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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이미 Mar 14. 2024

젓가락으로 비스킷을

옛날엔 학생실태 조사를 위한 '가정방문'이란 것이 있었다.

80년대 말은 자가용이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았고,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학교에는 음악 전공인 교감과 40대 후반 동과인 여선생님과 교장선생님 그리고 미술 선생님이 차가 있었다.

 

정주는 지금 가정 방문을 하려고 동료 교사인 미술선생님의 차에 탑승해 가고 있다.

그녀는 교직 8년 차였고 정주는 병아리 선생이었다.

처음 가정 방문이라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이 결례인 듯했지만 안 하면 안 되는 공식 출장까지 내어 주는 판이니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무실 선생들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로 공부 잘하는 아이와 잘 사는 집 위주로 계획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정주는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 결손 가정을 중심으로 방문 하기로 하였다.


 정주는 차 안에서 어릴 적 가정방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어릴 적 초등 삼 학년 때  기억으로는 우리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오지 않고 육십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집에 피아노 있는 사람? 손들어!" 하였다. 그다음에는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전화 있는 사람?"

"집에 전축(레코드) 있는 사람? 손들어!"

순차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거수한 학생들의 숫자를 세어 기록하고 그 학생들을 관리했는지는 어떤 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우리를 훑어보더니

"아버지 없는 사람?"

"할머니와 살고 있는 사람?"


이 질문에 아이들 몇 명은 얼굴 붉히며 자동으로  손을 들었고 그들의 고개는 이내 숙여졌다.

"자기 집 아닌 사람?"

 그런데 초등학교 삼 학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사글세인지 잘 알 수 있었을까?

 그런데  명만 빼고 거의 반 이상  손을 들었다.


'초등학생에게 이런 질문을 그땐 왜 했을까?'  어렸을 때지만 질문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었다.


얼마후 가정방문 할 지역에 당도 하였다.

미술 선생님은 자기 반 학생 집으로 향하고 난 그 마을 느티나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지역에는 전화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조금 있으니 길눈이 어두운 정주를 위해 그 학생이 마중을 나왔다.

 오늘 가정방문을 계획한 할머니와 살고 있는 남학생집 앞에 도착하였다.   

 그 아이를 따라 들어간 집은 골목의 맨 안쪽 집이었다. 그 집은 초라한 지붕의 토담집 단칸방이었다. 누가봐도 옹색한 느낌이었다. 사실 그런 집에 들어간 것도 처음이었다. 들어갈까 서서 할까 망설이고 있을 때  그 망설임의 마음을 눈치챈듯, 칠십대로 보이는 할머니는 손주의 선생님을 거센 손으로 끌어 당기셨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는 부엌에서  상을 차려 내어 오셨다.  찌그러진 은색  알루미늄 상 위에 올려진 접시에는 에이스 크래커 3개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비스킷을 집기 위한  젓가락 한쌍!


 그것을 보고 재미있어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하다가 다시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것에 담긴 할머니의 깊은  배려와  사이다에 설탕 한 숟갈까지 넣은  저어 주는 그녀만의 독특한 응대법.

가정 방문을 하고 나오면서 그날 정주는 그 할머니의 정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조촐한 상에 숨은 할머니의 손주 향한  깊은 사랑을, 그리고 얼굴의 깊게 파인 주름에 새겨진 세상 연륜의 깊이를 읽었다.

게다가 새파란 젊은 선생을 위해 내어 온 그녀의 속 깊은 마음을 정주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번째는 아버지와 살고 있는 남학생집이었다. 그 학생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교육해 주는 것에 감사하며 집에 오면  말이 없던 아들이 요즘은 집에 오면 학교 담임 이야기만 하는 아들이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엄마 없이 자란 아들을 챙겨주어 감사하다."면서  정주가 굳이 마다하는 데도 그는 이른 저녁을 아들 선생에게 대접 하기 위해 정주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그의 단골 식당인 것 같았다. 그는 "무슨 탕을 시켰다."라고 했다. 정주는 극구 사양했으나 그의 기세에 눌려서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용봉탕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정주는 그때 용봉탕이 무언지 몰랐다. 그런데 자라를 끓인 것이라는 것이다.  


정주는 그 말을 듣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입으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인 선생들은 이런 보신을 해야 한다면서  정주 쪽으로 그릇을 내밀었다.

 정주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먹지 않았다. 그의 성의를 무시한 것 같았지만 도저히 비위가 약해서 그건은 수용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 용봉탕은 그가 포장하여 집으로 가져가긴 하였지만 ......


"아는 만큼 보인다." 고 했던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기눌리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정주는 학교의 엄마가 되어 주기로 했다.


처음 맡은 학급의 학생들은 참 귀엽고 순수해서 좋았다. 정주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에게서

아름다운 마음을 읽고 그들의 꿈을 키우면서 ,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하루하루에 정주의 젊은 시간을 아낌없이 동행했다.

 애들아. 여긴 우리의 봄이야!. 한 겨울을 딛고 피어난 한 송이 매화처럼  매서운 시절이라도  질퍽한 땅이더라도 주저 앉지 말고 가자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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