, 작은 암자가 보였다. 

암자에서 향냄새가 흘러나왔다.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어떤 의식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제례인 듯싶었다. 제단 위에 떡과 과일, 나물들이 차려져 있고 스님이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도식당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 뒤에 한 노인이 더 있었다. 에효노인은 지소에게 뒷자리를 가리키고 자신은 앞자리로 가 앉았다. 지소는 우물쭈물 앉아 옆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순의 할머니였다. 정갈하게 앉아 기도를 하는 걸 보니 온전한 정신인 듯싶었다. 백발의 세 노인은 누구를 추모하는 것일까. 염불 소리가 높아지면서 노인들의 입술도 소리 없이 달그락거렸다. 위패가 있긴 했지만 지소가 해독할 수 없는 말들만 씌어 있었다. 

염불을 끝내고 스님이 일어서 암자를 나갔다. 잠시 후 대나무숲에서 어지러운 소리가 났다. 누군가 급하게 걸어오더니 암자 앞에 멈추었다. 에효노인이 조용히 일어섰으나 두 노인은 그대로 앉아 계속 기도를 했다. 지소는 에효노인을 따라 암자 밖으로 나갔다. 젖은 나무처럼 서 있는 사람은 노대기 씨였다. 어망을 건네주며 말했다. 

“먹어, 먹어.”

노대기 씨가 말했다. 

“먹어, 먹어야 살아.”

그건 말이라기보다 물에 젖은 웅얼거림 같았는데 바람이 불자 대나무잎 소리에 묻혀 그마저도 웅웅했다. 

“돌아가우.”

에효노인이 노대기 씨에게 말했다. 노대기 씨가 지소에게 다가와 어망을 들이밀었다.

“물고기 먹어, 먹어야 살아.”

바닷속에서 지소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걸 왜 제게…”

“죽은 이가 어찌 먹누. 저승에서 먹을 음식은 올려놓았으니 돌아가우.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에효노인이 말했다. 노대기 씨는 에효노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친 몸짓으로 지소에게 어망을 들이밀며 말했다.

“죽긴 누가 죽어? 가만례가 왜 죽어?”

“그만하우.”

단단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느새 이어도식당 노인이 대나무처럼 서 있었다. 노대기 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이곳 대나무숲의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진 것을 지소는 느낄 수 있었다. 

“가만례, 가만례.”

“그만하라지 않소. 여기서 그이를 찾으면 살아 돌아오우?”

“죽지 않았어, 살아있어. 어젯밤 꿈에도 보았어, 가만례.”

“죽은 지 삼십년이오. 이제 그만 놓아주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붙잡고 있으니 모두가 편치 않은 것이오.”

“가만례는 죽지 않았어. 이리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고, 왜, 왜!”

“죽었소, 이제 그만 놓아주오.”

“도대체 왜 나를, 나를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이렇게 살아있는데 왜 내게 오지 않은 것인지.”

노대기 씨가 가만례, 라고 부르면서 노인에게 다가섰다. 에효노인이 막아섰지만 노대기 씨는 뿌리쳤다. 노대기 씨가 노인의 팔을 잡으려 했다. 노인은 슬쩍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노대기 씨는 기어이 노인의 팔을 잡았다. 노인이 잡힌 팔을 빼내려는 순간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면서 땅에 떨어졌다. 노대기 씨의 악력에서 벗어난 반동으로 노인이 쓰러졌다. 노대기 씨가 달려들었고 에효노인이 막아섰다. 지소는 노인을 부축해 흙마루에 앉혔다.  

“대기 양반. 오늘은 영가를 위로해주는 날 아니우.”

복순 할머니가 노대기 씨를 달랬다. 작은 몸을 더 작게 만들고 있었다. 노대기 씨가 복순 할머니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네년이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네년이 사람이야!”

노대기 씨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눈은 물고기의 것처럼 먹먹했다. 

“네년 때문에 모든 게 틀어졌어. 나쁜 년, 나쁜 년.”

노대기 씨의 말에 복순 할머니가 계단에 주저앉았다. 흔들리는 작은 몸체를 이어도 식당 노인이 품에 안았다. 노인이 큰 숨을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향이 때문이 아니오. 이 사람 때문이 아니란 말이오.”

“약조를 했어.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보자고 약조를 했어. 그런데 떠가지 못했어. 저년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을꼬, 얼마나 야속했을꼬!”

노대기 씨가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새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푸더덕거렸다. 

“기다리지 않았소. 야속하지도 않았소. 사람 사는 것처럼 살 수 없었소. 죽은 듯 떠나야 했소. 그러다 죽었소. 그러니 그만 잊으시오. 놓아주시오. 그것이 모두 편안해지는 길. 제발, 대기 양반.” 

노대기 씨가 물고기의 내장 같이 진득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암자 주변의 공기는 한없이 가라앉았다. 한참 동안 누구 한 사람 입을 떼지 않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휘돌아가는 무언가를 지소는 느낄 수 있었다. 

