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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 산 Jun 04. 2024

전시_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호암미술관

"서는 데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송곳>의 대사는 관점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 할 때 항상 유효했다. '서는 데'는 우연한 기회에, 진력을 다하다, 운명 같은 인연으로 달라진다. 문득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아득하게 익숙한 듯 생경스럽게 펼쳐지면 비로소 발 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금번 호암미술관에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전시는 다만 우연이나 운명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진력을 다한 연구들과 고민, 회의와 확신 사이에 에너지들이 만들어 낸, 관점에서 비롯된 전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와 여성의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를 세상에 존재하게 했지만, 불교의 어떤 경전에서는 여인의 성불을 회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해지는 불상이나 보살의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얼굴에는 존경하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다만 석가모니의 육신으로 이해되는 부처의 현신일 뿐이다.


또한, 몸과 마음, 재산과 기회까지 다 바쳐 불교의 전파와 교단의 성립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여인들의 숫자는 기록된 것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며, 누구보다도 억압받았던 여자라는 '신분'을 딛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수행하는 이들도 기록된 것보다 분명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불교에서 주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도와주는 사람일 뿐 깨닫음의 주체는 될 수가 없었다.


이는 분명 여자라는 '신분'이 가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한계와 억압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일 뿐, 불교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불교의 역사를 통해 여인의 역할과 형상像을 들여다보려는 노력과 시도는 사회적 한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던 여인들의 모습과 그들이 실제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전시된 작품들은 완전히 처음 보는 새로운 작품들은 아니었다. 불교예술을 논할 때 잊지 않고 집어야 할 작품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전시가 더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였든 마음만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용맹정진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 가르침의 정수라면, 여자들이야말로 깨닫음을 얻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였으리라. 그들이 불교 안에서 어떤 식으로 기록되었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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