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숙현 Jul 16. 2023

19. 결투

 동쪽 바닷가에 까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까치들은 줄을 지어 한 방향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개를 한껏 펼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바다에 검은 비단 띠를 두른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날아든 까치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를 넘어서는 것 같았다. 까악 까악 우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구용이 심상치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배입니다."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멀리서 온 배가 틀림없었다. 배의 고물과 이물이 바짝 치켜 올라온 데다, 서로국의 배들에 비해 돛대가 유난히 높았다. 


 구용은 어릴 때부터 배를 부리고 바다를 건너다닌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도 배의 모습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동해에서 부는 바람을 잘 받기 위해서는 가로로 긴 돛대가 더 유리하다. 


 구용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다. 장배가 달의 나무를 베어 버린 뒤, 서로국 사람들은 무길의 발아래서 고통받았다. 무길은 철광석을 구하기 위해 온 나라를 파헤쳤다.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한 집 건너 사람이 죽어 나갔다. 


 달의 나무가 베어지고 나서 의선 부인의 신력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의선 부인은 힘 없이 늙어가는 가여운 노인일 뿐이었다. 

 "저 배에 액이 끼었다."

 서로국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이 너나없이 북을 들고 나왔다.  


 구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배 위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노를 젓는 사람도, 키를 잡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배 한가운데 궤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구용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구용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의선 부인은 구용의 옆에서 그 생각을 읽고 있었다. 구용과 다른 이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선 부인은 신중하게 배를 바라보았다. 의선 부인은 눈을 감고 손에 온 신경을 다 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신력을 모았다. 한참 뒤, 손바닥 한가운데 따뜻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불길한 기운은 아니었다. 이제 이 정도밖에 알 수가 없었다.


의선 부인이 구용에게 말했다. 

 "고물에 밧줄을 걸어 끌어올리도록 하여라."

 구용이 뱃사람들을 불러왔다. 


 발 빠른 사람들 서넛이 첨벙거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바람이 불어 배가 해안 가까운 곳으로 밀려왔다. 구용이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던졌다. 여럿이 힘을 모으자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배가 끌려오기 시작했다. 배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뱃사람들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이여차 이여차."

 그들은 합을 맞춰가며 힘을 모았다. 

 배가 해안에 닿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보다 배에 실려 있는 궤짝에 관심이 모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서지 않았다. 


 "궤짝을 열어보아라."

 의선 부인이 구용에게 명했다. 궤짝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것 같았다. 구용은 온 힘을 다해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자 환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궤짝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것은 긴 칼을 들고 있는 탈해였다!      


 탈해는 동악에 올랐다. 선계에 연결되어 있는 동악 역시 함부로 파헤쳐져 있었다. 이렇게 놔두었다가는 선계까지 해가 미칠 것이다. 


 작은 돌멩이 하나를 숲에 던지며 큰발에게 말했다.  

 "잠들어 있는 숲을 깨우는 거야."


 탈해가 숲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탈해는 새 소리를 따라가기도 하고, 나무에 귀를 대 보기도 했다. 무길과 맞서기 전에 동악의 기운을 흠뻑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큰발이는 그런 탈해의 모습을 지켜보다 깜짝 놀랐다. 탈해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오색구름이 탈해의 머리 위를 따라다녔다. 


 그때 소식을 들은 무길왕이 달려왔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군사들과 비도가 함께 하고 있었다. 

 "이런 애송이를 상대로 보내다니, 상제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로군." 

 무길왕이 천천히 칼을 빼며 말했다. 그의 입가에서 잔인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탈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무길을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무길왕의 눈이 탈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흐흐흐."


 무길왕의 웃음소리가 탈해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무길왕이 탈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무길왕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탈해의 얼굴을 향해 날려 차기를 했다. 탈해는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진흙투성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쪽 얼굴이 바닥에 쏠려 얼얼했다. 탈해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중심을 잡기도 전에 무길왕의 발이 다시 한번 탈해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간신히 무자비한 발을 피할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애송이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래가지고 강철검의 주인이 될 수 있겠나?"