제례음식을 거두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암자로 왔다. 노대기 씨는 사람들을 피해 대나무숲으로 올라가버렸다. 에효노인과 복순 할머니는 철상하는 걸 도운 뒤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도 식당 노인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소는 노인 홀로 암자에 남겨둘 수 없어 흙마루에 함께 앉아 있었다. 대나무 잎들이 바람결에 쉬익 소리를 냈다. 

“하나는 가만례, 하나는 고만례. 내가 고만례, 내 쌍둥이 언니가 가만례.”

노인의 목소리는 대나무 잎을 건드리는 바람처럼 흘러갔다. 지소는 놀라기보다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는 마음이었다. 

“울지도 말고 가만 있으라고 가만례, 딸 쌍둥이를 낳았으니 딸은 그만 낳으라고 고만례.”

“어르신이 가게 주인이었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다 생각은 했어요. 근데 고만례가 그런 뜻이었다니, 어떻게 자식 이름을 그렇게….”

“오래전 일이오, 오래되었지.”

이틀 만에 익숙해진 이름, 고만례. 그 이름에 담긴 의도는 가혹했다. 지소는 노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죽을 힘을 다해 좁은 산도를 뚫고 나와 세상이라는 것과 막 접촉한 연약한 생명에게 그 존재를 부정하는 미래의 무게를 지게 하다니.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만난 것이 자신이 아니길 바라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라는 차가운 눈빛이었을 아이, 그 아이의 이름 고만례와 가만례. 

“그럼 구이순 씨는?”

노인이 눈을 감았다 떴다.

“호적에는 구일순 구이순 이렇게 올라가 있소.”

“왜 진즉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땅이 어르신 소유라면 동의만 해주시면 되잖아요. 노대기 씨는 제가 설득해볼게요.”

“그런 게 그리 중하오?”

“저한테는 중요해요. 그걸로 제가 밥 벌어 먹고 사니까요. 그런데요, 사흘 후에 구이순 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김을숙 씨가요. 왜 그랬을까요?”

“그건 그이한테 물어보오.”

“가버렸다고 하던데.”

“갔으면 물어볼 수가 없겠네. 허허.”

또 스무고개 시작인가. 이럴 때 지소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정도는 이제 알고 있다.

“둘을 모두 윗목에 엎어놓았다는데, 둘 다 살았어. 우리 성이 참 얌전했어. 이름처럼 가만있는 듯싶은데 뭐든 꼼지락거리고 잘했어.”

“그건 가만히 있지 않은 거죠.”

“그렇다오. 조용히 있는 듯 보여도 그렇지 않은 거요. 저 바다처럼 그런 거요.”

노인은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거둬진 바다는 유동하는 검은 덩어리로 보였다. 조용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닌, 고요하지만 끊임없이 흐르는 거대한 그것.

“우리 성을 기다리곤 했소, 여기 암자에서. 저 아래 유곽 사람들이 이 절로 소풍 오곤 했다오. 밖으로 나오는 건 그때뿐이었으니까 날짜를 기별해주면 기다렸지.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고서 종종걸음으로 걸어와서 돈을 주곤 했소. 그때는 몰랐지. 우리 성이 어떻게 그 돈을 버는지. 나야 절름발이 신세니 돈 벌기는 글렀고. 누가 써주지도 않고 겨우 밭일이나 하고 옆집 애나 봐주고 했고. 성한테서 돈을 받아다 엄니를 드리면 그렇게 우셨소. 그러다 떠난다고 했지, 사정 아는 누구와.”

“노대기 씨, 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이 노인의 뺨에 머물다 바람에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성을 기다렸소. 여기, 이렇게 앉아서. 성은 오지 않았고.”

“왜요?”

“난향이, 복순 할매 때문이 아니오. 그저 일이, 사고가, 있었소. 떠날 수밖에 없었소.”

