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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ll(2024, 디렉터스 컷)

영화리뷰_추락하다.

by 검은 산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이라는 말은 cursor만 반짝거리는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을 때나, 펜을 손에 든 체 흰 종이를 대면하고 있는 막막한 순간에 꽤나 위로가 된다. 노나라에 역사서 춘추春秋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공자는 자신이 창작자가 아니라 신이호고(信而好古 : 그저 옛것을 좋아할 뿐)라고 한 것은 예禮를 숭상하는 겸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보아온 것, 들어온 것, 읽어온 것, 경험해 온 것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다 좌절한 초라한 자아를 경전의 문구를 끌어와 위로한다. 성현의 가르침은 원래 그렇게 끌어다 쓰는 것은 성誠한 태도가 아니지만 소인小人인 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더 폴을 봤을 때, 처음부터 기시감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영화를 보면서 '판의 미로'(2006)을 떠올렸고, '바빌론'(2023)을 떠올렸으며, '스타워즈', 심지어 '매드맥스'(2015)를 떠올렸고, 그 외에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 만큼 흔한 소녀 구원서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배우들은 물론이고, 영화의 장면장면은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다웠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했다.




몸의 영구적인 손상과 사랑하는 이의 배신이 한꺼번에 닥쳐온다면 본능은 마치 의지와 같은 모습으로 현현해 스스로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득하게 나아갈 것은 예측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자신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며 다가오는 아버지를 잃은 다섯 살짜리 소녀라도, 그 소녀를 마치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로 꼬여내 경계심을 낮추고 마음을 열게 하고, 종래는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자기 연민에 잠식되어 마비된 양심에는 아무런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절망에 빠진 자신에게 편안한 잠을 주고자 죽을뻔한 아이를 바라보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오지만 도저히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절망 앞에서 '그러마' 하고 죽음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그 고통도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레이는 마지막에 자신의 나이로 돌아온다. 해피엔딩을 절절하게 바라는 아이의 눈물 앞에 어른인 자신의 고통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레이가 말해주었던 그 환상적인 이야기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상처는 뒤에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어린 알렉산드리아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뒤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너무나도 할리우드적이라서, 지독하게 미감을 추구한 영상미와 묘하게 부합되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을 그저 '술述'했다고 공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위안 삼을 수는 없다. 아무리 소인이라도 그 함의를 모르지 않는다.

공자가 역사서 춘추를 지었을 때, 간신적자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춘추에 본인들의 말과 행동이 그대로 기록되어 천대만대를 이어져 기억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을 살다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탐하다가 더러워진 이름이 자신이 죽의 뒤에도 박제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것이 술의 힘이다. 더 폴은 추락하다는 의미가 있다. 레이도 알렉산드리아도, 그리고 누구라도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살다 보면 떨어져 자빠진다. 죽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를 열심히 기만한 레이도, 레이의 이야기 속에서 죽은 아버지와 함께 긴 모험을 떠난 알렉산드리아도 결국 현실에 도착했다. 그 현실이 여전히 내가 원하던 것은 부재한 곳이라고 해도, 고개를 돌려보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들이 거기 있는 그런 현실 말이다. 원하는 것이 부재하다고 슬퍼하며 스스로를 연민할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며 삶은 이러한 것이다 하며 받아들이며 걸어갈지는 그저 슬프게도 다만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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