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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14. 장개의 배신

 장개는 명활산 고야촌 촌장 호진의 아들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곱실거리며 눈매가 매서웠다.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이고 몸이 날래기가 바람 같았다. 무기를 잘 쓰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혁거세왕의 육신이 오체로 나뉘어 떨어지던 날, 그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왕의 죽음을 목격하고 경악했으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늦은 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육촌의 촌장들이 모여 새로운 왕을 모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그래, 사로국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으니, 어서 새 왕을 모셔야겠지.”

 “남해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까?”

 “아무래도……촌장들의 뜻이 그렇게 모이는구나.”

 고야촌의 촌장 호진은 이미 늙어 머리가 세고 허리가 구부러졌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묻는 것이냐?”

 “남해 왕자는 너무나 유약한 사람이옵니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고, 살생을 두려워합니다. 언제 이서국의 무길이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남해 왕자가 왕이 되면, 이 사로국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될 것입니다”


 장개의 얼굴이 불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아비의 낯빛이 하얗게 바뀌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촌장 호진이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같은 때에는 힘 있고 강한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어서 쇠칼을 만드는   법을 찾아서 무길에 맞서야 합니다.”

 “지금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더냐? 빙빙 돌리지 말고 해 보도록 해라.”

 “제가 왕이 되고자 합니다. 아버님이 나머지 촌장들의 뜻을 모아주신다면 제가 왕이 되어 이 사로국을 지키겠습니다.”

 장개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촌장 호진의 반응은 장개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호진은 장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목이 있는 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네 입으로 그런 말을 뱉다니! 땅 어머니가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어찌 혁거세 왕과 촌장들의 뜻을 어찌 거역하려 하느냐. 내 네놈과 부자 사이의 연을 끊겠다. 썩 물러가거라.”

 “저는 아버님의 아들이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호진은 등을 돌리고 돌아앉았다. 


 그 모습을 보는 장개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장개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 일어났다. 섭섭함이 원망으로, 그 원망이 분노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숯을 더 집어넣어라. 풀무질을 멈추지 마라. 불길이 조금이라도 사그라지면 안   된다.”

 이서국의 대장간에서는 무길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무길왕은 철광석이 나오는 산 중턱에 쇠터를 꾸몄다.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고, 땅을 파서 철광석을 캐게 했다. 


 쇠를 만들기 위해서는 청동을 부릴 때 쓰는 불보다 몇 배나 뜨거운 불이 필요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무길왕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안으로 들어와 잠시 쉬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숙한 비도의 목소리였다.

 "그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이서국으로 오고 나서, 비도는 충실한 신하의 역할을 맡았다. 다른 이들이 있을 때에는 선계에서처럼 무길왕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무길왕은 점점 자신의 역할에 익숙해졌다.


 선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힘은 사라지고 없었다. 비도는 부적을 쓸 수도 없었고, 주문을 외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비도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했다. 육신을 움직이는 한순간 한순간이 꿈같기만 했다. 


 무길왕은 고개를 들어 문 밖을 보았다. 성큼성큼 들어오는 비도 뒤로 다부진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무길왕은 흥미롭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도의 얼굴을 보고 겁에 질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표정의 변화를 눈치채기 힘들었다. 무길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비도가 눈짓을 하자 사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개라고 합니다."


 장개는 소리 없이 들어왔다. 그의 눈은 깊게 눌러쓴 두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장개가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그리고 무길왕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복종의 표현이었다. 

 무길왕은 무심히 손을 내밀었다. 이서국에 와서 그에게 복종을 하는 인간들을 무수히 보아왔던 터였다. 비도의 말처럼 왕이 된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비도가 품속에서 검은 천으로 싸인 물건을 꺼내 장개에게 주었다. 장개는 조심스럽게 검은 천을 풀어보았다. 장개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이것은 쇠칼이 아닙니까?"

 칼을 집는 장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길고 가는 칼날은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해를 닮은 청동검의 색깔과는 또 다른 빛이었다. 장개는 차갑고 단단해 보이는 칼을 들어보았다. 호롱불을 들어 칼을 자세히 보았다. 칼에는 물결무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무길왕이 장개에게 말했다. 

 "그 칼이 너에게 힘을 가져다줄 것이다."

 장개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무길왕이 비도에게 손짓했다. 왕은 그에게 가장 단단한 청동 칼을 들게 했다. 

 "이것이 사로국에서 가장 센 칼이라고 하지. 나는 이 칼을 들고, 너는 쇠칼을 들고   한 판 붙어볼까?" 

 비도가 청동 칼을 쳐들었다. 장개는 자기도 모르게 쇠칼을 높게 들었다. 칼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장개의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왔다. 호롱불에 비친 광채가 눈부셨다. 장개는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그가 본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청동과 쇠가 부딪쳤다. 

 "이얏."

 장개가 소리를 질렀다. 청동과 쇠가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허공에서 쨍하는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비도의 칼이 툭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장개는 자신의 칼을 들여다보았다. 쇠로 만들어진 칼은 여전히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쇠가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장개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잊고 서 있었다. 무길왕이 부러진 청동 검을 집어 들었다. 나른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너에게 쇠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 "

 "정말이십니까?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요?" 

 "의심이 많은 놈이군."  

 "예. 이 칼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왕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옆에 서있던 비도가 덧붙였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이라니요?"

 "……."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짧은 순간 장개는 비도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장개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어서 말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여전히 쇠칼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목을 베어다오." 

 비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개는 칼을 떨어트렸다.


 장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네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네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알고 있겠지?"

 장개는 고개를 들어 무길왕의 얼굴을 보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가 바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장개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제 사로국 사람이 아닙니다."

 장개가 돌아가자 비도가 숙였던 등을 펴고 말했다. 

 "내 참, 네 놈이 왕 노릇 하는 동안에 내 허리가 고생이구나. 클클클."

 무길왕이 못 들은 척 딴청을 했다.


 "저 어리석은 놈은 어디서 찾아온 거지?"

 "선계나 인간계나 너 같은 놈은 꼭 있게 마련이지. 나는 그런 놈들 냄새를 귀신처   럼 잘 맡는 것뿐이고."

 뱀 같은 비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장개는 동쪽 바닷가 신목 앞에 섰다. 달그림자가 건너편 산등성이와 정확히 겹치는 순간이었다. 장개의 눈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칼을 높이 쳐들었다. 


 '땅 어머니 따위는 믿지 않아.'

 날카로운 칼에 언뜻 장개의 얼굴이 비쳤다. 그의 두 눈 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있었다. 

 긴 칼이 잠시 동안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장개의 심장은 터지듯이 뛰었다. 장개는 두 손에 힘을 주고 신목을 내리쳤다. 

 "이얍."

 신목의 둥치에 선명한 칼자국이 찍혔다. 


  '우르릉 쾅 쾅.'

 먼 데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장개는  잠시 주춤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달이 모습을 가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둠 속에 잠겼다. 달빛을 잃은 세상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장개는 다시 한번 칼을 들어 올렸다. 있는 힘을 다해 신목을 베었다. 칼자국이 난 데마다 벌건 상처처럼 번들거렸다. 


 '우르릉 우르릉 쾅 쾅.'

 천둥소리가 훨씬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빗방울이 '툭' 무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것을 신호처럼 삽시간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구멍이 뚫릴 것처럼 비가 내렸다.  


 신목을 타고 빗물이 흘렀다. 빗물은 상처에서 나오는 피처럼 붉었다. 장개는 그제야 정신이 번득 들어 신목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신목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장개는 자신이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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