“노대기 씨는 가만례가 못왔다고, 복순 할머니 때문에…”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기별이 왔소. 모아놓은 돈을 엄마한테 드리고 싶었다하오. 성은 돈을 장독대 옆에 땅을 파서 숨겨놓았었소. 반질한 돌을 하나 얹어놓았지. 성 말고 난향만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우. 근데 돌을 치우고 땅을 파보아도 돈이 없었다 했소. 난향을 찾으러 갔지. 난향의 아비가 오래 앓았는데 그 약값을 대야 했던 거요. 난향이 울면서 말했다 하오. 꼭 갚을 거라고, 제 몸을 팔아서라도 갚을 거라고. 우리 성은 그 말을 믿었소. 원망 한번 하지 않았소.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게 맞을 거요. 난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성이 감독관 눈에 띄고 말았소. 말도 없이 외출했다 하여 고초를 당했지. 해서 성은 그날 약속한 곳에 가지 못한 거요. 그 다음날 어찌해서 다시 빠져나왔고 동굴로 갔소. 약조했던 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고 하오. 입고 있던 기모노를 벗고 가져간 짐보따리에서 흰 치마와 검정 저고리를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입구로 뭔가 소리가 들렸다 하오. 처음에는 뗏목을 타고 약조한 이가 오나 했을 테요. 그런데 무겁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거요. 배였소. 한번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오. 몸체는 쇠로 뒤덮이고 뱃머리는 날렵했고 운전석에는 둥근 막 같은 게 있었소. 배가 동굴로 들어와 섰소. 엔진이 꺼지고 배에서 한 남자가 내렸소. 군복을 입고 있었소. 성은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숨어 있었소. 도망갈 새도 없었으니까. 남자는 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소. 동굴 안은 어두웠으니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소. 남자가 가방을 챙겨 동굴 밖으로 나가길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소. 갑자기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소.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방에 든 손전등을 꺼내 성 쪽을 비춰보는 것이오. 손전등 빛이 성을 비추는데 이제 죽었구나 싶지 않았겠소. 남자가 성 쪽으로 다가갔고 성은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쳤소. 그러나 곧 팔이 남자에게 잡혔소. 빠져나가려 발버둥칠수록 남자는 독오른 맹수처럼 성을 옥죄었소. 내가 잡히면 우리 식구가 모두 총살당할 거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오. 성 한몸 죽는 게 문제가 아닌 거오. 한쪽 팔을 잡힌 채 보따리에서 단도를 꺼냈소. 유곽에 있을 때 일본 기생인 사쿠라상이 선물해준 것이오. 그걸 쓸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소. 남자의 배에 단도를 쑤셔 넣었소. 남자가 쓰러졌소. 남자의 가슴께에 단도를 두 번 더 쑤셔 넣었소. 사람을 죽인 거요.” 

“그래서 떠나야 했군요. 노대기 씨를 남겨두고 혼자.”

“죽어가는 대기 양반을 거둔 게 난향이오. 오래 품어온 마음이었지. 그걸 탓할 수 없소. 나는 자격이 없소.”

“그렇게 떠나신 거군요. 가만례는.”

“삼십년 인가 소식이 없다가 성이 어느 날 갑자기 반달섬에 와 점방을 차려준다 했소. 점방 여는 게 꿈이었오. 점방을 열면 엄니 고생 그만해도 된다면서. 어머니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후였지. 하룻밤 머물고 떠났소. 자기가 있을 자리는 따로 있다고.”

“그때 노대기 씨를 왜 만나지 않았어요?”

지소는 노대기 씨의 공책에 쓰인 글귀를 떠올렸다. 내가 없는 반달섬에 네가 왔다. 왜 나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냐. 이 세상에 살아있는데 왜 나에게 오지 않은 것이냐. 노인은 지소에게 그걸 어찌 아냐고 묻지 않았다.  

“대기 양반이 섬에 없었소. 가만례를 찾아다니느라 가만례를 놓쳤던 게지.”

“며칠만 기다리시지, 평생 기다렸던 사람인데.”

“만나면 뭐하오? 마음만 아프지. 흠 있는 사람이 머물 자리는 아니었소. 아비가 영감에게 팔고 영감 아들이 다시 유곽으로 팔고 그러는 사이 몸도 마음도 멀쩡하지 않았다오. 흠 있는 사람의 자리는 따로 있는 법이라오. 반달섬 아닌 다른 곳, 여기 아닌 다른 곳.”

“그게 왜 흠이에요? 그분 잘못이 아니잖아요.”

“서러운 운명을 타고난 게 흠인 거오.”

“태어날 때부터 서러운 운명이 어디 있어요? 나라 잃고 부모가 가난해서 그런 거지. 가혹한 시대가 흠인 거죠.”

갓 태어난 딸에게 고만례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 시대가 괴이했고 늙은 남자에게 어린 딸을 팔아먹은 그 아버지가 끔찍했다. 지소는 해가 져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지소를 보며 노인이 말했다. 

“다 지나간 일, 부질없지. 그 뒤로 죽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들었소.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 오래되었지…”

“지나간 게 아니잖아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면서요? 사람 마음을 그렇게 모른척하니까, 아직도 기다리고, 물고기를 낚고, 여기저기 찾아 헤매고, 이름을 새기고…… 그렇게 모른척하니까 모른척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울고 하는 거잖아요. 사람 마음이 왜 부질없어요? 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등 돌렸던 건데요? 얼굴이라도 봐주면 되었잖아요. 눈이라도 마주치면 되었잖아요.”

지소는 바다 속에서 마주한 노대기 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고기처럼 먹먹한 그의 눈도 떠올렸다. 그것은 꿈이나 망상이 아니었다. 지나간 과거도 아니었고 자연스레 잊힐 만한 일도 아니었다. 저 너머 바다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 주름 사이로 동굴의 석간수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노인이 일어섰다. 지소가 노인을 부축하려 하자, 걸을만 하오, 하고 말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대나무숲의 오솔길을 내려와 석탑과 종각을 지났다. 어느덧 거리는 어둠에 잠기고 매화꽃에 까르르 웃던 관광객들도 잠을 청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고요 속에서 노인이 말했다. 가만례가 셈을 참 잘했다오, 백단위 천단위도 척척이었다오. 밤바다를 배경 삼아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며 지소는 문득 깨달았다. 노인은 다리를 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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