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도 나무는 자란다

by 애이미

언젠가부터 카페가 도서관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은 모습을 자주 접한다.

학습은 전통적 도서관에서 몰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있던 나는 몇 년 전 까지 그 모습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지만 온갖 주위 소리는 다 들린다. 책을 펴고, 동영상을 보고 공부하는 모습이

열중하지 않고 보이기 위한 쇼란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이것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요즘은 스타벅스이 아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도 개장 시간부터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켜고 카페에서 학습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그래서 나도 젊은 그들처럼 한번 독서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차츰 그 모습에 용해 되어 갔다. 그들처럼.


어쩌면 자기 관리만 철저하면 나름대로 남의 시선과 주변을 주위를 인식하지 않고 차단하여 집중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듯하다.

고요한 공간에서 해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 아니라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인식의 변화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에도 복병은 있다.

큰소리로 떠드는 배려를 상실한 부류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 떠드는 사람들은 또 대부분 중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외국인이 많다는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날 나도 카페서 과외를 하게 되었다

서울의 으뜸 반포의 한 한강 카페에서

지인의 소개로 시작된 과외.

외국에서 성장한 십 대 소년이다.

그 소년은 매주 만나는 젊은 친구가 되었다.


여러 개의 학원을 뺑뺑돌이 하는 강남의 한 귀한 자녀는 다른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성적 향상도 없고 무엇보다 같은 또래들이 한국어가 서툴다고 같이 하기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특성에 맞게 가르친다는 것은 학원은

적절치 않다.


이런 사정을 전해 듣고 난 그 소년을 가르치기로 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가르치는 것이므로 삶의 저물녘에

가치 있는 봉사일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을 두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다림의 시간을 책 읽으며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아무도 내가 그 소년을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유익함이 있다. 이건 카페도서관이 갖는 부드러움과 익명성이 아닐까?


그날,

그 젊은 친구 엄마 안절부절 못하며 퇴근하여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아들을 찾았지만 그 소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종무소식이다.


세 시간의 기다림 속에 오래 앉아있는 것이 미안하여

커피를 두 잔 시켜 마시며 전자도서관에서 독서를 하고 있을 때 그 소년이 왔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학교서 축구하여 너무 피곤해

잠들어 버렸다고"

얼마나 솔직한가?


"그래? "

"잘했구나!"


소년은 어리둥절했다.

꾸중 들을 줄 알았는데 칭찬을 들었으니.


아이가 피곤하여 잠꽃 여행 중이었다는데 어른이 뭐라 하겠는가?

졸려서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겨낼 어른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론

"과외 선생이 이래서 되나?"는 생각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날 그 소년과 나 사이에 생긴 상호신뢰감은

작은 시간에도 많은 효과를 내는 시너지를 가져왔다.


탄탄한 독해력 형성을 위한 기본독서를 시작했고

세계역사 이 아기를 비롯한 동서양 얇은 고전들을

소년과 같이 정독하면서 그 소년은 점점 완독에 대한 자신감과 지문을 읽고 정확히 요약하는 방법을 파악하는 능력이 예리하고 분석적이 되어 갔다.


명저 서너 권을 끝냈을 때 훌쩍 커버린 소년을 보고

소년의 엄마는 매우 대견해 하였다.


공교육에서 고육과정의 제한 때문에 시도해보지 못했던 것을 그 소년에게 접목해 본 것이다.

읽기 능력과 정확한 독해 능력의 향상은 정독과 요약 학습이 기본이 된 바탕 위에서 탄탄해지기 때문이다.


그 소년과 함께 한 10개월.

주 1회 반포로 향하는 내 걸음은 삶의 에너지가 되었다.

반포까지의 시간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삶에서 봉사의 시간이었고,

시간의 구애 없이 사적 교육과정을 그 소년에 맞게 구성하여 하는 내 수업은 세상에 유일무이 그 소년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인생의 지혜와 경험이 깔린 오랜 공교육 교사가 걸림돌 없이 지도하는 무공해의 시간,

그리고 흡수율 좋은 그 소년의 명징함.


우리는 조손관계처럼 만나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까지 이야기하며,

논리적 구조를 배우고 생각을 키우는

우리들의 보물의 시간이었다.


삼십 년 넘게 고교교사이던 내가 기초 없는 초등 4년생을 고교 2년 수준으로 격상한 10개월의 시간


그 소년과의 만남의 시간이 행복해서

내가 즐긴 것이고. 그 소년에게

빈틈없이 스며든 수분 공급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놓고

베이글 한 개를 놓고

뽀로로 한 병 마시며 공부하는

우리의 시간에

우리의 공간은

청정지역이지만

가끔은

그 시간을 오염시키는

세상 소음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카페에서도 작은 나무는 쑥쑥 자란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