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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6. 2023

16. 하늘의 돌

 회색 수염은 오랜만에 관복을 차려입었다. 통이 넓은 소맷부리에 금실로 자수가 놓아져 있고, 옷자락은 바닥에 끌리도록 길었다. 허리에는 긴 띠를 휘감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비어 있는 한쪽 소매가 축 늘어져 있었다. 떨어져 나간 팔이 시큰거리는 것은 바람 탓일 게다.


 회색 수염은 상제를 알현하기 위해 학을 타고 날았다. 학이 우뚝 솟은 기암 앞에 회색 수염을 내려 주었다. 오색구름에 가려져 있던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수염은 궁전의 문 앞에 섰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수문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상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너른 마당을 지나니 높다란 옥 계단 위에 상제가 앉아 있었다. 상제는 붉은 용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각이 진 모를 쓰고 있었다. 상제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은은한 구슬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막 비가 개인 듯한 청명함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상제여! 회색 수염이 당도하였습니다."

 수문장이 고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상제의 양 옆에는 커다란 부채를 든 선녀들이 서 있었다. 한가롭게 부채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으나, 부채에는 강력한 주문이 숨겨져 있었다. 상제에게 악한 뜻을 품고 해하려 한다면, 부채는 태풍 같은 바람을 몰아치게 한다. 그 바람을 맞으면 선계의 끝까지 날아가게 되고, 그 육신은 나을 수 없는 병을 얻게 된다. 


 회색 수염은 상제에게 절을 했다.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훨씬 얼굴이 나아졌구먼. 다행이네."

 상제의 말에 회색 수염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길이 떠난 이후, 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칭하며 암흑의 동굴에 갇힐 것을 청했다. 많은 선인들이 그것이 합당하다고 했지만 상제는 회색 수염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래, 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았나?"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 무길의 칼은 피를 묻힐수록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녕 땅에는 무길을 막을 사람이 없는 것이냐?"

 "인간들은 아직 쇠를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뜨거운 불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이 선계의 대장장이들과 무길뿐이옵니다." 

 회색 수염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얼핏 그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지금으로선 선계에도 무길이 가진 칼을 상대할 신물이 없었다. 상제는 부정을 탄 대장간을 허물도록 했다. 욕망은 불길 같아서 한 번 번지고 나면 그 자리에 흔적을 남기고 만다. 무길의 뜨거운 욕망은 서서히 세상에 번져가고 있었다. 


 대장간을 새로 짓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 오른쪽 팔을 쓸 수 없었고, 대장간에는 무길을 넘어서는 대장장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석조가 날아와 수밀 선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상제가 말을 멈추고 석조를 어루만졌다. 잠시 후, 수밀 선인이 날듯이 다가와 상제에게 절을 했다.  

 "수밀 선인, 상제를 알현하러 왔나이다."

 수밀 선인의 모습을 보고 회색 수염이 예를 갖추었다. 상제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무길의 칼을 막아낼 방패를 만들어야겠다."

 "그만한 강한 쇠를 만들려면 하늘의 돌이 있어야 하옵니다."

 수밀 선인이 회색수염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상제가 회색 수염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하늘의 돌?"

 "네. 하지만 아직 아무도 하늘의 돌을 대장간으로 옮긴 이가 없었습니다." 

 회색 수염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 높아졌다. 


 그 자신 얼마나 여러 번 하늘의 돌을 구하고자 했던가! 아주 먼 옛날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불이 붙은 돌덩이가 하나가 떨어졌다. 그 돌은 깜깜한 산속 동굴에 들어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선계 최고의 대장장이들도 하늘의 돌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때 수밀 선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 선계에 탈해라는 아이가 와 있습니다. 사로국의 땅 어머니가 보낸 아이인데.   이 아이가 실은 용성국 출신입니다."

 "용성국이라고? 그럼 그 아이도 알에서 나왔단 말인가?" 

 상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수밀 선인이 상제의 말을 받았다. 

 "용의 핏줄은 불을 다루는데 능하다고 하옵니다. 그 아이가 선계에 제 운명을 찾아   러 왔다고 합니다."

 "그렇담 회색 수염이 대장장이로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는가?"

 느닷없는 상제의 말에 회색 수염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이제 제자를 새로 들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선계에 찾아온 것이 탈해였다면, 대장장이가 되는 운명 역시도 그 스스로 정할 것이다. 그가 만일 하늘의 돌을 찾아온다면 그에게 쇠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어떻겠나? "

 상제가 회색 수염의 눈을 바라보았다. 


 회색 수염은 그 순간 알아차렸다. 상제가 인간들에게 쇠의 비밀을 전하려 한다는 것을. 세상이 열리고 나서부터 인간들에게 비밀에 부쳐진 쇠의 비밀이 이제 봉인이 풀리려 하고 있었다. 


 상제의 궁전에서 나온 수밀 선인은 탈해를 불렀다. 

 "네가 불을 일으킨다는 것이 사실이냐?"

 탈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 줄 수 있겠느냐?" 

 탈해는 잠시 망설였다.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탁'하고 쳤다. 불꽃이 튕기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탈해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퉁겼다. 이번에는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우와."