 무길왕이 길게 늘어진 윗옷을 한쪽으로 젖히자 칼이 보였다. '쓰윽'하는 소리와 함께 무길의 차가운 칼이 탈해를 향해 날을 세웠다. 마치 눈을 부릅뜨고 탈해의 얼굴을 노려보는 듯했다. 탈해도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칼을 뽑아 들었다. 


 "벌써 겁먹었냐? 저렇게 구경하는 이들이 많은데 오줌이라도 지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빙 둘러싼 군사들이 탈해를 향해 '우우' 소리를 질렀다. 


 탈해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칼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무길왕은 탈해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씩 웃으며 바라보았다. 

 "네 놈도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알 터이니 지금이라도 썩 물러 서거라."

 "무길 당신이나 선계에 돌아가 죄를 비시오."

 "선계라…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본 말이군. 나는 예전의 무길이 아니다. 이제 이서국의 무길대왕이다."


 무길왕의 입에서 왕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군사들이 긴 창을 높게 쳐들었다. 그는 칼을 힘껏 내리치고 재빨리 탈해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한 번 치고 한 발짝 내딛고, 한 번 치고 또 한 걸음 탈해를 향해 다가왔다. 봄날에 고양이가 움직이듯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무길왕의 칼은 한 치도 빈틈이 없었다. 탈해는 정신없이 칼을 받아냈다. 


 칼과 칼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무왕길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탈해는 뒷걸음을 치며 몸을 오른편으로 재빨리 돌렸다. 무길왕의 칼이 간발의 차이로 탈해를 비켜나갔다. 

 "운이 꽤 좋군. 하지만 지금부턴 어림없을 거다."


 무길왕이 몸을 돌리며 칼을 휘저었다. 휙휙 하며 바람 소리가 났다. 탈해는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탈해는 숨을 몰아쉬며 무길왕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그의 눈빛이 두렵지 않았다. 

 "이얏."


 탈해의 기합 소리가 서로국에 울려 퍼지자 일월보검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였다. 탈해는 상대가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탈해는 무길왕의 강철검을 힘껏 내리쳤다.

 "댕그랑."

 

 무길왕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길왕이 뒤로 주춤거리며 쓰러지자 비도가 입으로 안개를 뿜었다. 탈해는 앞을 보지 못하고 그 틈을 탄 무길왕이 탈해를 칼로 내리쳤다. 

 "탈해야, 조심해."


 그 소리에 탈해가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탈해의 일월 보검이 두 자루로 나누어졌다. 탈해가 만든 칼은 하나인 듯 보였지만 실은 두 자루였던 것이다!


 뜨거운 태양을 닮은 일검과 차가운 달을 닮은 월검. 일검은 무길왕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그리고 월검은 그림자 비도를 향해 날을 세웠다. 

 "으악."

 둘의 비명이 서로국을 가득 채웠다.      


 탈해는 그동안 무길이 만든 무기들을 다 용광로에 넣고 녹이고, 그 쇳물로 사람들이 필요한 도구를 만들었다. 쇠를 녹여서 끝을 뾰족하게 벼리면 창이 되지만, 폭을 넓히면 호미가 되었다. 탈해는 전쟁을 위한 무기가 아니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사로국 사람들이 가장 감탄을 했던 것은 철로 만든 보습이었다. 보습으로 땅을 갈아 일으킬 때, 그들은 곡식의 씨앗과 희망을 함께 심었다.


 다시 사로국에 평화가 찾아왔다. 탈해는 달의 나무 앞에 가서 섰다. 선계에서 가져온 삼화수를 달의 나무에 접붙였다. 

 "달의 나무여. 다시 사로국 여섯 마을에 뿌리를 내리소서."


 아효 공주가 나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큰발이와 구용이 나왔다. 남해왕과 여섯 촌장도 함께 했다. 소벌도리 촌장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어둠도 빛도 없는 곳에 

  땅어머니는 깊은숨을 불어넣으셨네.

  하늘이 열리고 별이 태어나고 달이 차고 기우네.

  달의 나무여. 달의 나무여.

  사로국에 땅어머니의 기운을 채워주소서."     


 땅어머니의 노래가 사로국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이전 18화 18. 일월보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