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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5. 탈해, 선계로 가다

 탈해는 홀로 걸었다. 흐느끼던 아효 공주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탈해는 당장이라도 아효 공주가 있는 금성으로 가고 싶었다. 눈이 멀어버린 아효 공주가 어찌 세상을 살아갈지 걱정이 되었다.


 눈만 감으면 시간은 신목이 베어지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육중한 나무가 우지끈하는 소리를 내며 꺾일 때, 사로국 사람들은 모두 울부짖었다. 신목의 앞을 가로막던 아효 공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탈해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탈해는 발을 멈췄다. 주위는 온통 어둠뿐,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귓전을 두드렸다. 탈해는 아효 공주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귀를 막았다. 

 "동악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너 자신과 아효 공주를 지킬 힘을 찾아오너라."

 의선 부인의 말은 수수께끼 같기만 했다. 동악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동악에 올라 멀리 동해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휴."

 거친 산을 넘으면서 탈해의 신발이 벗겨지고 발바닥이 갈라졌다.

 추위에 지친 탈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땅 어머니께 기도를 올렸다. 이레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밤이면 추위가 들짐승처럼 덮쳐왔다. 

 "사로국과 아효 공주를 구할 힘을 주십시오."

 탈해는 땅 어머니에게 간절히 기도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자 탈해는 점점 지쳐갔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눈이 먼 아효 공주가 바다에 나왔다가 발을 헛디뎌 물어 빠지는 꿈이었다. 

 "살려줘."

 아효 공주가 파도에 휩쓸러 가며 외쳤다. 탈해는 온몸이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탈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다 쪽에서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탈해는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풀 한 포기가 가늘게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을이 지나 누렇게 변해 버린 풀밭에서 초록색 풀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 희한한 일이군."


 탈해는 풀포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손에 닿은 듯했다. 탈해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탈해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한 발짝 물러섰다. 

  "챙챙 챙챙."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게 분명했다. 


 탈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악의 정상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소리가 울릴 때마다 풀포기가 흔들리는 분명했다. 탈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풀포기에 귀를 대 보았다.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탈해는 용기를 내어 풀포기를 뽑아보기로 했다. 손이 데일 것만큼 뜨거웠지만 꾹 참았다. 그러자 풀을 '쑥' 하고 그대로 뽑혀 나왔다. 그 자리에 동그란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 속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탈해는 자기도 모르게 구멍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탈해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구멍 속에 산과 계곡이 펼쳐져 있고, 오색찬란한 구름과 기암괴석이 보였다.

 "아니, 이럴 수가."

 바로 그 순간, 구멍은 점점 커지며 탈해를 삼키듯 끌고 들어갔다. 

 "으악."

 탈해가 비명을 질렀다. 멀리 동해의 바다에서 막 해가 떠올랐다.     


 "너는 누구냐?"

 웅성 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탈해의 발을 툭 치며 물었다. 탈해는 눈을 살짝 떴다.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탈해는 눈이 부셔 고개를 외로 꼬았다. 가만히 눈을 떠 보니 유난히 얼굴이 하얀 사람들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에 딱 붙은 옷을 입고  이상한 쇠붙이를 두르고 있었다. 


 탈해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뭔가에 부딪혔는지 머리가 몹시 아팠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너는 어디에서 온 정령이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암흑의 동굴에 보내겠다."

 탈해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탈해의 눈이 다시 감겼다. 

 "안 되겠군. 떠돌이 정령인 것 같으니 다른 선인들 눈에 띄기 전에 얼른 처리해 버리세나."

 어깨에 메고 있는 그물을 풀며 다가왔다.


 탈해는 발버둥을 치며 손을 저었다. 그 바람에 탈해의 웃옷이 올라가 등과 배가 드러났다.

 "잠깐, 이상한 점이 있네. 이 자가 배꼽이 없어."

 "배꼽이 없다고? 설마 그럴 리가."

 모여든 이들이 탈해의 웃옷을 벗겼다. 탈해의 배는 구리 빛깔이었으나,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참외 씨처럼 튀어나온 배꼽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모여선 사람들이 탈해의 배를 툭툭 건드리며 신기해했다.  

 "날 함부로 건드리지……."

 참다못한 탈해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말을 마치지 못했다. 탈해는 헛구역질을 했다.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심한 어지럼증은 난생처음이었다. 

 "잠깐,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네. 어서 수밀 선인께 알려야지."

 선인군 하나가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던졌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돌멩이는 제비를 돌 듯하더니 이내 파랑새가 되었다. 


 탈해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수밀 선인은 잠들어 있는 탈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선계의 문이 굳건히 닫혀 있는 지금, 인간계에서 선계로 넘어온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길이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선계의 문을 넘어갔을 때, 선계의 문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을 무너트리고 갔다. 그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선계의 문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남은 선인군들은 다시금 윤회의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인간 세상에 벗을 둔 선인들은 소식조차 전하기 어렵게 되었다. 우주가 시작된 이후로 선계와 인간계의 벽이 이처럼 높았던 적은 없었다. 


 수밀 선인은 자신의 손을 탈해의 이마에 댔다. 눈을 지긋하게 감고 탈해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인간계의 의선 부인이 보낸 자로구나."

 탈해가 얼굴을 약간 찡그리자 수밀 선인이 이마를 두어 번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탈해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탈해를 데리고 왔던 선인군이 입을 열었다. 

 "정말 인간계에서 온 것이 맞습니까?"

 "그렇구나. 하지만 이 아이는 어미의 태에서 난 아이가 아니야. 알에서 난 용성국   의 핏줄이지. 그래서 배꼽이 없었던 게야. 이름이……."

 수밀 선인이 손에 신경을 다시 집중했다. 탈해가 뭔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탈해라고 하는구나. 음……. 이 아이 역시 무길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   구나. 게다가 선계에 오는 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어."

 수밀 선인이 휘파람을 불어 학을 불렀다. 귓가에 뭔가 속삭이자 학이 높이 날아갔다. 잠시 후 돌아온 학은 부리에 삼화수를 물고 있었다. 


 수밀 선인이 삼화수를 받아 탈해의 코 끝에 댔다. 숨을 쉴 때마다 그윽한 향이 탈해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탈해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탈해는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독한 어지럼증은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정신이 좀 드는 것이냐?"

 탈해는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높다란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었고, 어느샌가 소매가 넓은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감돌았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제가 죽은 것입니까?"

 "허허. 죽었다고는 할 수 없지. 너는 계를 넘어 이곳 선계로 온 것뿐이니깐."

 "지금 선계라 하셨습니까?"

 "그래. 이곳이 선계의 선인들이 사는 길상촌이라고 한다."

 탈해는 수밀 선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인의 손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눈처럼 하얗게 빛났다. 


 "저는 소원이 있습니다. 제 운명을 찾아서 사로국을 구하고자 합니다." 

 수밀 선인은 깜짝 놀라며 탈해의 손을 놓았다. 

 "네 운명이라. 그것은 누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구하는 것이지."

 탈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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