 옆에 있던 선인군들이 놀라며 모여들었다. 탈해는 다신 한번 불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꽤 큰 불꽃이 타올랐다. 

 "네가 이 선계에 온 것이 우연은 아닌 듯하는구나."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 운명을 찾아왔다고 했느냐? 사로국을 지킬 힘을 찾는다 했느냐? 네가 만약 하   늘의 돌을 가져온다면 그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밀 선인의 말을 듣고 탈해는 벌떡 일어났다. 선계에 온 지 여러 날이 흘렀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신목이 쓰러지고, 이서국에서는 곧 쇠칼을 앞세운 군사들이 쳐들어 올 것이다. 눈이 멀어버린 아효 공주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얼음산에 가서 '하늘의 돌'을 찾아오너라. 그곳까지는 선인군들이  데려다줄 것이다."

 회색 수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헉' 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선인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허옇게 질려 버렸다. 선인군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탈해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수밀 선인은 탈해의 손에 뭔가를 건넸다. 동그렇게 말린 밧줄 꾸러미였다. 수밀 선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선인군이 학을 불렀다. 검은 학의 깃털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 같았다. 선인군이 못마땅하다는 듯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학이 탈해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탈해는 하마터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으악, 좀 천천히 가라고."

 탈해가 비명을 질렀지만 선인군은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뗐다. 학이 높이 날수록 바람은 춥고 매서웠다. 탈해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턱을 덜덜 떨었다. 입에서 나온 입김조차 금방 얼어붙었다.


 한참 만에 검은 학은 뾰족한 바위 산 아래 멈췄다. 풀 한 포기 없을 뿐 아니라 개미 한 마리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이었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가지?"

 탈해가 망설이며 물었다.  

 "가죽신을 뚫을 정도로 뾰족한 돌들이야. 머리를 써. 아까 수밀 선인이 주신 밧줄을 써야지."

 선인군은 이렇게 말하며 탈해의 어깨를 소리가 나게 쳤다. 


 탈해는 밧줄을 휙휙 돌렸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밧줄이 너울거렸다.  밧줄을 힘껏 던졌다. 밧줄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탈해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밧줄은 허공에 잠시 머물다 떨어졌다. 봉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높이였다.

 "실패군."

 선인군이 약을 올리듯 말했다. 


 탈해는 못 들은 척 있는 힘을 다해 밧줄을 던졌다. 허공에 멈추는가 싶던 밧줄이 마치 살아있는 듯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무언가 밧줄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밧줄이 봉우리에 걸리는 순간이었다.

 긴 밧줄이 바람에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탈해는 한 발로 버티고 서서 밧줄을 잡았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위산은 얼음처럼 미끄러웠다. 바람 소리도 구슬프게 들렸다. 


 순간 탈해의 발이 미끄러졌다. 

 “아악.”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한 팔로 잡고 있는 밧줄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탈해의 몸이 바위산의 반대쪽 면에 부딪쳤다. 탈해는 정신이 번쩍 나는 것 같았다. 밧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밧줄을 타고 올라왔다. 


 바위산에 올랐을 때, 주위는 온통 뾰족한 돌투성이었다. 한 발 한 발 옮기면서 탈해는 고통에 신음했다. 칼날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탈해는 마음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바닥이 끝나는 곳에 동굴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하늘의 돌이 있구나." 

 탈해는 고통을 참고 발을 내디뎠다.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탈해가 이를 악물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둥근돌들이 깔려 있었다. 피투성이 발이 꽁꽁 얼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탈해가 입을 벌릴 때마다 허연 김이 동굴 안에 퍼졌다. 탈해는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았다. 


 탈해는 손가락을 쳐서 불꽃을 일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불꽃은 금방 사드라들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탈해는 아효 공주를 생각했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탈해는 숨을 고른 뒤, 무릎걸음으로 동굴 구석을 살펴보았다. 천장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는 돌들은 누군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처럼 보였다. 


 그 한가운데 새하얀 돌이 놓여 있었다. 탈해는 반질반질한 돌을 만져 보았다. 탈해는 뜨겁게 달아오른 손으로 돌을 힘껏 돌을 밀어보았다. 한참 지나자 돌 틈에 고여 있던 물이 녹으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꼼짝도 않던 돌이 살며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탈해는 온 힘을 다해 돌을 밀었다. 

 ‘헉 헉 헉.’

 숨을 몰아쉬니 가슴이 터질 듯 아팠다. 탈해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손끝의 불꽃이 꺼질 것 같았다. 탈해는 몸을 웅크리고 몸 안의 열기를 모았다. 맨 처음 알에서 깨어나던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던 햇살을 떠올렸다. 동악에서 사슴을 만났을 때, 이마에 느껴지던 열기를 떠올렸다. 아효와 손끝이 부딪혔을 때의 뜨거운 느낌을 되살렸다. 처음 숯을 만지고 불꽃을 피워 올리던 때를 기억했다.  


 그러자 동굴 안에 한 줄기 햇빛이 비춰 들었다. 탈해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닥불을 쪼이는 것 같은 온기가 탈해의 몸을 감쌌다. 


 탈해는 망설이지 않고 하늘을 돌을 집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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