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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6. 2023

17. 새로운 대장간

 "대장간은 삼백산 골짜기에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밀 선인의 말에 상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백산은 선계의 기운이 고여 있는 곳이었다. 

 "그럼 택일을 한 뒤, 회색 수염에게 가마를 쌓게 하겠습니다."

 수밀 선인은 깊게 절을 하고 상제 앞에서 물러났다. 


 그는 학을 타고 길상촌에 들러 가마를 쌓을 선인들을 모았다.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어야 하며, 집안에 병든 자 또한 없어야 했다. 모두 서른세 명의 선인이 상제의 표식을 받았다. 


 서른세 명의 선인들이 금줄이 쳐진 곳에서 멈춰 섰다. 터를 다져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곳에 경사지게 쌓아 올린 토둑이 있었다. 야트막한 산처럼 가운데가 높게 솟아 있었다. 그 한가운데 붉은빛이 도는 고운 흙이 쌓여 있었다. 불에 잘 견디는 점토였다. 


 물의 정령들이 흙더미 위에 조심스레 물을 붓자 선인들이 옷을 걷어 올리고 흙더미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의 기운을 발에 모아 흙을 물에 개기 시작했다. 서른세 명의 선인들은 원을 그리며 둘러서자 선녀들이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선인들은 흙덩이를 잘 이겨 가마를 쌓았다. 흙덩이가 무너지지 않게 다지며 타원형으로 쌓아 올라갔다. 뒤쪽으로는 풀무를 연결할 구멍을 여러 개 뚫고, 앞쪽으로는 쇳물이 녹아 나올 초롱 구멍을 만들었다.

 "점토를 단단하게 두드려 주십시오."

 회색 수염이 정중하게 말했다. 


 가마가 거의 다 만들어지자 회색 수염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한 군데 금이 간 곳도 없었으며, 갈라 터진 곳도 없었다. 회색 수염이 가마 밖으로 나와 고개를 끄덕이자 선녀들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올라와 천지신명께 바쳤다. 


 "불과 흙과 바람과 물

 이 가마 안에서 천명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뜨거운 쇳물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선녀들이 낮은 목소리를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모든 선인과 정령이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선인들은 네 방향으로 늘어서 액이 끼는 것을 막았다.


 숯을 공급할 정령과 가마에 철광석을 넣을 정령, 그리고 풀무질을 할 정령의 대표가 나와 가마 앞에 섰다. 

 "탈해는 이리 나오도록 하여라."

 회색 수염의 목소리가 떨렸다. 탈해는 하늘의 돌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수밀 선인이 그의 이마에도 붉은 흙을 발라주었다. 수밀 선인의 손이 닿는가 싶더니, 이마에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탈해는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선계에 살아왔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선녀들이 그들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에서는 소나무 향기 그윽하게 났다. 그들은 술을 네 번에 나눠 마셨다. 

 "불과 흙과 바람과 물."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탈해는 얼른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이마에 있던 붉은 흙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마에 스며들듯 서서히 사라져 갔다. 


 "초롱 구멍을 막아라."

 쇳물이 흘러나올 구멍을 막자, 미리 넉넉하게 준비해 둔 숯이 옮겨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토둑 가득히 숯을 채웠다. 다른 한쪽에서 풀무가 옮겨졌다. 두꺼운 송판을 이어 붙인 풀무는 스물 넉자의 크기였다. 두꺼운 헝겊을 아교로 여러 겹 붙어 바람이 새어나가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선인군들이 한쪽에 네 명씩 서서, 풀무질할 준비를 했다. 


 가마에 불을 붙일 차례가 되었다. 수밀 선인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선녀들을 불러보았다. 삼백산 정상에서 채화된 불이 화로에 담겨 전해졌다. 


 "불을 붙여라." 

 흰 옷을 입은 선녀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가장 어린 선녀가 앞으로 나와 불을 붙였다. 불쏘시개에서 불이 옮겨 붙자, 토둑 위에서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회색 수염이 수신호를 했다.


 "불매 올려라."

 풀무꾼들이 풀무를 밟기 시작했다. 발을 힘껏 굴러 공기를 토해내게 했다. 토둑 안에서 숯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선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며 풀무꾼들의 노고를 달랬다. 노랫소리가 빨라지면 풀무질도 빨라졌고, 노랫소리가 잦아들면 풀무질의 속도도 느려졌다. 

 탈해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늘의 돌을 넣어라."

 이윽고 회색 수염이 외쳤다. 탈해는 조심스럽게 불 속으로 하늘의 돌을 던졌다. 순식간에 불이 꺼져버릴 듯했다. 선녀들의 노랫소리는 더 빨라지고, 풀무꾼들은 더 힘껏 발을 굴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토둑 위의 불길이 거세어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듯한 기세였다. 


