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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不安_안이 아니다

문자를 읽다.

by 검은 산

불안을 한자로 쓰면 ‘不安‘이다. 安이 아니라는 것이다. 安은 宀+女으로 이루어진 문자로 [한자어원사전]에서는 여성이 집에서 편안하게 머무르는 모습으로부터 편안함의 의미가 비롯되었다고 하고, [상용자해]에서는 여성이 조상의 영을 모신 묘당에서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풀이하고, 신부가 조상묘에 참배하고 남편의 집안에 소속되는 과정을 마친 상태를 ‘안安하다 ‘라고 해석했다.


安, ‘편안하다 ‘, ‘안전하다’와 같은 단어를 파생시킨 이 한자는 여성에게만 해당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여성의 상태로부터 ‘안전‘, ‘편안’함을 인식했던 것일까? 옛날의 사람들도 ‘집 밖은 위험하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정리해 보자면 하나의 약한 존재가 공간의 보호를 받고, 집단의 보호를 받는 상태를 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보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바야흐로 불안의 시대 21세기, 경제적으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인권이 발명되어 백성들에게도 왕을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과,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위로‘를 다룬 콘텐츠가 넘쳐난다. 많은 가졌음에도 사람들은 결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통 속에 있다고 느낀다. 진취적인 성공에 대한 비결과 뇌의 시스템을 조절하여 운명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아니러니 하게도 흔들린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 왜 불안한 지도 특정하지 못한 채 불안해한다.


저마다의 상황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의 상태는 불안이다. 왤까? 수많은 선택권 속에서 작아지는 자아에 지워지는 뚜렷한 한계 때문일까? 생각해 본다. 집 안에 있던 여인을 동화의 결말처럼 내내 행복했을까? 남편 조상의 영혼에 참배하며 그 가문에 속했던 여인은 또 항상 편안하고 안전했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의 ‘강자‘인 남자가 본 안정은 아니었을까? 애초에 안安 한 순간은 찰나이고, 불안不安한 상태가 일상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불안은 시대에 따라 모양을 달리할 뿐 늘 존재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차라리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은 그것과 함께 공존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집단이 아닌, 소속됨이 아닌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빗방물에 흔들리는 꽃처럼, 바람에 일렁이는 풀처럼, 살아있는 상태가 불안인 것은 아닐까?


암튼 다 모르겠고,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아직도 터득하지 못해서 누워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고 있는 자신을 불쌍히 여길 여유도 없는 21세기의 개인인 나 자신에게 그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 괜찮아, 다만 그 상태로 너무 오래 있지만 마 ‘ 안安은 순간이고, 불안不安이 오히려 기본값이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몇 번이나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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