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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incredulity

미술사 이야기_카라바조, <토마스의 의심>(1602)

by 검은 산


의심은 신앙에서는 죄악시된다. 의심한다는 것은 그만큼 세속적이고, 계산적이며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특히 예수의 대속과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타인을, 과거를 미래를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재조차도 의심하는 존재이기에 숭배자로서는 적합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간이 종교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마치 존재의 불완전함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맥없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카라바조의 <토마스의 의심>을 보았을 때, 뒤통수를 후 드려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카라바조 특유의 연극적인 묘사와 빛의 표현이 극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에 서양에서 수없이 그려진 성화와는 구별되는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눈을 빼앗겨 오래 그의 작품들을 기꺼이 들여다보았으나, <토마스의 의심>은 그 무엇과도 달랐다.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이 끊어진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로마의 군인 롱기누스는 자신의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상흔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고 전한다.


예수가 죽고 난 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거나, 신앙을 부인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그들은 영도자를 잃고, 겁먹고 초라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토마스, 도마는 부활한 예수의 상흔에 손가락을 들이밀며 확인했다. 인간인 그에게 수난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으나 부활한 하느님의 아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방법은 믿음이나 사랑, 소망이 아니라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늘 의심한다. 인간이어서인지, 근기가 그 정도인 건지 분별이 안될 정도이다. 가끔은, 아니 자주 어디가 땅인지 어디가 하늘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해 여지없이 흔들린다. 그런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직면할 때마다 자책하지만 안다. 이런 순간들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이다. 의심은 두려움을 만들고, 결정을 미루게 만든다.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게 만들며, 퇴보하게 만든다. 하지만……. 멈춰 서게 만들기도 한다. 멈춰 서서 가늠하게 만든다. 그리고 불완전함을 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완전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죄에는 죄가 없듯이 의심에도 죄가 없다.


예수는 승천하기 전 자신의 제자들을 보러 왔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의 일은 그들이 해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예수는 옆구리의 상처를 찔러보는 토마스를 비난하지 않는다. 순순히 그가 손가락을 대어 보게 몸을 내어주며, 그들의 의심을 인간의 방식으로 불식시켰다. 토마스는 그 순간에 의심을 거두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최초로 인정한 사도가 되었다. 예수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가진 존재의 불완전함을 연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심은 괴롭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면서 얻게 된 경험과 기억들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의심은 생존의 기술이다. 수많은 의심의 순간들이 모인 것인 인생이라면 절대적 믿음을 얻게 된 찰나는 확실한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예수는 상흔을 내주며 그 의심을 연민했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늘 그런 연민을 느끼고 있다. 또 의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를 연민해 주는 존재를 인간은 신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신에게는 연민의 대상인 불완전한 존재일지도 의심하는 한 인간은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있다. 그것은 신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감각또한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느끼곤 한다. 신이 할 수 없는 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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