 "불매 교대."

 회색 수염의 지시에 불매꾼들이 풀무에서 내려왔다. 그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내려오자, 새로운 불매꾼 여덟 명이 풀무에 올랐다. 노랫소리는 또다시 빨라지고 잔뜩 부풀어 오른 풀무는 토둑 안으로 공기를 내뿜었다.


 아무도 한눈을 파는 자가 없었다. 풀무의 바람구멍이 막히거나 불길이 제 때 일어나지 않으면, 녹아가던 쇳물이 다시 굳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불티가 날렸지만 피하려고 용을 쓰는 이도 없었다. 


 회색 수염이 쇠망치를 들고 가마를 에워싼 토둑을 톡톡 두들겼다. 쇳물이 어느 만큼 찼는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회색 수염의 얼굴에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장장이 정령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그들은 쇳물을 받을 판장쇠틀을 달구었다. 쇳물이 채워지기도 전에 굳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틀이 달구어지자 초롱 구멍 앞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회색 수염이 자기 키보다 긴 꼬챙이로 초롱 구멍을 막고 있은 점토 마개를 콱 쑤셨다. 

 금빛 찬란한 쇳물이 불티를 날리며 쏟아져 나왔다. 

 '와' 

 여기저기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쇳물이 덩이쇠틀을 채웠다. 쇳물 위에 떠 있는 불순물을 걷어내면 덩이쇠는 벌써 갱엿처럼 식어 있었다. 회색 수염은 덩이쇠를 하나하나 평평하게 다독였다. 모두 여덟 장의 덩이쇠가 나왔다. 

 탈해는 역시 타고난 대장장이였다. 뭐든 한 번 해보면 회색 수염 못지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쇠는 눈물로 담금질을 하면 부러지거나 녹이 슨다. 분노로 담금질을 하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지. 칼을 드는 사람이 격한 마음으로 쇠를 만지면 세상은 난세가 된다. 만든 사람의 마음이 칼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법이니라."

 회색 수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길의 기술을 귀하게 여기기만 했지, 떠돌이 정령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탈해의 손에서 불덩이가 튀었다. 탈해의 불꽃은 잦아들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탈해는 화로에 불을 붙였다. 풀무질을 할 필요도 없이 화로 위에 올려놓았던 덩이쇠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탈해의 귓가에 챙챙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로 덩이쇠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탈해는 아효 공주를 생각했다. 


 덩이쇠를 모루 위에 올려놓은 뒤 힘껏 두드리기 시작했다. 

 '치익.'

 뜨거운 쇠가 물에 들어가는 순간,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이었다. 누군가 탈해에게 언제 쇠를 물에 넣고, 얼마만큼 담금질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말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모든 것은 탈해의 몸이 알아서 했다. 


 온몸에 화상 자국이 생기며 익힌 쇠부리 기술은 탈해의 몸에 새겨져 있었다.

 차갑게 식은 쇠를 다시 한번 화로에 올려놓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탈해는 다시 달궈진 쇠를 엿가락처럼 늘여 두 겹으로 접어가며 두드렸다. 칼을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듯하게 일직선으로 메질을 하는 것이다. 무길의 망치는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쇠는 어느새 길게 늘어나 칼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회색 수염은 탈해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탈해의 메질 소리는 마치 음악 소리 같았다. 선녀들이 잘록한 허리에 맨 장구를 두드리는 것처럼 장단이 있었다. 어깨 위에서 신명 난 가락이 놀고 있었다. 회색수염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눈이 틀림없음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탈해는 담금질을 위해 새 물을 준비했다. 날카로운 칼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비법이었다. 

 '칙'

 칼날 부분만 먼저 물에 넣어 급속히 식힌 후, 칼 전체를 물에 담갔다. 칼날은 칼등보다 더 단단하고, 상대적으로 무른 칼 등은 충격을 흡수해 줄 것이다. 이렇게 만든 칼은 거푸집을 이용해 만든 칼보다 몇 배나 더 강했다. 


 탈해는 숫돌을 꺼내 칼을 갈기 시작했다. 불에 그슬려 거무튀튀했던 칼이 달빛처럼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쇠가 가진 본래의 색이 드러나는 눈부신 순간이었다. 쉽게 구부러지는 청동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빛이었다.       


 "인간인 탈해에게 쇠의 비밀을 전하노라."


 쇠의 봉인을 푸는 상제의 목소리가 선계에 울려 퍼졌다. 말하는 우물에서 그윽한 소리가 났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쇠를 만들기만 하는 대장장이는 되지 말아라. 쇠를 만들어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하여라."


 선계의 모든 선인과 정령들이 무릎을 꿇고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탈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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