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장_슬픈 노래를 부르는 늙은 장님의 밤

고은, <화엄경>

by 검은 산

지금 느끼는 슬픔은 진짜 슬픔인가? 이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인가? 약자들은 슬픔마저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인가?


어렸을 때, 고은 시인의 소설 <화엄경>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소설 <화엄경>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경험했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60개의 에피소드 가운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슬픈 노래를 부르는 늙은 장님의 밤’이라는 이야기였다. 장님 가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선재동자에게 들려준다.


그녀는 4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떨어져 눈을 빼앗기고 유마왕을 위해 슬픔을 노래하도록 길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왕궁으로 불러가게 되고, 그곳에서 잠시간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화려한 왕궁에서 유마왕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동침을 하지만, 7일 후 여성으로서의 삶도 빼앗긴다. 그 후 그녀는 50년 넘는 세월 동안 오직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삶을 보내게 된다. 서편제가 떠오르기도 하는 이 이야기는 당시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호화롭게 꾸민 왕궁과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약자의 슬픔까지도 소유하려는 이 이야기는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은유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뒷 맛이 너무 썼다. 지금의 행복도, 지금의 불행도 모두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 이전에,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인간 존재를 자각하게 하기 이전에, 약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약자의 모습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런 마음이 생겨난 것은 아마도 밑도 끝도 없이가 아니라, 현실에서 흔히 보는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슬픔을 강요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슬픔을 전이시킨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우정을 나눈다는 사이에서도 슬픔은 강요되기도 한다. 관계에서 약자일수록 폭력 앞에 무력하고, 특히나 도망칠 수도 없는 관계에서는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감정, 자존도 침해당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생각한다. 슬픔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슬픔이라고 표현되는 모든 감정들은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감정들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는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이전에 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나의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게 강요받은 슬픔인가.


슬픈 노래만을 부르며 50년을 살고 싶지는 않다. 기쁜 노래도 부르고 싶다. 아니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부르고 싶지 않다면 부르지 않겠다. 궁극적으로는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을 위해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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